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뉴스통신

뉴스홈 전체기사 정치 산업ㆍ경제 사회 국제
스포츠 전국 연예·문화 종교 인터뷰 TV

신동감리교회 김진구 목사, '다시 읽는 요한계시록(33)'

  •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 기자
  • 송고시간 2022-01-20 05:00
  • 뉴스홈 > 종교
신동감리교회 김진구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다시 읽는 요한계시록 - 33

묵상제목]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

묵상본문] 계21:1~27

1) "주님, 제가 신방을 보면 안될까요?" 제가 존경하는 Y목사님께서 어느 날, 꿈속에서 천국을 방문하여 주님께 드린 질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이렇게 대답해주셨습니다. "나도 아직 신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주님은 "왜요?"  이렇게 질문하는 그 목사님에게 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유괴된 자녀들을 되찾아 아버지에게 드림으로써 그 분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그 피가 멈추게 되는 순간까지 결코 신방에 들어가지 않는단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존재한단다."

2) 제가 존경하는 그 목사님께서는 여자 목사님으로서 저의 영적성장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셨던 아주 소중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는 신방을 보고나면 지금보다 더 예수님을 사모하며 정결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천국에 가면 주님에게 반드시 위와 같은 질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 그런 질문을 한 것인데 주님의 대답에 매우 실망했었다고 하셨습니다.

3) 그때 주님은 그 목사님에게 "이리 외라!" 하고 부르시더니 군인의 옷을 입혀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함께 일하자. 함께 전투하러 가자. 유괴된 자녀를 아버지에게  모두 되찾아드릴 때까지..." 그리고 목사님은 주님 앞에서 그만 울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신부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주지 못하고 전사의 옷을 입혀야 하는 신랑의 안타까운 사정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웨딩드레스를 입고싶어했던 사치스러움과 시대를 분별하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에 크게 회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4) 요한계시록 21장을 묵상하고 글을 올리면서 적잖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천국의 실제를 강조해야 하나? 천국의 의미를 강조해야 하나? 오랜시간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천국의 실제를 강조하면 천국의 실제를 부정하는 이들로부터 적잖은 논쟁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또 천국의 의미만 이야기 하다보면 천국의 실제가 주는 그 감동이 사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5) 제가 존경하던 위의 목사님께서는 천국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신적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내려와 현실로 돌아왔을 때,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 땅의 많은 신학과 이론 그리고 지식들이 거꾸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야."

6) 저는 그 목사님처럼 천국에 들어가서 천국을 구경하고 주님과 동행했던 경험은 꿈속에서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천국에 관한 수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역시 꿈과 입신의 체험을 통해서 천국내부는 아니라도 천국입구  까지는 가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눈이 열려 서쪽하늘에 보랏빛으로 빛나는 거룩한 성을 본적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환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7) 제가 십자가의 주님을 경험하고 초기에 그 목사님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그 목사님과 깊고 풍성한 영적인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선으로 온 다음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 목사님을 가까이서 뵐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그 목사님의 사역에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을 잘 모르는 이들이 그 목사님의 사역에서 일어나는 현상만 보고 그 분의 사역을 곡해하여 폄훼하고 심지어 그 목사님을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적대감을 가진 이들에게 그 목사님을 변호하는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가끔씩은 그 목사님의 한계가 보이기도 했고, 그 목사님의 사역에 있어서 어떤 부분은 다소 걱정이 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주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님, 무엇이 옳은 것인가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요?"  "주님, 이제 저는 어찌해야 하나요?"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옳다. 그리고 너도 옳다. 그러나 너는 침묵하라." 그래서 저는 그 목사님의 문제가 불거질때마다 침묵했습니다.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비겁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주님께 온전히 순종했더니 오랜 후에 주님이 또 말씀해주셨습니다. "잘하였구나. 네가 참, 잘 참고 인내했구나."  그리고 한동안 한국교회를 삼킬듯이 부흥의 열정을 태우며 헌신하던 그 목사님의 사역이 멈추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갑자기 쓰러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향한 비난과 왜곡된 루머도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9) 저는 천국에 다녀 왔다는 사람들의 모든 간증을 모두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봤다는 천국의 실제까지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우리들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들의 주님이 우리들에게 하신 가장 분명한 약속이고, 그리고 또 성경의 가장 확실한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정하고 이것을 왜곡하려는 자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10)  천국의 의미와 천국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천국의 실제는 더 중요한 것입니다. 천국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천국의 의미와 천국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국을 경험한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의미와 가치가 아닙니다. 천국은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실제인 것입니다.

11)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을 이미 경험한 자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임한 천국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의를 위하여 박해를받는 자는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0)

12) 물론 우리들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천국체험이 밧모섬의 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 천국은 아닙니다. 요한은 분명히 역사의 종말과 그 이후에 펼쳐질 새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시간인 영원 속에서는 이미 성취된 것일 수도 있지만 과거,현재,미래라고 하는 시간의 제한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경험되지 않은 실제일 수도 있습니다. 천국의 현재적 의미와 가치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이것마저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3) 근대과학이 발달한 이후에는 이것을 부정하려는 세력이 엄청나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친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불신자들은 여전히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 신학자들과 교회 강단에서 조차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교묘히 왜곡시키려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저는 단호합니다. 이것은 세대주의 논쟁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론과 가치의 충돌도 아닙니다. 

