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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우리가꿈꾸는교회 김병완 목사, 겸손의 왕

  •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 기자
  • 송고시간 2020-06-02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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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우리가꿈꾸는교회 김병완 담임목사.(사진제공=우리가꿈꾸는교회)


1. 군림하는 자

하나님나라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인간의 근본 욕구를 ‘권력에로의 의지’로 보았다. 그는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은 욕구가 기본적인 본능이기 때문에, 억누를 것이 아니라 이것을 자연스럽게 발휘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니체의 사상은 행복의 정의를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극복했다는 느낌”으로 설명한다.

오늘 본문은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첫째는 ‘나아가는 자’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앞서 나아가셨다(32a절). 또한, 둘째는 ‘물러서는 자’로 앞으로의 일을 두려워했던 사람들이다(32c절). “두려워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포베오’는 ‘다가올 일들에 대한 무서운 감정’이다(LN). 그들은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워했다. 셋째는 ‘다가서는 자’로 다가올 일을 기대하는 사람들이었다(32b절). 그들이 ‘놀라고’라고 번역된 헬라어 ‘탐베오’는 ‘예상 못한 상황에 놀란 감정’이다. 그들은 왜 놀랐는가? 예상보다 예수님이 빨리 예루살렘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상황은 그들이 왜 예수를 따랐는지, 왜 놀랐는지를 설명해준다.

마태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가서 질문할 때, 간청한 주최자가 그들의 어머니임을 밝힌다.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마 20:21). 그들이 요구한 것은 “영광”이란 단어로 설명된다(37절). 그들은 예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 정치적으로 왕의 자리에 오르실 거라고 기대했다. 침례교 목사 라비 갈라티는 “미래의 지도자를 위해 위험을 감수한 추종자들은 종종 그에게 특별한 부탁을 할 권리를 얻었다.”고 한다. 세배대의 어머니는 두 아들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각 각 왕의 우편과 좌편에 한 자리씩을 부탁했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10제자도 이와 같은 생각이었다.

이는 그들이 다툰 사실로 명백하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41절). 그들의 관심은 오롯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의 욕망이 사람에 대한 지배욕이라는 것을 아셨다. 당시의 지도자(집권자)들이 그랬고(42a절), 영향력 있는 사람(고관)들이 그랬다(42b절). 지배욕은 신이 되고 싶은 감정이다.


우리는 자신의 가정, 학교, 직장 및 삶을 둘러싼 소우주에서 신이 되려고 한다. 니체는 인간이 신(초인)이 되기 위해서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저마다 힘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세상의 지향점은 제자들이 조금 전 보여준 다툼으로 금방 알 수 있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전쟁터다.

2. 섬기시는 분

예수님은 군림이 아닌 섬김으로 다스리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배계층이 되기보다는(43a절), 섬기는 자리로 갈 것을 명령 하신다(43b절). 왜냐하면 예수님이 종의 자리로 향하시기 때문이다. 다니엘서는 장차 올 메시아를 가리켜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불렀다. 김세윤 박사는 이 칭호를 가리켜 “어떤 분이 나타났는데 그가 ‘사람’같이 생겼다”는 표현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인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실 때 ‘그’라는 관사를 붙인 이유는 “그 ‘사람의 아들’, 다시 말해 자기가 바로 다니엘이 봤던 ‘그’라는 말”이다.

다니엘이 본 ‘그’는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다스리시는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절). 우리는 ‘주(LORD)’라는 말을 생각할 때, ‘군림’을 떠올리지만, 예수님은 ‘섬김’을 떠올리신다. 요한복음 13장 14절 “내가 주가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한편 대속물로 번역된 ‘뤼트론’은 당시 노예나 전쟁 포로의 자유를 사기 위해, 구입하는 비용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힘의 포로 되어 살아가는 우리를 구출해내시기 위해 자기 몸을 몸값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우리를 속량하시고,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니체는 초인을 말하고, 예수님은 종을 말씀하신다. 악이 주관하는 세상, 힘으로 힘을 다스리는 세상을 바꾸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군림이 아닌 섬김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희생적인 사랑과 성숙한 인품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자발적인 존경과 사랑일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그렇게 세상을 다스리신다.

우리가 이와 같이 예수의 길을 걷는다면,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고 바라는 세상이 조금 더 빨리 오지 않을까? 당신이 지금까지 세워온 세상은 어떤 미래를 향하고 있었는가?


jso848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