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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net 대표 이승제 목사, '계획이 틀려져 보일지라도..'
가까운교회 이승제 담임목사.(사진제공=가까운교회) 마 4:12-25 계획이 틀어져 보일지라도... 앞서 사역을 하던 세례요한이 잡히자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갈릴리로 물러나셨다가 가버나움으로 사역지를 옮기신다. 예수님은 태어나셔서도 애굽으로 피하셨었고, 공적사역중에서도 피하실때는 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피하신 후 사역을 시작하신 곳이 가버나움인데, 이곳은 심한 착취를 당하는 소외된 곳이었다. 예수님은 어쩌다 이곳까지 피신 오신 듯한 모습을 보이신다.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묘사한다. “흑암에 앉은 백성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원하는 장소, 전략적인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곳이 빛이 있는 곳이고 사역의 거점임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내게 더 좋은 것임을 생각한다. 오늘의 고민, 많은 생각이 드는 고통이 오히려 예수님께로 이끄는 방향임을 믿고 감사하는 아침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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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온누리침례교회 조민수 목사, '그리스도인의 물질관'
원주 온누리침례교회 조민수 담임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야고보서 5:3]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그리스도인의 물질관" 야고보는 부유한 자들에게 물질관리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물질은 필요합니다. 선교를 하는데도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질을 쌓아두는 것이 인간의 목적은 아닙니다. 이 물질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유혹을 더 쉽게 받으며 물질이 맘몬신이 되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 물질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교회도 물질이 없을때는 평안해도 많은 물질때문에 다투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부자되면 안될까요? 성경 구약에 나온 족장들은 거의 대부분 부자들이었습니다. 왕과 귀족들도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아리마대 요셉과 바나바와 마가 요한과 같은 부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부자라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물질은 하나님의 것으로 알았고 하나님을 위해 섬겼습니다. 성도는 물질에 목적을 두지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길 축복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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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열매맺는교회 이재식 목사, '동역자를 세워야 합니다.'
충주 열매맺는교회 담임 이재식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동역자를 세워야 합니다. 공동체는 뛰어난 한 사람이 열 걸음을 걷는 것보다 평범한 열 사람이 한 걸음씩 걷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공동체는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혼자 있으면 부족함 때문에 무너지게 됩니다. 함께 동역하는 사람이 있어야 부족함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대단한 왕입니다. 하나님 앞에 일천번제를 드리는 열심과 사명 감당을 위해 지혜를 구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킨 왕입니다. 전에도 후에도 솔로몬 왕같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없다고 말해지는 지혜의 대명사 입니다. 7년 동안 성전을 짓고 13년 동안 궁을 지으며 아름다운 건축물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고 나라가 부유하여 은이 돌처럼 흔하며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여러면에서 완벽한 왕이었던 솔로몬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족한 면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두번이나 나타나셨지만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왕상11:9~10)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를 타고 위험한 질주를 하고 있는 솔로몬에게 조언을 해주고 기도를 하는 동역자가 없었습니다. 동역자를 세우지 못한 솔로몬 왕의 아쉬움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함께하는 동역자를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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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성도라는 이름의 의미'
스위스한인교회 담임 김정효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성도라는 이름의 의미(골로새서 1:1-14)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이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救贖)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로새서 1:1-14)“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라고 칭합니다. <성도>라는 말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하기오이스(ἁγίοις)‘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칭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聖別)하신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된 칭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 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지위에 걸맞은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도록 요청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신명기 33:3)“ 그렇다면 본문이 가르치는 <성도(聖徒)>라는 이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성도>는 <하나님과 화해>한 자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죄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和睦)케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골로새서 1:21-23)“ <죄 문제 해결>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전제조건>입니다. 2. <성도>는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는 자입니다. „정사(政事)와 권세(權勢)를 벗어버려(폐하여)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로새서 2:15)“ 여기서 <정사와 권세>는 <어두움의 세력>인 <악한 천사들>을 지칭합니다. 이 어두움의 세력인 악한 천사들이 인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근거는 바로 <인간의 죄>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한복음 8:3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성도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고, 성도에 대한 악한 천사들의 지배권 또한 무력화되었습니다. 바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한복음8:34-36)“ 3. <성도>는 <말씀의 비밀>을 아는 자입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로새서 1:27)“ 이 <비밀>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1서 5:11-12)“ 그러면 <영혼구원>을 위한 성도의 <실천적 덕목>은 무엇입니까? 1.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도에게는 확실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1서 4:15)“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9-10)“ <토마스 그룸(Thomas H.Groome)>이라는 <기독교 교육학자>는 믿음을 3단계로 말합니다. <첫 단계>는 <인지적 차원>에서의 <믿음>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나의 <신앙과 삶>을 통해 깊이 깨달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추어주시는 빛 안에서, 또 하나님과의 인격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고유의 속성>을 깊이 깨달아 알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가게 되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알아가게 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알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신뢰적 차원>에서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고 자라는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신뢰하기에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 사랑 안에서 평안함과 행복을 느낍니다. 부모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뢰적 차원>에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에 잡히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뻐하며 행복해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의지적 차원>에서의 <믿음>입니다. 믿어지니까 자발적으로 행동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행위>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으로 입증되는 믿음만이 <참된 믿음>이고, 행함으로 입증되는 믿음만이 <성숙한 믿음> 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야고보서 2:19-22)“ <윌리암 화이팅 보덴(William Whiting Borden, 1887-1913)>은 그는 미국 대부호의 3남 1녀중 세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인도로 고등학교때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세계 여행을 했는데, 여행 중 예수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삶의 실상을 목격하고서 그때부터 그의 삶을 <세계선교>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예일 대학(Yale University)>과 <프린스톤 신학대학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을 졸업한 후, 중국 북부의 <무슬림 지역> 선교를 위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무슬림 선교>를 위한 <아랍어>를 공부하던 중 <척추 뇌막염>에 걸려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이국 땅 이집트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유일한 유품인 성경책이 그의 어머니에게 전달되었는데, 그의 성경책 안에서 ‘No Reserve(남김 없이)’라는 짧은 메모와 함께 그 메모를 기입한 날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메모를 기록한 날짜는 바로 자신에게 상속된 모든 <재산>을 <선교단체>에 기부한 직후였습니다. 그리고 또 ‘No Retreat(후퇴없이)’라는 메모와 함께 이 메모를 기입한 날짜 역시 기입되어 있었는데, 이 날짜는 그가 그의 아버지에게 ‘다시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고 말한 직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에서 죽기직전 마지막으로 그의 성경 안에 ‘No Regrets(후회 없이)’ 라고 기입했습니다. 