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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천호동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이 시대의 건강한 사람 VS. 병든 사람'

  •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 기자
  • 송고시간 2021-01-15 01:02
  • 뉴스홈 > 종교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이 시대의 '건강한 사람 VS. 병든 사람']
(누가복음 5:27-39)


주님께서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다.

(눅 5:31,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누가 건강한 사람이며, 누가 병든 사람일까?


1. 건강한 사람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사람을 고치는 의사로 오신 주님이 필요하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눅 5:30, 새번역)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평하면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거요?"

주님의 비유에서 '건강한' 사람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주님이 못마땅했다.
자신들은 그들을 더러운 사람이라 간주하고 피했는데
주님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기 때문이다.

스스로 건강하다 생각하는 사람, 
즉 스스로의 노력으로 거룩해졌고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도 충분히 경건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말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 생각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잘 알아서 
율법의 목록들을 세분화해서 하나하나 지켰다.
그것이 자신들의 의가 되어서 
자신들에 대해서 스스로 '의롭고 경건하고 거룩한 지도라'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건강하다 생각한 그들은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2. 병든 사람

그렇다면 누가 병든 사람일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지적한 '세리와 죄인들'이 
병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병이 들었다.
세리는 세금을 착복한 사람이었고 
죄인들은 율법을 공식적으로 어긴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의 영혼은 병이 든 것이 맞다.

즉 추상적인 병자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병든자요 실제적으로 죄인들이었다.

그들은 영혼에 병이 들었기 때문에 주님이 필요했고,
주님은 자신이 필요한 곳으로 찾아가셨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자신이 병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시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다.

실제로 병든 사람들이었고 
자신이 병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주님을 필요로 했고 
주님이 부르시면 가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간 사람들이
주님의 비유로 말씀하신 '병든 사람들'이었다.

3. 진짜 병든 사람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정말 건강한 자들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건강하지 않다.
존재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 의롭고 거룩하고 건강하다 생각한 것은
무섭고 엄청난 착각이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항목들을 자세히 지키는 듯 보였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는 온갖 죄를 다 범했고 
마음 속으로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교만까지 소유했기에
가장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진짜 큰 병에 들어서 회복이 어려운 상태인 자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병든 자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떤 운명이 될까?

(눅 5:36, 새번역)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서, 낡은 옷에다가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그 새 옷은 찢어져서 못 쓰게 되고, 또 새 옷에서 떼어낸 조각은 낡은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그들의 운명은 
찢어져서 못 쓰게 되고 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4.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주님이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게 말씀해 주신다.

(눅 5:38, 새번역)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낡은 가죽부대였고
세리와 죄인들이 새 가죽부대였다.
새 포도주이신 주님을 담으려면 반드시 새 부대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새 부대는 무엇일까?

(눅 5:39, 새번역)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새 포도주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묵은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포도주의 즐거움에 취한 사람은
새 포도주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 새 부대를 준비하지 않는다.
묵은 포도주를 계속 소유하고 싶어하고 
묵은 포도주에 취한 삶을 계속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는 무엇일까?
새 부대가 될 가장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다.
'묵은 포도주에 만족하지 못함'이다. 
'묵은 포도주의 혜택을 누리지 못함'이다.

주님 시대에 묵은 포도주는 '율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이었다.
'율법'을 중심으로 한 제도의 혜택을 가장 크게 누린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기반으로 기득권자들이 되고 말았다.

이제 그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기득권을 결코 빼앗기지 않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새 부대가 될 수 없었다.
새 포도주도 새 부대도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묵은 포도주의 시대인 율법을 중심으로 한 제도 속에서 
아무런 혜택을 누리지도 못했고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지도 못한 사람들이 
새 부대가 되어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었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세리들과 죄인들이 새 부대가 될 수 있었다.
율법을 제도화시켜서 사람들을 정죄하기 빠쁜 사회 속에서 
그들은 아무런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스스로를 정죄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님을 만났는데
주님은 자신들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부드럽게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해주셨고 
그 죄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품 안에 안기는 법을 알려주셨다.

주님의 그 용서의 눈빛을 누리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새 포도주이신 주님을 마음과 삶에 담는
진정한 새 부대가 되어갈 수 있었다.

5. 이 시대의 새 부대

이 시대의 새 부대는 어떤 사람일까?
새 부대라면 '헌 부대'가 아니어야 한다.
즉, 묵은 포도주를 담고 있지 않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가 담기지 않아야 한다고 말해야 더 정확하겠다.

이 시대에 '복음'이라고 이름붙여서 전해진 대부분의 메시지는
'기복주의, 성공주의, 은사주의'에다
타락한 자본주의와 결탁한 반공사상 등이라고 봐야 하겠다. 

그것들이 진리라고 믿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다.
타락한 세상의 관점과 결탁한 채로 
교회로 사람들을 모아들였고 교회 재정이 늘어났다. 
그 재정으로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짓고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교회는 초대형화 되었다.