14) 이것은 진리냐 거짓이냐의 문제입니다. 진리는 기꺼이 생명을 바칠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 그리고 그분 안에서 경험한 내 안의 실제들 그 진리의 말씀때문에 우리들은 언제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실제, 그 다음에 의미와 가치인 것입니다. 표적이라는 말도 그것입니다. 밧모섬의 요한을 비롯하여 사도들이 본 실제가 있었고 그 다음에 그들이 본 것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도 마찬가지이고, 오병이어의 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15) 오늘본문에서 요한이 분명하게 본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요한이 본 이 실제를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요한이 묵시문학적인 표현을 쓰는 것도 사실이지만, 요한계시록이 묵시의 말씀이 아니라 계시와 예언의 말씀이라는 사실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어서 요한의 입술을 통한 주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이 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모습이 꼭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요한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결혼식의 비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 유대인들에게도 결혼풍습이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에게 있어서 결혼 계약이 성립되면 신랑은 신부에게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신부를 위해 거처할 집을 마련하고, 신부는 신랑이 올때까지 신랑의 가풍을 익히고, 신랑의 정결한 신부가 되기 위하여 과거의 모든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약혼기간은 최소한 1년이고 길면은 2년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약혼 기간을 최소한 1년으로 잡은 것은 약혼녀의 순결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약혼을 하면 아직 한 몸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하나가 된 것이고 이미 부부인 것입니다.

17) 혼인 날짜가 되면 남자가 여자를 데러러 가는데, 이 때 남자는 아버지에게서 승낙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것이 다 준비된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아들을 신부에게 보내게 되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신랑도 모르고 신부도 모른다고 합니다. 물론 신부는 신랑이 올 때까지 그때를 묻지도 않습니다. 단지 신부는 신랑이 반드시 온다는 확신 속에서 더욱 정결하게 자신을 준비하며 신랑이 오면 즉시 떠날 채비만 하고 있습니다.

18) 신랑의 도착 시간은 종종 한밤중에 되기도 했습니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어오면 신랑의 들러리들이 쇼파르(뿔나팔)을 불어대며 신랑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리고 신부는 신랑을 따라 나서게 되는데, 신부가 도착하면 신랑의 집에서 혼인 만찬이 거행됩니다. 이때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행렬을 이루어 결혼식장으로 가게 되는데, 오래 횃불을 사용하려면 많은 기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열처녀의 비유에서 나오는 그 기름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19) 혼인잔치를 주관하는 집에서는 주인이 손님들을 두 번 초청합니다. 첫번째 초청은 잔치가 있음을 알리는 초청이고 두번째 초청은 잔치 준비가 다 끝났으니 속히 참석하라고 하는 초청입니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는 결혼하는 날 하나님 앞에 속죄함을 받기 위하여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금식을 하는데 이것은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사함 받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20) 결혼식날에는 신랑과 신부가 들러리에 에워 싸여서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는 닫집 모양의 차양인 후파(huppah)에 들어가서 결혼식을 하게 되는데, 후파에 도착하면 신랑이 신부 주위를 7바퀴를 돌고,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두 사람의 증인이 있는 가운데 결혼식을 합니다. 결혼식이 거행되면 신랑은 신부에게 반지를 끼워주고, 신랑이 케투바라고 하는 결혼 증서에 서명을 하고 낭독한 후 신부에게 건네줍니다. 그리고 이 케투바는 신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신부에 대한 신랑의 의무를 담고 있습니다.

21)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과 신부가 신부방(신방)에 들어가서 한 몸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가 되는 의식을 치른 후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랑의 친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면, 그 친구는 또 사람들에게 그것을 공포하고 그때서야 잔치가 시작이 됩니다. 이때 신랑의 친구가 손님들에게 알리는 그 소식을 또한 좋은 소식(복음)이라고 합니다. 혼인 잔치는 약 7일간 계속되며 이 기간 동안 신부는 신방에서 나오지 않고 7일 후에 나오게 되며 그때 신랑이 신부의 얼굴에서 베일을 벗겨준다고 합니다.

22) 요한계시록 21장은 새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거룩한 혼인잔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신방은 새 하늘과 새 땅이고 신부는 새 예루살렘 성인 교회입니다. 신랑되신 주님과 신부인 교회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그날,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로 부름받은 우리들도 당연히 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잔치가 베풀어지는 날 그 잔치에 초대된 모든 성도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친히 우리들의 눈물을 씻어주기고 하시니 그 곳에는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도 다시는 있지 않습니다. 처음 것들이 그렇게 모두 지나가게 됩니다.

23) 반면에 그 잔치가 베풀어지는 날, 한 곳 어두운 곳에서는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 하는 모든 자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되는데,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전히 끝내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와 질서가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24) 밧모섬의 요한이 본 진정한 비젼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비젼, 이 땅의 모든 가치와 의미들도 뛰어넘는 비젼,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진행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젼, 그리고 신랑되신 주님과 함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정말로 황홀한 비젼입니다. 그리고 그 신부는 너무도 아름답고 그 신부와 신랑이 거하는 신방은 너무도 완벽합니다.

25)  더 이상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그 나라에 대한 비젼, 이것은 요한이 단순히 자신의 희망이나 바램을 문학적으로 표현해 낸 것이 아닙니다. 이 황홀하고 완벽한 비젼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함께 보는 생생한 영적 실제인 것입니다. 오늘도 이 글을 읽은 모든 이들이 날마다 이 비젼과 환상의 황홀함 속에서 이 땅의 가치에 매이지 않고 순결하게 준비되어가는 거룩한 신부로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jso848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