대부호의 자제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편안한 삶을 얼마든지 살 수 있었던 <윌리엄 화이팅 보덴>은 자신의 모든 기회와 권리와 소유, 바로 자기 자신을 철저히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남긴 말처럼 ‘남김없이, 후퇴없이, 후회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짧은 인생의 시간을 온전히 하나님만을 사용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 그는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고, 형제 사랑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품었으며, 주님을 섬기는 마음에 열정이 불타올랐고, 소망으로 기뻐하며, 고난을 인내하며, 기도에 힘쓰며, 성도와 교통하며, 다른 이들을 섬긴 그의 삶은, 주님안에서의 믿음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랜디 알콘(Randy Alcorn)>은 ‘믿음으로써만 설명되는 삶’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떠나서는 그의 삶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집트의 <투탕카멘(Tutankhamun, BC1331-1322)>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입니다.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였던 <아크나톤> 시대의 수도인 <아마르나(Amarna) >에서 왕자로 자라던 <투탕카멘>은 아버지 <아크나톤>과 삼촌인 <스멘크카레>가 죽음으로 불과 10세의 어린 나이로 <파라오>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겨우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사 후 튼튼한 황금 마차와 금으로 된 수많은 유물과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사후 세계를 믿었고, 그곳에 이 땅의 보물들을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윌리암 화이팅 보덴>의 묘는 먼지가 가득한 채로 쓰레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뒷골목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묘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반면에 <투탕카멘>의 무덤은 발견 당시 수천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상상하기도 힘든 값진 물건들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두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부유하게 살며 자신을 왕이라 불렀던 사람은 그리스도가 없는 영원세계에서 비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 반면 세상에서 참된 왕을 섬기며 검소한 삶을 살았던 또 다른 사람은 주님의 임재 안에서 영원한 상급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 중 진정으로 부유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예수님께서 비유(比喩)로 들려주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사후 <신자와 불신자의 운명>이 어떻게 갈리는 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누워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애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6:19-31)“ 2. <성도>는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 글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1서 5:13)“ <성도의 소망>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부활>과 <주님의 영광의 나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은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 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항상 우리가 주와 함께 있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3-1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1-4)“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5)“ 3. <성도>는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8-10)“ <아멘! >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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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 '순종의 열매'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사진제공=제자순복음교회) “순종의 열매” 아무리 좋은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계획이 진짜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과 절망으로 자신감을 잃고 자존감도 낮아진다. 목적하고 계획한 것을 실행에 옮기는 형식과 습관을 잘 만들어야 한다. 실행할 수밖에 없는 좋은 형식들을 만들고 그 안에 있으면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형식과 습관을 만드는 것이 꼭 필요하다. 좋은 형식없이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안주의식과 패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순 없다. 좋은 형식과 습관 없이도 잘 할 수 있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좌절 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좋은 형식과 습관으로 보호장치를 잘 만든다. 동시에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내면의 영역과 외적인 환경과 실재적인 영역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내면의 영역에서는 실패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오만과 편견과 같은 관점의 문제, 의지와 용기의 부족과 같은 것들을 살필 수 있다. 외적인 환경으로는 지난 경험들, 팔로워와 리더십과 같은 사람들, 재정과 시설과 같은 것들을 살필 수 있다. 실재적인 것으로는 전문성과 실력, 자존감의 수준, 소통의 능력, 준비해야 할 훈련들, 비전 성취의 경험과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다 점검하고 준비해야 계획한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 준비했다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비록 부족하지만 순종하면 어떤 일이든 일어난다. 그 어떤 일이 원하는대로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순종하여 실행하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배우고 깨닫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살피고 그것을 통해서 실행에 옮기는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순종이다. 완벽한 준비가 아니어도 괜찮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때로는 계획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너무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를 때도 있다. 그런데 그 마음에 성령의 감동으로 평화와 자유가 임하니 즐거이 순종하고, 실행에 옮긴다. 순종할 때, 범람 하던 요단강의 물의 흐름이 멈추고, 마른 강바닥을 밟으며 목적지에 이르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완벽한 믿음의 순종이 아니어도 순종을 선택하고 발걸음을 내딛는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안과 두려움과 의심이 섞여 있고, 환경은 어렵고, 준비된 실력은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믿음으로 순종해 보는 것이다. 때로는 그 순종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자신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할 때가 있다. 놀라운 것은 이것도 온전한 순종의 자리로 들어가기 위한 자리매김을 하고, 하나의 디딤돌로써 사용된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삶을 배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며,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며, 그분의 사역을 본받아 따라가는 것의 핵심은 언제나 순종이다. 순종하며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그것은 이론이고 생각이지, 실재 내면과 삶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2~23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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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 '새로운 출발!'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사진제공=제자순복음교회) “새로운 출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 새로운 출발이다. 꿈과 소망을 품고, 어떻게 그것을 이룰 것인지 계획하고 준비한다. 무엇을 소유하고, 어떤 자리로 올라가고,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준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기로 헌신한다. 이때 착각하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 내가 하나님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한다는 진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전부를 다해 나를 사랑했고, 사랑한다. 하나님은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비교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소유와 권력과 명예와 사람과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 ‘나와 하나님 중 누구를 더 사랑해?’ 이런 질문에 당황하거나 갈등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고, 사랑하는 그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면 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기뻐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사랑한다고 하나님이 서운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증거이기에 하나님은 기뻐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일터가 필요하다. 그 일터에서 더불어 일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즐거워 할 수 있다. '일, 소유, 사람과 하나님 중 무엇이 중요한가? 무엇이 삶의 우선순위인가?’ 이런 고민과 갈등을 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이고,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무엇과도 그 누구와도 하나님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기본기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중요하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준 재능과 은사와 열정과 경험과 지식과 능력으로 일하고, 공부하고, 돈을 벌고, 삶의 필요와 소망을 이루어가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삶을 보호하고 인도한다. 시내산에서 약 9개월 정도 머물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을 새롭게 시작한다. 이번에는 세개의 지파를 하나의 진영으로 묶어 동서남북에 배치하고 회막을 운반하는 레위인을 그 중심에 두었다. 이 행진의 전체 그림을 보면 동서남북의 네 개의 진영은 그 중앙에서 회막과 그것을 운반하는 레위인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네 개의 진영으로 나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그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회막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하나님이 그 중심에서 네 진영의 이스라엘 전체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이다. 이 삶의 원리, 자세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삶의 중심에서 나를 보호하고 인도한다. 하나님을 다른 어떤 것과 비교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 중심으로 인정하고 살아간다.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영과 함께 모든 진영의 중앙에 있어 행진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들의 기를 따라 앞으로 행진할지니라” 민 2:17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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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교회 정영구 목사, '선한 말씀!'