그 속에서 혜택을 누린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목사와 장로들과 교회의 중심부를 차지했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부를 얻기도 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혜택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복음이라고 하니 들었는데,
일정 부분은 은혜를 받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했는데
마음 한쪽이 자꾸 불편해졌을 것이다.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된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자신의 형편과 마주쳐서 불편하고, 
복음이 그렇게 천박한 것인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부를 소유한 사람 중에도 
부와 성공을 주는 것이 복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실 앞에서 공허함에 빠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 생활에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을 통해 행복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참되고 근원적인 행복을 얻기 원하는데
교회와 교회의 기득권자들이 소위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는
결코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이 시대의 새 부대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교회에서의 그 불만과 불행의 경험이 아파서 
신앙의 본질을 찾고자 몸부림치면서 
조금씩 복음의 본질을 알아가고 누려가는 과정을 통해서
새 포도주를 마음에 담게 되고 서서히 새 부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6. 새 부대가 되려면?

시대가 바뀌고 있음이 점점 확연해진다.
시대가 점점 바뀌고 있을 즈음에 코로나 19가 터졌고,
이로 인하여 세상은 급속도로 새로운 시대가 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 부대가 되어야 하는데,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가 되어야 
이 시대에 참된 신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어떤 신앙인이 되어야 할까?

수많은 학자들과 유명 목사들이 
코로나 이후 시대를 살아갈 신박한 해법들을 내놓고 있다.
공감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나는 그 해법들에 대해서 조금 회의적이다.

주님이 오신 시대에 누군가 신박한 해법을 내놓아서 
새 포도주이신 주님을 담은 새 부대가 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 시대의 세리와 죄인들에게 주님이 찾아가셨고 
그들은 찾아오신 주님을 맞이했을 뿐이다. 
그랬더니 그들은 어느새 '새 부대'가 되어 있었고 
새 포도주이신 주님을 누리며 새 시대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이 시대도 신박한 해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만남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주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이니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을까?
그저 운에 맡겨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찾아가지 않으셨고
세리와 죄인들에게는 찾아가셨다.
주님이 찾아오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외식하고 거룩한 척 하는 
위선적은 종교생활을 하지 않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자신의 죄를 깊이 직시하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 시대의 왜곡된 복음을 통해 
이익을 얻고 누리면서 외식하는 자리에서 도망쳐야 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아파하는 자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죄 사함의 은총을 누려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그 해법도 잘 모른다.
다만 나는 살고 싶어서 말씀을 묵상했고
묵상한 말씀을 통해 살아났다. 

나는 기복주의, 성공주의, 은사주의의 분위기를 
너무나 많이 경험했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것을 벗어난 교회와 목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잘 없었다.
제법 좋은 교회, 좋은 목사라고 찾아갔지만,
처음엔 제법 괜찮은 듯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그 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기복주의와 성공주의가 드러났다.

순수한 복음,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이란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것인지 절망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말씀을 생명으로 붙들었다.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말씀 자체를 통해서 
생명을 얻고 누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매일 치열하게 말씀을 묵상했다.

기복주의, 성공주의, 은사주의가 복음이라면 
나는 복음을 버려야 했다.
그것은 세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말씀의 본질적인 가치들이 하나씩 새겨지기 시작했다.
신대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만난 
두 세분의 교수님을 통해서 신앙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경험도 했다.

감사하게도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누려가는 삶이
나의 매일의 일상이 되기 시작했다.

기복주의, 성공주의, 은사주의, 교회의 대형화 추구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들인지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고,
그것이 복음과 얼마나 상관이 없는지도 알아가기 시작했다. 
살 것 같았다.

지금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목회를 할까?
나는 별로 고민이 없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 삶을 걸고 
묵상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 삶을 걸고 살아가되,
말씀이 깨닫게 해주는 나의 죄인됨을 잊지 않고 
주의 긍휼에만 기대는 삶의 자세를 놓치지 않으면 된다고 믿는다.
그 본질을 따라가도록 성도들을 돕고 세워가면 될 것이라 믿는다.

형식과 방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대면 예배든 비대면 예배든 그게 뭐가 중요할까?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상관 없이 
성도가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삶을 걸고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 나의 목회의 전부가 되면 될 것 같다.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우리 교회는 거의 비대면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성도 각자가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내용을 밴드에서 나누고 있다.
묵상하지 못한 분은 다른 분들의 묵상글을 읽고 공감을 하신다.

이렇게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나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말씀의빛교회는 이렇게 해오고 있고 
이 방법을 통해서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고 있고 
신앙의 성숙을 누려가고 있기도 하다.

신자가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주의 긍휼에 기대는 마음이 커져간다면 
어떤 상황이 오고 어떤 시대가 된다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말씀 속에서 생명을 누려가는 신자만이 
이 시대에 참된 행복을 누려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시대가 바뀌고 새로운 시대가 될수록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들을 찾아가야 할 것인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말씀'이다.

말씀을 생명으로 붙들어 새 시대에 새 부대가 되어 
새 포도주를 잘 담을 수 있는 성도들이 많아지길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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