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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감리교회 김진구 목사, '혼인 잔치의 비전과 최후의 전쟁'

  •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 기자
  • 송고시간 2021-04-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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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감리교회 김진구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묵상제목] 혼인 잔치의 비전과 최후의 전쟁
묵상본문] 요한계시록 19장1~21절

1) 1750년, 영국의 런던에서 헨델의 메시아가 공연될 때, 영국의 국왕 조지2세가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헨델의 메시아 44번째 곡인 '할렐루야'가 울려 퍼질 때 조지 2세는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을 묵상하고 있는 우리들도 지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렇게 외쳐야 하지 않을까요? "할렐루야!"

2) 큰 음녀에 대한 심판과 바벨의 멸망의 환상을 본 후, 요한은 하늘의 허다한 무리들이 큰 소리로 이렇게 노래하는 것을 듣게됩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으로 갚으셨도다." 그리고 두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3) 이어서 이십사장로의 찬송과 함께 찬송하라는 음성이 보좌로부터 흘러나왔고, 그리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준비하는 이들의 찬송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을 축복하는 천사의 멘트와 함께, 그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하는 요한의 돌출행동과 "자기에게 절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는 천사의 권면도 있었습니다.

4)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구원의 새노래를 지속적으로 요한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부터 계속 반복되는 듯한 재난과 심판의 메시지들은 자칫 우리들을 주님이 결코 원치 않는 두려움과 불안 속으로 인도할 만도 한데, 그 사이사이 후렴구처럼 끼어넣은 구원의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 위험한 요한계시록 읽기의 미혹으로부터 자유케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주님과 함께 "할렐루야!" 찬송하며 어둔 터널들을 힘차게 빠져나오기도 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


5) 저는 이 본문을 지난 2015년에 새해를 시작하면서도 신동감리교회 성도들과 함께 묵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저에게 주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안으로 깊이 들어오라."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과 함께 내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라." "내가 너를 그렇게 초대했듯이 너도 역시 그렇게 그들을 초대하고, 그들을 그렇게 내 안으로 인도하거라." "그리고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풍성한 식탁에서 멋진 잔치를 베풀어보자꾸나." "그리고 우리 함께 아버지 안에서 풍성히 먹고 마시며 안식을 누리자꾸나."

6) 주님과 동행하면서 항상 새해가 기대가 되기도 하 렸지만, 지난 2015년도... 정말로 더 많이 기대가 되었던 해이고 또 주님이 그 기대를 채워주셨던 해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고 저는 그 해에 이 요한계시록을 신동감리교회 성도들과 함께 묵상하면서 놀라운 은혜를 경헌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함께 읽은 본문에서도 요한은 천사로 부터 다음과 같은 축복의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9:9)

7) 구원의 본질은 잔치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잔치를 베풀었었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또 마태복음 22장에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큰 잔치를 베풀어주신 임금님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시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시면서 충성된 당신의 일꾼들을 당신의 거룩한 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8) 주님의 공생애 사역도 잔치로 시작해서 잔치로 마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라는 지역에서 혼인잔치에 참여하신 주님이 물로 포도주로 만드시면서 잔치를 더 잔치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공생애를 마감하시고 십자가의 제단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서 거룩한 식탁을 준비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니라."(눅 22:20)

9) 저와 함께 만나는 십자가의 전사들은 만날 때마다 성만찬을 합니다. 주님의 너무도 소중한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요 6:54)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리라."(요 6:55-56)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7)

10) 제가 우리 기독교전통 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만찬, 그것은 눈에 보이는 우리들의 교회(congregation) 안에서 절기때만 행해져야 할 그런 예식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성만찬은 날마다 가정에서 행해져야 할 매일의 양식(daily bread)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이 모일 때 목회자를 중심으로 모일 때 마다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그 가정의 제사장인 아버지를 중심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날마다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11) 성만찬은 단순한 기념 예식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람들이 날마다 주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아주 소중한 약속있는 주님의 예식입니다. 성만찬의 주인공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주님에 의해서 왕의 식탁에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성만찬의 자리에서 날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주님의 임재를 누리고,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은 후에는 주님과 함께 영적 갑옷을 입고 또 다시 날마다 세상이라는 영적인 전쟁터로 나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12) 물론 그 영적인 전쟁터도 잔치의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영적인 전쟁터로 달려 나가기에 전혀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19장 1절부터 10절까지 왕의 식탁에 초대받은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9장 11절부터 21절까지는 또 다시 왕과 함께 전쟁터로 달려 나가는 거룩한 신부들... 십자가의 전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3) 요한은 또 다시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더니 백마를 탄 자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전쟁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 스스로는 이미 승리한 전쟁이지만, 이제 우리들 안에서 우리들과 함께 그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또 다시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14) 전쟁터에 서신 주님의 눈은 마치 '불꽃'과도 같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눈이 불꽃과 같다는 것은 주님이 모든 이들의 마음과 그 의도도 온전하게 살피신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승리의 면류관입니다. 우리 주님은 날마다 이기고 또 이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요한은 자기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이름을 하나 보게 되는데, 그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보화를 발겨한 자들에게는 실제이지만, 그 보화에 대해서 눈에 뜨이지 않은 자들에게는 여전히 비밀일 뿐입니다.