하나교회 담임 정영구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선한 말씀 하나님은 부자 청년에게 왜 가진 재물을 나눠 주라고 하셨을까요? 더 큰 것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더 큰 부를 허락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큰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가 이 땅에서 인생의 시간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나눠주는 자가 됩니다. 나눠주는 자의 차원을 이해하기 위한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여호수아 21장 43-45절의 말씀입니다. 45절에서 선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응답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세 가지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세 가지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는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약속하신대로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치렀지만 그들의 전쟁은 사람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었고, 원수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찔러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 안식은 물질과 소유의 풍요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창조주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관계의 안식이었습니다. 영원한 쉼은 반드시 영원한 존재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와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착한 일은 우리를 더 교만하게 만들뿐입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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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온누리침례교회 조민수 목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원주 온누리침례교회 조민수 담임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잠언 1:7]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지식이 있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식은 사회를 파괴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자신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할 때 세상을 사랑하며 자연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공의와 정의로 살아가도록 인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켜보시고 말씀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의 행위를 감찰하십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승리하는 하루되길 축복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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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생명 복음의 기둥'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편143:8)■ (신명기 19장 13절) ''네 눈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D. L. Moody는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주관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은 최초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지상 명령에 명시된 내용이 생육과 번성과 땅의 정복과 모든 만물을 다스림이기 때문입니다(창 1:28). 주객이 전도된 현실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아는 세상이 향락에 취해 현상 세계의 행복을 추구할 때, 대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건조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이 불순종한 권력에 빌붙어 거짓 예언으로 현실의 위기를 평안으로 위장할 때, 눈물의 떡과 물을 마시며 회개를 촉구했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어떤 인생을 살고 있나요? 오늘 묵상할 말씀은 모세의 두 번째 설교 중 후반부에 속한 부분으로 가나안 입성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함과 동시에 새롭게 펼쳐 나갈 신정 국가로서의 사회화를 염두에 둔 사회생활에 관한 규범을 교훈한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본장은 십계명 중 제 다섯 번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 수평적 대상 체계인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과 관련된 제반 규례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위치한 단락(1~13)은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도피성 제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14절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여덟 번째 계명에 대하여와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과 관련될 경계표(境界標) 제도이며, 15~21절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아홉 번째 계명과 관련된 위증인(僞證人) 규례입니다. 까닭에 이 대목은 한 사회의 중심에 세워져 그 사회를 지태시켜 줘야 할 기둥과 같습니다. 결국 이러한 규례들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호와 신앙의 본질을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 수평적으로는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접근하여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인 사랑의 실천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곧 구약의 여호와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만을 경외하던 의식(儀式)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좇아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수평적으로는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하던 아주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행위 종교였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 양면성은 예수님께서도 우리 기독교의 황금률로 명령하셨습니다(마 22:37~40). 이와 관련하여 본문의 "그리하면"은 여섯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것과 관련된 도피성 제도에 관한 규례를 엄숙하게 실천하라는 명령과 그 명령에 대한 순종을 조건으로 한 약속입니다. 도피성은 요단강 동쪽은 므낫세의 바산 골란과 르우벤의 베셀과 갓의 길르앗 라못, 이 세 성읍이었고, 서쪽은 납달리의 갈릴리 게데스, 에브라임 산지 세겜,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 이 세 성읍이었습니다(수 20:7~8). 도피성 제도의 목적은 무모한 피 흘림과 보복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사회적 중재 제도로서 아무런 고의성 없이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 자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여 피의 보수자로부터 그 생명을 보호하도록 한 데 있었습니다. 특히 이 도피성 제도는 예표론적으로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인간 사이에 화평을 중재하신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롬 8:1~2). 이 도피성 제도의 영적 의미는 원죄와 자범죄에 노출된 죄인이 도피성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기만 하면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있다는 것과, 도피성이 요단 동편과 서편 곧 약속 밖의 땅과 약속 안의 땅에 설치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도피성인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구원자 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고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누구나 어디서나 쉽게 찾아갈 수 있었던 점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구원의 주님으로 부르고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단순한 복음적 진리를 일깨우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자는 실천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하기를 힘쓰야지 허공을 향해 신의 이름만 부르는 것과 같은 자기만족적 신앙에 침잠해 있음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우리 성도의 자존감을 그리스도의 편지와 향기에 담아내어 구원과 심판의 능력인 십자가의 사신임을 피력했습니다(고후 2~3장). 그렇습니다. 오늘은 모세나 여호수아 당시 이방 국가들의 그 어떤 사회에서도 도피성 제도는 없었으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은 유일하게 달랐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과 함께 그 사회의 중심에 세워진 생명 복음의 기둥이었음을 꼭 새겨 보아야겠습니다. 여기에 그대의 존재감을 담아내길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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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빌립보서 1:12-21 복음 전파를 기뻐하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사슬에 매인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로, 바울이 사슬에 매인 일이 온 친위대와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13절). 둘째, 많은 형제가 바울의 매임으로 인해 주를 더욱 신뢰함으로 두려움 없이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14절). 비록 바울이 사슬에 매일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사슬에 매일 수 없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의 두 가지 다른 동기와 태도를 소개합니다. 먼저,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은 옥에 갇힌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겉치레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의 두 가지 다른 동기와 태도를 비교한 후에,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바울 자신은 이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바울의 입장이 혼란스럽게 느껴집니다. 저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사람은 복음 전도의 동기와 태도에 관해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이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나 이러한 자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적합한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전도자를 걸러내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만약 제가 적합하지 못한 전도자를 발견했다면, 저는 아마 그들의 잘못된 동기와 태도를 먼저 점검하려 들거나, 그들의 잘못된 것을 먼저 수정시키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줄기 빛이 분광기를 통과한 후에는 매우 다양한 색깔을 드러내듯이, 복음주의의 스펙스럼은 매우 넓습니다. 저는 몇해 전에 있었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통해, 기독교 안에는 매우 다양한 교파들이 존재하고, 제가 속한 웨슬리안 성결운동도 다양한 교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잘못된 동기와 태도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된다 할지라도, 오직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사실로 인해 기뻐하고 또한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영적으로 미성숙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들이 바울에 대해 오해하거나 부정적인 선입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포용력은 그의 기대와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했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했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마저도 유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인에 대한 저의 수용력은 매우 협소합니다. 저는 저와 결이 다르거나 비전이 맞지 않으면 함께 동역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협소한 수용력으로는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없고, 그리스도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신앙과 신학의 결이 저와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동기와 태도의 교정이 필요한 사람을 만난다 할지라도, 그들을 수용하고 그들과 동역하는 일을 꺼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복음주의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고,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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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성원교회 박충권 목사, '예수로 살아낸 흔적'
