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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우리가꿈꾸는교회 김병완 목사, '얼마나 다행인가?'

  •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 기자
  • 송고시간 2020-10-22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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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우리가꿈꾸는교회 김병완 담임목사.(사진제공=우리가꿈꾸는교회)


"얼마나 다행인가?"

1. 회개만 하면 다인가?

영화 밀양을 언급하지 않아도,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외부의 시선은 불신이 가득하다. 어떤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과거에는 커피숍에서 교인들을 봐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는 자꾸 불안해보인다는 얘기였다. 90년대만 해도 어디에서 '종교'를 물어보면 자부심을 갖고 '기독교'라고 썼다. 중고등학교 때도, 친구들 중 '불교'라고 쓰면, 약간 후져보였고, '기독교'라고 쓰면 세련되 보였다. 그 시절, 어린이나 어른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참 많이 걸고 다녔고, 자동차 뒷면에는 '익투스(물고기)' 로고 스티커를 붙이고 다닌 사람들이 많았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불신의 대상, 불안한 대상이 되었는지, 좋았던 시기를 좋은 기회로 삼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이따금 든다.

기독교인들에게 회개는, 더 이상 숭고해보이는 어떤 것이 되지 않았다. 회개란 '돌이킴' 쉽게 표현하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반대로 가는 것인데 눈물로 기도한 뒤 우리는 돌아서는 과정을 덜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비교종교학에서는 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차이를 '자기부인'이 있는가에 둔다. 조상신에게 물 떠놓고 복만 구하는 무속신앙을 '하등종교'로 본다면, 신 앞에 자기를 성찰하고,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삶을 돌이킴이 있는 종교가 '고등종교'이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가 이에 속한다.

종교에 대한 존경은 이러한 '자기비움'을 바라보며 발생한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숭고'한 것이다. 원래 기독교는 '숭고한' 종교이다.

오늘 날 우리의 '회개'가 숭고해지려면 이러한 '자기비움'이 그 뒤에 받춰주어야 한다.

과거 우리의 기도가 건물 밖까지 진동케 하는 것이 부흥의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우리의 기도 뒤 우리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차분히 생각해봐야 잃어버린 부흥의 불씨를 작게나마 발견할 수 있다.

2. 다윗의 회개

사무엘하 12장의 다윗의 회개와 나단의 반응은 너무나 당혹스럽다. 자신의 충성된 장군 우리아를 사지에 몰아넣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은 정말 나쁜 행동을 했다. 과거 그의 겸손함과 그가 하나님 앞에 가졌던 모습과 달리 그의 치졸함과 비열함은 너무나 다른 사람처럼 실망케 한다. 하나님이 나단을 통해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은 부자의 이야기를 하시고, 다윗이 그 부자를 마땅히 죽여야한다고 했을 때 나단의 말이 얼마나 통쾌한지. "당신이 그 사람이라!"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 그에게 임하겠구나. 공의의 하나님, 조금도 그의 잘못을 지나치지 마세요.

이 본문을 잃을 때마다 내 마음 속에 벌떡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런데 12:13절 다윗의 즉각적인 반응은 너무나도 빨랐고, 나단의 대답도 너무나도 빨랐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다윗의 죄를 벌했지만, 그가 진심으로 용서하자 그것이 즉각적이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즉시 용서해주신다. 반대로 하나님의 용서가 정말이었다면 이후의 과정은 불필요해 보인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14절)."
다윗은 용서하셨는데, 다윗의 아들은 죽이신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여기서 '죄와 죄책'의 관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원래 '다윗'을 심판하셨을 것이다. 죄의 삯은 피를 흘리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스라엘의 왕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 대로 인솔하라고 세워진 자리다. 자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은 그를 자리에 앉혀주시고 넘치도록 은총을 주셨다. 그가 그 자리를 올바르게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했기 때문이다. 허나 그는 큰 범죄를 저질렀고 이는 그를 국가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었다. 이방 땅의 '원수'들 까지도 하나님을 얼마나 욕하겠는가.

하나님은 '공의'를 집행하셔야 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였음으로 '사랑'이 작동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시기로 하셨다. 그러나 '죄'에는 '죄책(책임)'이 따른다. 책임은 무엇인가가 대신해서 져야 한다.

이스라엘은 모세 이후 하나님께 범죄한 사실을 알리며 흠 없는 양이나 소를 잡았다. 죄는 용서를 구하면 되지만, 죄책은 무엇인가가 대신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다윗은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대표성을 갖는다. 그의 아들은 '불의함'으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들로서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부정하는 효과를 낳는다. 하나님은 그가 왕이기에 조금 더 특별하게 그의 죄책을 다루기로 결정하셨다.

죄는 용서해주시지만 죄책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3. 회개함으로 괜찮은 이유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요한1서 1:9).

우리의 죄는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기댄 약속이다. 그런데 '죄책'은 어떻게 되는가? '죄책'은 물어야 한다. 우리도 '아들'을 잃어야 한다. 양이나 소를 잡아야 한다. 우리가 짓는 죄를 생각하면 우리가 '죄책'의 양을 결코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죄에 따른 죄책으로 죽는다.

그런데 요한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다. 그것은 우리가 '아들'을 드리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담고 있다. 하나님이 '아들'을 우리에게 주기로 하신 일이다.

요한1서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렸다. 그 아들의 족적을 좇아 가는 자들은 그 아들의 '피'의 혜택을 입는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다.

우리는 더 이상, '아들'을 잃지 않아도 되며, 우리는 결국 '죽음'으로 죄책을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이 '죄책'을 그 아들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함으로 죄를 용서 받고 깨끗함을 얻는다. '죄책'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셨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우리의 '회개'가 어떤 희생을 치뤘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냥 '회개'만 하면 다가 아니라, 그 '회개'만 해도 괜찮아진 참 이유, '죄책'을 지신 그리스도를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회개'만 하고 돌이키지 않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 아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그 아버지의 마음과 날 향한 사랑의 무게 앞에 그분을 섬기지 않을 수 없다.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순종한다.

회개만으로 괜찮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책'을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깊게 생각해보라. "이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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