15) 우리들을 위해서 날마다 전쟁터로 나가는 우리 주님은 또한 "피 뿌린 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힘이나 능력은 돈이나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정결함에서 나옵니다. 정결하게 하는 샘이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이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미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보혈의 능력도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16) 주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또한 우리들을 당신의 말씀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2-3)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 있어서 예수님이 언제나 당당하셨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이 또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도 역시 날마다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17) 요한은 또한 우리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이 검으로 만국을 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은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한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것입니다. 진노의 포도주 틀에서는 이미 계시록 14장을 읽을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분의 옷과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는데, 또 거기에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도 써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18) 요한계시록은 정말로 드라마틱 하고 짜임새가 있는 완벽한 책입니다. 6장부터 시작된 재앙의 이야기는 정말로 숨막힐 정도로 써스펜스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이 됩니다. 16장을 중심으로 서서히 그 두려움의 안개가 걷히는듯 하더니 17장,18장,19장에 이르러 정말로 통쾌하고, 판타스틱한 영상으로 바뀌어집니다. 18장 11절 이하의 말씀 역시 최후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 그런데 전쟁이야기 치고, 이렇게 편안하게 즐기며 볼 수 있는 작품이 또 얼마나 될까요? 요한은 계속 하나님이 베푼 하늘극장에서 드라마틱한 요한계시록의 결말부분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 천사가 또 나타나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계19:"17-18)

20) 요한계시록 19장은 잔치 이야기로 시작해서 전쟁이야기로 갔다가 다시 또 잔치 이야기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19장 1절부터10절은 주님의 식탁에 초대받은 거룩한 신부들을 위한 잔치라면, 19장 11절부터 18절까지의 전쟁이야기는 온 우주의 피조물들도 함께 즐기는 우주적 식탁에서 벌어지는 잔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잔치를 위하여 우리들이 또한 지금도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1)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동행하여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때, 그 기쁨은 우리들과 우리들 안에 계신 주님의 기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에 편만한 모든 피조물들의 기쁨이 되는 성대한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22) 사실, 이 땅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전쟁터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서 우리 주님이 백마를 타고 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역시 십자가의 도 임파테이션 사역을 하면서, 그 과정을 영적 전쟁터까지 나아갑니다. (1단계-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깊이 체험하기, 2단계- 십자가의 도와 함께 십자가의 전사로 거듭나기, 3단계 - 영적전쟁의 실제와 전술전략)

23) 사람들은 전쟁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제가 '십자가의 전사'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것을 혐오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전쟁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참된 평화가 전쟁이 없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리얼하게 이야기 해 주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 전쟁의 한 복판에 언제나 우리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24) 이 땅에는 거짓된 평화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승리의 결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 굴복하고 악한 자들과 타협하며 악한 자들이 내어 주는 썩은 고기 몇개 주워먹고, 그것을 평화라고 착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자들이 있습니다. "진리와 충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주님은 보이지 않고, "그냥 모든 것을 안전하게, 좋게 좋게... 그리고 은혜(?)롭게..." 그것을 평화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25) 전쟁은 악한 것이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선하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성급하게 미국과 이라크 전쟁처럼, 이 땅의 육적인 전쟁들을 미화시키라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전쟁의 실제를 꿰뚫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라."(엡 6:12)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은 모든 전쟁이 또한 잔치가 될 것입니다. 

26) 우리는 구원의 또 다른 측면이기도 하는 잔치의 비젼을 전쟁을 제껴 놓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잔치만을 좋아하면 잔치의 주인공이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이 베푸신 빵조각 몇개에 만족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바라보는 잔치는 날마다 주님과 함께 전쟁을 통과하면서 누리는 영적 전쟁의 승리로서의 잔치입니다. 그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은 주님이 주시는 빵조각 몇개가 아니라, 영생의 양식인 주님을 온전히 소유하고, 또 그 주님 안에서 주님의 완전한 소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27) 요한은 이제, 완전한 승리의 이야기를 써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아마겟돈에 모여서 주님을 대항하려고 했지만, 바로 거기서 그들은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짐승도 사로잡히고, 거짓 선지자도 사로잡히고, 미혹하던 모든 자들이 산채로 잡혀 유황불이 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들 역시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게 되고 결국은 모든 새들이 그들의 살로 배를 부르게 하며 우주적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8) 요한 계시록 하면, 아마겟돈이 먼저 생각난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아마겟돈은 알겠는데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잘 모르겠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주님을 모르면 아마겟돈도 모르고 요한계시록도 모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안전하게 읽는 것은 주님 안에서 읽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미나를 통해서 읽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사로이 성경풀기를 좋아하는 어떤 성서해석자들을 통해서 읽혀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온전히 주님의 빛 가운데서 읽어야 합니다.

29)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글을 올리면서 계속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요한계시록을 묵상하고 그 글들을 여기에 옮기면서 주님을 드러내지 못했다면 저는 역시 요한계시록을 사사로이 푼 것입니다. 오늘도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제 미천한 글을 통해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주님의 빛을 제대로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20장과 21장,22장... 세 장이 남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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