평택 성원교회 담임 박충권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제목 : 예수로 살아낸 흔적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11:25-26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한1서 4: 20-21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자입니다. 순종한 자란 뜻입니다. 이것이 믿는다입니다. 온전히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낸 흔적이 있다면 천국의 책, 생명 책에 기록이 확정됩니다. 다윗의 믿음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회심을 이룬 사도바울처럼 살아내아 구원이 온전합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생명이십니다. 신약으로 살아내야 생명이 됩니다. 주를 위해 사는 자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하는 길로만 달려갑니다. 가장 확실한 것만을 잡으십시오. 섞은 줄은 세상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달리는 자는 생명 길, 축복의 길, 구원의 길을 달리는 자가 확실합니다. 죽어야 산다 하십니다. 죽어야 다시 새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겠습니까?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선택한 자는 생명으로 선택됩니다. 주를 소원하십시오. 오직 구원(이신칭의)은 이것 뿐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 살기를 결단하고 십자가의 감동함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모든 것 온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비밀입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자는 생명의 시냇가에 심기워진 생명나무입니다. 생명수 강가에만 생명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거룩한 통치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열매가 맺힙니다. 양분이 없는 자,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 없는 자는 이미 죽었기에 늘 구약 종교에 가 있고 늘 세상에 가 있습니다. 유대교는 죽었습니다. 모세를 닮고 싶습니까? 엘리야와 엘리사를 닮고 싶습니까? 아직도 유대교 절기를 목숨처럼 지키십니까?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는 이방인들, 유대교, 이슬람, 카톨릭, 기복 종교인들은 구원이 없습니다. 한국교회 중에도 주를 위해서만 나아가는 신실한 자들이 있습니다.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다녀야 심판을 면하고 생명이 됩니다. 반드시 생명얻는 회개로 나아가면 주와 동행이 시작됩니다. 주를 위해 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진실로 살과 피를 기념하며 거룩한 성찬 예배를 매일 드리며 흩여져서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단이 기도가 됩니다. 전심으로 주를 원하시면 주께서 오십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 편에 서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찾아서 지켜 행해야 합니다. 신약을 행하면 십계명도 행해집니다. 죽도록 충성하라하십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19-21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이사야 1:19-20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아 33:3 새 일이 일어났습니다. 구약 때는 크고 은밀한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밀이 아닙니다. 그 비밀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사막에 대로가 뚫렸습니다. 광야에 사냇가가 생겼습니다. 십자가의 사랑 만이 살 길입니다. 꼭 잡고 사십시오. 놓치면 반드시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주의 증인으로 살아가라하십니다.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 일어나라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십니다. 선을 행하면 사막에 강이 만들어집니다. 온전히 나서야 생명입니다.어정쩡한 상태는 죽음입니다. 이적만 바라면 죽음입니다. 은사만 갖고 있으면 죽음입니다. 목사라고, 신학교수라고, 장로라고 온전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사도바울처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일어나는 자가 생명입니다.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처럼 목숨걸고 예배하고 목숨걸고 전도하면 생명입니다. 이미 목숨을 걸 정도의 결단이 서면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한국 교회에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기도로 힘을 모읍시다. 생명으로 나섭시다. 그냥 있으면 한 달란트 받은 게으르고 완악한 종이 됩니다. 종교인들은 세상의 넓은 길에 있습니다. 주를 위해 기도로 나섭시다. 생명은 기도로, 선을 행함으로 탄생이 됩니다. 이 복을 충만히 넘치도록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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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장례식'
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Ph.D./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장례식 신학생 한 분이 60대의 나이에 일찍 부르심을 받아서 장례식에 다녀왔다. 혼자 사시는 분이 신학에 뜻을 가지고 공부하다가, 떠나가셨다. 내일은 화장한다고 한다. 여러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학교 올 때 항상 음식을 해와서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했던 분이었다. 그분을 생각하며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우리 삶에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다시 실감하게 된다. 그런 죽음을 가까이 두고, 우리 마음은 어디로 떠돌아 다니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이땅에서 굉장히 오래 살 것 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생각보다 빨리, 생명을 맡겨 주신 분 앞에 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건데, 우리는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교회 세계, 또는 신학교 세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런 근본적인 사실을 도외시 하고, 세속적 욕망에 끌려 사는 것이라 하겠다. 눈 앞의 이익을 찾고,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가진 자, 못가진 자를 구별하고, 가진 자 편에 서려는 처신은 피해야 할 것이다. 신앙 생활에서 먼저 추구할 것은 순수한 마음, 진리와 참을 찾아 따르는 삶이라 생각한다. 학교에서 서로 얼굴을 보았던 분이 소리 없이 떠나간 후, 조용히 누워있는 모습이 오래 남는다. 우리도 언젠가,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때, 하늘의 부르심을 받아,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떠나야 할 때가 있다. 세상에 속한 어리석은 욕심을 비우고, 깨끗하게, 의롭게, 착하게 살다, 그날을 맞고 싶다. 살아 있을 때, 모든 것을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살아야 하겠다. 언젠가 이땅에 살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심판의 주님 앞에 서서 자기 일을 모두 고한다는 그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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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생명교회 조태성 목사, '거짓된 칠밀함을 경계하라!'
새생명교회 조태성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거짓된 친밀함을 경계하라! 1. 제 신앙의 균형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균형 있는 신앙을 추구할 때 저를 종종 돌아보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친밀함을 바르게 지키는지 점검해요. 성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가장 중요하지만요. 자칫 속아서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거짓 신앙에 빠지면 안 됩니다. 그렇게 속을 때의 특징이 바로 영지주의에 빠지고요. 이때 대표적인 부작용이 고립과 회피입니다. 2. 조용히 예수님만 바라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요. 산골짜기에 초막을 짓고 성령님과 친밀하게 조용히 살고 싶은 충동에 휘둘려요. 즉,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기고요. 사람들과의 만남을 영적 에너지 낭비로 치부하게 됩니다. 저도 그렇게 속았던 적이 있어서 조금 알아요. 그런데 여전히 거짓된 친밀함에 빠져있을 뿐만 아니라요. 그것이 진리인 줄 알고 강화되어서요. 자신과 자기 영향받는 사람들을 함께 나락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두려운 일이지요. 문제의 어떤 목사는 그래서 당당하게 이렇게 말해요. 3. <식당에서 저는 식사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제가 거기 가면 더러운 것이 묻어요. 은혜를 빼앗겨요. 에너지 낭비입니다.> 안타까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힘쓰신만큼 비신자들을 자주 만나셨어요. 복음을 전하시고 사랑을 주시고요. 동행해주셨어요. 그들에게 빙그르르~ 둘러싸여 사셨어요. 진정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은 비신자들과도 여유있게 어울리고요. 말과 삶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4. 한편으론 이런 종류의 거짓된 친밀함도 경계해야 해요. 성경 조금 읽고 성도님들 앞에서 <말씀>과 친밀한 시간 보낸 척 하면 안돼요. 기도 5분 하고서 성도님들 앞에서 <기도>와 친밀한 시간 보낸 척 하면 안돼요. 제가 성령님과 24시간 친밀하게 동행하고자 노력하지 않으면서요. 평소 성령님을 잊고 살면서요. 5분 성령님과 교제 나눠놓고는 성도님들 앞에서 성령님과 친밀한 시간 보낸 척 하면 안돼요. 5. 저부터 거짓된 친밀함을 경계하길 소망합니다. <말씀> 앞에서 정직하길 원하고 거짓된 친밀함을 경계합니다. <기도> 앞에서 정직하길 원하고 거짓된 친밀함을 경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앞에서 정직하게 서있고요. 거짓된 친밀함을 경계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좀더 말씀과 사랑에 빠지길 원해요. 좀더 기도와 사랑에 빠지길 원해요. 좀더 성령님과 사랑에 빠지길 원해요. 6. 오늘도 진정한 친밀함을 가득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저도 더 깊은 친밀함을 힘쓰겠습니다. 할렐루야~!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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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열매맺는교회 이재식 목사,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질 수 있으면 복입니다!'
충주 열매맺는교회 담임 이재식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질 수 있으면 복입니다. 죽을 병이 든 사람에게 치료 약이 있다는 것은 감사함입니다. 병이 든 사람이 약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기쁨으로 먹든지 혹은 억지로 먹든지 약을 먹을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입니다. 스스로 기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면 최고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장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복입니다. 누구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짊어질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지치신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구러네 사람 시몬입니다. 시몬은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진 것은 아닙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마27:32) 구레나 사람 시몬은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진 것은 아니지만 십자가를 진 사건이 복이 되었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였지만 시몬을 살리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짊어질 십자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이고 감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쁨으로 짊어지는 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꼭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면 억지로라도 짊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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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신앙회복연구소 소장 김완섭 목사, '신앙의식개혁'
주님의 새소망교회 담임 김완섭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한국교회, 신앙의식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그 원인을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을 분석하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살펴보고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에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개혁되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종교개혁이라는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은 분명히 성령님께서 이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완전한 개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학의 문제에서 짚어보았듯이 삶의 신학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어떤 개혁이 필요하겠습니까? 1. 교회개혁운동 당연히 교회개혁은 필요하지만 현재 펼쳐지고 있는 교회개혁운동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개혁운동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사회 정치와 지나치게 긴밀하게 관련지어져 있어서 순수하게 교회개혁만을 논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교회의 부조리나 제도적 허점이나 부패한 모습들을 개혁해나가야 하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조금씩이라도 교회가 세상에서 교회의 역할과 기능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2. 신앙개혁운동 신앙개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단체는 별로 없지만 다양한 모습들의 신앙개혁운동이 펼쳐지고 있을 것입니다. 회개운동, 성령집회, 윤리운동, 각종 사경회, 말씀운동, 제자훈련 등 이 사실상 신앙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각각의 목적들이 다르고 방향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결국은 보다 더 잘 믿자는 이야기입니다. 대개 자기중심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다양한 형태의 신앙개혁, 신앙회복운동들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3. 목회자개혁운동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인 목회자들의 개혁을 위해서도 다양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각종 세미나, 수련회, 회복운동, 수도원운동, 기도원, 거기에다가 안식년 제도까지도 전부 목회자개혁이 목적일 것입니다. 좀 더 하나님의 뜻을 성도들에게 잘 전달하고 목회자 자신의 영성도 변화되기 위한 몸부림들이 펼쳐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더 향상된 모습의 목회자를 꿈꿀 테니까요. 인간의 한계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은 좀처럼 개혁되기 어려운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4. 사회개혁운동 아마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사회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통일이나 남북관계가 겹쳐져 있어서 각 사람의 판단을 따라 어느 편인가에서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 애를 쓸 것입니다. 물론 사회정의와 교회정의,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에 대해서 나름대로 분별력을 가지고 활동하겠지만, 과연 복음적인 사회운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철저하게 성경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운동을 펼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 신앙의식 개혁 교회개혁, 신앙개혁, 목회자개혁, 사회개혁은 딱히 운동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더라도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변화되지 않고 개혁되지도 않으며 성도들의 삶에서는 왜 복음이 점점 사라지고 있을까요? 그렇게 많은 활동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펼쳐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쇠락의 길만 걷고 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해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놓치고 있는 것은 신앙의식의 변화입니다. 신앙의식이 개혁되지 않고는 다른 모든 개혁운동은 목적한 바를 이루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의식이 개혁되지 않은 그 어떤 운동도 외적인 변화에만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식은 여러 가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은 바로 이 신앙의식의 변화가 이루어졌을 때 하님을 결정적으로 만났고 성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의식이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물론 신앙의식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이나 체험을 통하여 신앙의식을 온전히 바꾸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의 언행과 삶은 전부 이 신앙의식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변화는 성령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자기 신앙의식을 뛰어넘기는 어렵습니다. 10살 어린이가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어른으로 갑자기 변할 수는 없습니다. 죽었다가 깨어나는 체험을 하더라도 자기중심적인 의식으로는 온전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교회개혁이든 신앙개혁이든 목회자개혁이든 신앙의식의 변화가 밑거름이 되지 못하면 개혁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운동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신앙의식의 개혁과 함께 가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잠시 개혁된 것 같아도 또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식이 개혁되면 개혁된 곳에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마음 제자반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의 신앙의식을 개혁하는 데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가장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신앙의식개혁 프로그램인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대안,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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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온누리침례교회 조민수 목사, '기도의 능력'
원주 온누리침례교회 조민수 담임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시편 18:6] 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기도의 능력"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반석이요, 요새요, 피할 바위요, 방패요, 구원이요, 산성으로 믿고 기도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은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람으로서는 모든 것을 소유하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잡았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내려놓고 주를 의지하는 이들에게 기도의 능력을 더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 자신의 소원보다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기쁨이되는 기도의 능력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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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제발 나쁜 이웃 만은'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제발 나쁜 이웃 만은 ♧ 산 이시드로(San Ysidro)라는 사람이 자신의 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쟁기질을 하고 있을 때, 한 천사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하나님께서 너를 보고 싶으시대, 이시드로. 자, 나와 함께 가자!"라고 했다. 하지만 이시드로는 너무 바빴기 때문에 그 명령을 못 들은 척했다. 천사는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이시드로! 지금 당장 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바람과 가뭄을 보내셔서 네 밭의 옥수수를 다 날려 버리거나 말려 죽게 하신댔어!" 그래도 이시드로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강풍과 맞서 싸우고, 강물을 끌어다 극한 가뭄을 극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천사가 다시 와서 경고를 했으나 그는 여전히 전후좌우 돌아보지 않고 자기 일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천사가 네 번째로 나타났을 때는 자못 심상치 않았다. "네가 만일 이번에도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네게 아주 나쁜 이웃을 보내실거야!" 그러자 이시드로는 밭 한가운데서 쟁기질하던 손을 즉각적으로 멈추고는 천시에게로 돌아섰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오히려 천사를 재촉했다. "어서 갑시다 ! 딴 일은 몰라도 그것만은 정말 참을 수 없어요 !" 이 이야기는 멕시코 사람들에게 전래되어 내려오는 것으로 민간에 상당한 교훈을 주고 있다는 한 예화를 스크랩해 두었던 내용이다. 멕시코 사람들은 이 이야기의 교훈을 이웃 사랑의 중요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웃 사이에서 서로 화평과 사랑의 명분을 끈으로 삼아 믿음과 신뢰를 쌓으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교훈해 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이시드로는 우리 지구촌의 인생들을 지목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응한 것처럼 이야기 내용을 엮어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지막 '아주 나쁜 이웃'을 부각시켜 '사랑과 화평과 신뢰로 쌓은 참 이웃'의 소중함을 교훈하기 위한 창작의 묘미다. 농부에게 있어 홍수나 강풍으로 인한 피해와 가뭄으로 인한 기근은 먹고사는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실로 견디기 힘든 자연재해다. 그러나 유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장한 선조들은 그 앞에서 무릎 꿇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다 못해 나무껍질, 혹은 들풀 같은 대체 식량을 먹더라도 모질게 극복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소맷자락에 훔쳐 내는 하염없는 땀방울이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룰지라도 하늘을 우러러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 때론 나라님이나 조상님들의 부덕으로 불평하고 원망하기는 했어도 섭리 주의 통치 앞엔 긍휼을 사모했을 뿐이다. 위 이시드로가 극한 자연 현상에도 요지부동이었던 그림을 묘사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오늘의 현상 세계를 보라! 아니 멀리 보지 말고 우리 기독교 공동체에 암세포처럼 퍼지고 있는 기복주의 사상과 기복 신앙의 오류를 보라! 위 이야기 속의 주인공 이시드로와는 정 반대의 모습을 어필하고 있지 않은가? "나쁜 이웃", 그저 개성 주의 사상에 정복되어 "소수 인권"의 논리를 주창하며 법적 보호를 노린다. 그러나 교회의 온갖 기도 제목들은 이시드로가 극복한 자연환경과 스스로가 만든 상황과 노동과 극복으로 빗어지는 수고의 땀방울을 순경(順境)으로 바꿔 달란다. 요행과 기적의 의미들을 "울타리로 두르심"(욥 1:10)에 두고, 이것의 체험을 진정한 기독 신앙으로 유도한다. 사단이 욥의 신앙을 기복으로 매도한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은 적극 주창한다. 그렇다. 지구촌의 현실을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원수 맺음을 지양(止揚) 하고 이웃이라는 대상관계에 신뢰와 믿음, 화평과 사랑의 기둥을 세우고, 상호 의존적, 상호 협력적, 사람 "인(人)" 자를 흔들림 없이 정착시키는 일에 적극 지향(志向), 혹은 지향(指向) 해야 옳을 것이다. 비록 영원한 형벌적 죄책과 오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되어 자유한 것이 사실이나, 이 지상에서의 극복이 형벌적이든 연단적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연유에서든 "가시덤불과 엉겅퀴"(창 3:18)와의 씨름에서 흘려야 할 땀방울은 죄다 우리 인생의 몫이기에 그렇다. 이런 몫을 함께 짊어진 것이 우리네 인생이기에 오직 한 마음, 한 믿음으로 이시드로의 땀방울을 연일 훔쳐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이 또한 우리 서로를 위해 '나쁜 이웃'의 문제만큼은 반드시 해결해야 했던 이시드로처럼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시 68:19)께 달려가자! 할렐루야!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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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net 대표 이승제 목사, '의심의 소제'
가까운교회 이승제 담임목사.(사진제공=가까운교회) 민 5:11-31 의심의 소제 결혼한 여인이 부정을 저질렀는지 아닌지를 알아내기 위한 제사와 방식을 서술한 본문이다. 지금의 문화와 개념으론 이해하기 어렵고 유독 여인에게만 이렇게 하는지도 이해가 어렵다. 의심을 받으면 돌을 몸에 묶고 강에 던져 살아 나오면 무죄로 여겼으니 다른 나라들의 법은 더 황당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너무도 낮았다. 이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훨씬 낫다고 볼 수 있겠다. 부부의 신의를 저버리는 것은 3800년의 모세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용납하기 어려운 처사이다. 신앙의 눈으로 볼때 하나님은 우리를 신부로 삼아주셨는데 이를 배반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성에 대해 자유로운 시대는 노아의 때, 소돔과 고모라, 애굽과 가나안의 문화가 그러했다. 부부관계 (미래의 배우자에게까지)에 정결함 반드시 지켜져야할 윤리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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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채플교회 이광형 목사, '여기까지가 아니라 저기까지입니다!'
도곡동 드누보 문화선교센타 이광형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여기까지가 아니라 거기까지입니다. (요 20:19-29)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마'가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는 굳건한 믿음의 상징이 아니라 애석하게도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의심' 이라는 용어가 붙습니다. '굳건한 믿음의 도마' 가 아니라 '의심많은 도마' 이것이 도마를 기억하고 언급할 때 마다 거론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도마는 우리가 알고 언급하는 것과 같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마다 의심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도마가 그렇게 불리게 된 상황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이 모여있는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는데, 제자들 모두가 모인 그 곳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이 후 제자들은 도마에게 주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지만 그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덧 붙여 말하기를 주님 손의 못자국을 보고 그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도마를 포함해 제자들이 모인 곳에 다시 오신 주님은 도마에게 손을 뻗어 주님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고 믿는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도마의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았기에 믿는자가 아니라 보지 못해도 믿는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내용을 통하여 지금까지 도마는 마치 의심의 대명사처럼 불리우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에 관한 우리 입술의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가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을 보게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마음으로 믿는 사람들은 무척 많은 것 같지만 과연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을 돌아볼 때 마음으로 믿는 것만으로 만족하다 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마치 주문 외우 듯 이야기를 잘 하는 것을 뜻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의에 이르게된 믿음이 입술의 고백 뿐 아니라 나의 모든 삶에 드러나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르게 된 믿음만으로도 족하다 여기며 믿음으로 이루게 된 의로움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늘도 쉬지 않으시는 주님의 일하심에 거기까지 순종함으로 동참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음으로 믿어 이르게 된 의로움을 입으로 시인하는 삶입니다. 다만 의에 이른 것 까지만 해도 대단하다 여기며 서로를 격려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한 위안을 삼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나누고 경계선을 만들어 그것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어야 입으로 시인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믿음에 있어서 스스로 선을 정해놓고 살아가는, 마치 정체되고 더 이상 진전이 없는 신앙을 우려하며 드리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날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가야 마땅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나아가고 뜻이 아니면 멈춰서리라고 고백하지만, 멈춰서는 것 역시 믿음의 전진이지 믿음의 정체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로 인하여 우리는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소위 온라인 예배에 대한 생각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이전 까지만 하더라도 주일 예배를 집에서 TV나 스마트폰을 통해 드린다는 것에 대하여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특정한 분들이 아닌 이상 부정적이었음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저는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에대한 논의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로 인한 신앙의 양심이나 스스로의 믿음에 꺼리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다시금 생각해 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무감각해지거나 생각이 바뀌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떠한 장소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릴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가 된다면 어떻게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하는지 고민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돌아볼 때 그 예배가 그저 자신의 편의와 생각이 우위에 있는 것이라면 속히 깨어나고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그저 예배를 통한 스스로의 만족함이 앞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믿기에 의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신앙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의롭다 여김 받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 자세히 보면 그의 앞에 수식어는 성경을 보는 누군가가 붙여준 것입니다. 사실 의심한 것에 대해서 주님께 한마디 들은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눅24:38) 그는 베드로입니다. 주님은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오다가 두려움을 느끼고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왜 의심하였느냐?" 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물 위를 걷던 베드로의 마음에 의심이 생기자 곧 그는 물 속에 빠졌는데 그의 마음에 의심이 생긴 것은 곧 두려움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렀다고 칩시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의로운들 그 의로움이 변함없고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마음으로 믿어 얻게 된 의로움 그것에 만족하며 살아가기만하면 여러분의 신앙과 믿음에 닥친 그 어떤 어려움도 모두 이겨 내리라 자신 할 수 있습니까? 이에 마귀는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이르게 된 의로움을 무너뜨리고 다시 빼앗기 위하여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도 늘 경계하며 어제보다 오늘을 더 열심히 악한 꾀를 만들고 삼킬자를 두루 살피며 살아가는데, 의에 이르렀음에 안심하고 족하다 여길 수 있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부디 신앙이 비슷한 그룹끼리 모여서 서로의 의로움을 격려만하고 그 안에서의 격려로만 위안을 삼고자하는 모습을 벗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만일 그 그룹이 늘 정체되고 정지 된 신앙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모임일 뿐 입니다. 베드로를 다시 보십시오. 그의 마음에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주님을 바라볼 때 가장 담대한 믿음으로 물에 뛰어 들도록했고 물 위를 걷게 했습니다. 누가 그의 믿음을 보며 의롭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마음으로 믿는다 할지라도 그가 물 위를 걷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아무리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을지라도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마귀는 변함없이 베드로를 공격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던 시선을 잠시 아주 짧은 몇초 만이라도 '너가 서 있는 곳을 보라'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바람이 사납고 물결이 요동치는 위험한 물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이윽고 그 속삭임에 정말 잠시 느껴본 바람이며 내려다 본 물결이었는데, 순간 믿음으로 의로웠던 베드로의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앞에 계신 주님은 멀어만 보이고 바람에 요동치는 물살이 지금 당장의 현실임을 느끼게합니다. 배에서 뛰어내려 물위를 밟고 걸어온 거기까지도 돌아보면 기적이자 은혜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서 있는 그 자리는 위험과 두려움의 자리처럼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걸어왔지만 베드로의 눈에는 더 이상 주님이 아닌 깊은 물만 보이고 과 거센 파도 소리만 들려옵니다. 결국 베드로는 물에 빠집니다. 보십시오. 마음으로 믿음이 중요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주님을 보며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렀는데, 세상에서는 주님만 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속삭임 하나에 잠시 시선을 돌아 본 것 뿐인데 어느 순간 그 틈을 비집고 믿음이 아닌 두려움이 몰려와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의심의 마음을 끌어드립니다. 누가 이것을 스스로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살아가는 인생이 많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바로 건져 주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입니다. 주님도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중요하지만 연약한 인생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마음에 일어난 의심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사건을 통해 베드로를 가리켜서 '의심많은 베드로' 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마에 대해서는 의심이 많다는 언급이 자유롭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삶을 마칠 때 까지 평생 의심 가운데 살아간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활하신 주님 소식을 전해 듣고도 믿지 못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방정맞은 입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과 더불어 의심이라는 단어가 붙게 된 것입니다. 도마도 주님의 제자이고 다른 제자들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충실히 감당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도마 역시 그의 마음에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큰 실 수를 범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믿음으로인한 의로움에 안주하였다는 것입니다. 분명 도마도 주님을 신뢰하고 따르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에 슬퍼하였지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모두가 모여있던 그 장소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그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날 자리에 없었던 도마에게 부활하시고 찾아오신 주님의 소식을 전해 주었건만 도마는 믿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다른 제자들과 도마와의 차이점이 없습니다. 만일 다른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자리에 없었더라도 역시 그 이야기를 쉽게 믿었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찾아 오시기전에 주님의 무덤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거기 계시지 않은 것을 보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20:9) 무덤에 가 보았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음을 확인했지만, 그로 인해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믿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찾아오시고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신 후 주님을 보며 이윽고 말씀을 깨닫고 기뻐한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자들이 있던 그 날 그 곳에 계셨다면 어떻게 반응 하셨을 것 같습니까? 주님이시라는데 당연히 알아보고 그 즉시 기뻐하며 믿었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정말 그렇다면 분명 여러분은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구원에 이르도록 늘 입으로 시인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사시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아마 조금 더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지금도 더 확인해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당시라면 그랬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주님이 보여주신 것을 보고 보여주신 것 까지 본 것이지, 자신의 믿음을 인정하기 위해서 확인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의 생각에 누구나 이해 할 수 있고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믿을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면, 모두가 나와서 손의 못 자국을 자세히 확인해 보고 허리의 구멍이 창자국이 확실한 것인지 점검해 보았을 것입니다. 또 더 나아가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를 보다 명확하고 정확하게 이해시켜 주실 것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이 보여주신 것 까지 그것으로 만족하며 오직 주님을 보면서 기뻐한 것입니다. 이적은 이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이적과 표적은 주님이 살아계심과 함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적으로 인하여 나의 신앙이 확고해지고 표적을 통하여 내 믿음을 굳건히 하리라는 생각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리 생각한다면 모든 이적과 표적은 주님이 아닌 내 중심적이어야 하며 나를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시라는 더 명확한 증거를 통해 확인한 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제시하신 표적 만큼에 만족하며 그저 주님이시기에 기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물 위를 걸었던 믿음은 주님을 보며 기뻐할 수 있었고 두려움 속에 침체 되었던 믿음은 다시 회복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을... 주님의 말씀은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장먼저 도마를 향해 주님의 부활 소식과 함께 찾아오신 주님, 자신들이 만난 주님을 전하며 믿음을 선포했습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그저 알고있는 바를 조용히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전하고 증거하는 삶을 뜻 합니다. 그 때 전하는 사람 뿐 아니라 전해 듣는 사람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마는 어리석게도 여기서 실수를 합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의심의 마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그의 할 일은 온전히 믿지 못 할지라도 묵묵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제자들이 만난 것 처럼 자신도 주님을 뵐 수 있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렀지만 두려움 가운데 일어나는 마음의 의심을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안타까워하시며 손잡아 건져 주셨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자신의 입술로 주워담지 못 할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입으로는 시인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불신을 토해냅니다.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자신이 눈으로 정확히 확인하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못 믿겠다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겠다는 결단처럼 이야기를 했습니다. 입으로 시인할 때는 구원이 이르지만, 입으로 부인할 때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이들 마저 같은 의심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도마의 실수이고, 이 후 명예롭지 못 한 수식어를 이름 앞에 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마를 그리 부를지라도 주님은 도마를 그렇게 취급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도마 역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던 자리에 주님은 다시 찾아 오셨는데, 이는 어찌보면 순전히 도마 때문에 그리고 도마를 위해 찾아 오신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믿음을 잃거나 옳지 않은 길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아프심은 가룟유다 하나로 족하셨을 것입니다.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도마의 믿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의 바램은 오직 하나입니다. 믿음 없는자가 아닌 믿는자가 되기를... 그래서 주님이 그들을 제자 삼으시고 그들과 함께 동거동락하시며 많은 말씀과 함께 권능을 주신 것 아닙니까? 늘 함께하시며 그들을 깊이 사랑하셨고,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어도 다시 찾으시고 회복시킨 것입니다. 이제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을 넘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시며... 다시 찾아 오시고 손의 못자국과 허리에 창자국을 만져보라시는 주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의에 이르렀음에 만족한 듯 했던 도마는 자신의 정체된 믿음을 깨닫습니다. 도마는 손으로 직접 주님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봐야 믿겠다던 자신의 말이 믿음을 더 확고히 하기위한 합리적인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두려움과 의심의 마음을 넘어 얼마나 불신앙적인 이야기였는지를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러기에 도마는 와서 만져보고 믿음 없는 자가 아닌 믿는자가 되라는 주님의 말씀에 모든 의심을 내어 던지고 고백합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비로서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찾았습니다. 주님은 의심많은 도마 뿐 아니라 입술로 부인하는 도마를 돌이키게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더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필히 도마에게 뿐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보았기때문에 믿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보지 못하여도 믿는 믿음입니까? 보여주시면 믿고, 보게 된다면 믿을 수 있기에 오늘도 보여주시기를 기다리며 제대로 보여주실 때까지 마음으로 믿으며 의롭다 여겨짐에 만족하며 그러려니 살아가시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예배를 드렸기에 안심하고, 크리스찬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마치 기독교 문화속에 있기에 평강할 수 있는 것 처럼...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가장먼저 그들에게 평강이 있기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평강만 있기를 바라시고 평강만을 빌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우리를 보내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혼자 가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우리에게 보내심과 같이 주님도 우리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누구든지 죄를 사하면 사함을 받고 그대로 두면 죄가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씀은 죄의 사슬에 묶여있는 곳에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보냄을 받아 그 죄를 사함 받도록 사슬을 풀어주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 아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으로 믿음에 의에 이르러 그 평강 가운데 살아가시는 여러분. 이제 보내시는 곳 마다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여러분의 입으로 시인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그 분의 능력을 의지하여 오늘도 그 믿음을 마음 뿐 아니라 여러분의 삶 구석 구석마다 증거하고 선포하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11)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19~29)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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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 '이중 포진법'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사진제공=제자순복음교회) “이중 포진법” 민수기는 두 번의 인구 조사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전쟁에 나갈 만한, 이십 세 이상의 싸울아비들에 조사이다. 민수기 1~4장에서 한 번, 두 번째는 민수기 26장에서 전쟁에 나가 싸울아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둘 사이에는 38년이라는 세월이 흐른다. 이 38년의 시간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시기였고, 출애굽 1세대들은 그곳에서 죽고, 2세대들로 새롭게 무장하는 시기였다. 38년의 죽음의 골짜기에서 1세대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민수기 13~14장의 정탐꾼들의 보고와 하나님 나라를 포기한 이스라엘의 선택 때문이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하고, 하나님 나라를 포기한 결과는 죽음이었다. 싸울 준비,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향한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던 것이다. 목적과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고, 계획하고, 실제적인 준비를 마쳤다면,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실행하지 않으면 그동안 준비했던 모든 것이 헛수고로 끝난다. 실행할 때 마주하는 어려움과 두려움이 예상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확실히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이라면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각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몽상가이지, 비전가가 될 수 없다. 계획과 준비가 되었다면 현장에서 싸우며 실행에 옮겨야지, 보이는 거대한 장애물이 두려워 싸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고,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버리는 것과 같다. 싸움을 위해 준비해야 할 때가 있고, 실제로 현장에서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비로소 정체성과 사명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행진은 이중포진법이다. 성막을 중심으로 제자상과 레위 자손이 일차 포진한다. 동쪽에는 제사장이, 남쪽은 고핫 자손이, 서쪽에는 게르손 자손이, 북쪽은 므라리 자손이 일차적으로 포진한다. 제사장과 레위 자손이 성막을 지키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을 누가 보호할 수 있는가? 제사장과 레위 자손은 성막과 관련된 일을 섬기며, 그 성막의 규례에 대해 잘 모르는 이스라엘이 함부로 성막에 접근하지 못하고 막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제사장과 레위 자손이 성막을 중심으로 일차 포진하고, 이스라엘은 동남서북으로 4개의 군대로 나뉘어 이차 포진한다. 이차 포진은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이십 세 이상의 싸울아비들로 구성된다. 그러니까 이차 포진은 실제 전쟁의 현장에서 적과 마주하여 싸워야 할 사명이 있다. 현장에서 싸우는 것이 두렵고 고통스럽다고 포기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에게 있다. 그것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현장으로 들어가 싸울 때, 그 승리의 기쁨과 감격과 열매들을 누릴 수 있다. 현장에 들어가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그 승리를 취할 수 있겠는가? 그 싸움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말씀을 포기했던 출애굽 1세대들은 광야의 죽음의 골짜기에 죽음으로 끝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그 내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어가는 훈련은 끊임없이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닮아가는 내면의 준비는 끝까지 해야 한다. 동시에 삶의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싸워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며, 닮아가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그분의 말씀에 실제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 현장에서 크고 작은 장애물과 고통과 좌절을 만날 수 있고, 그것이 두려울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에서 함께 하며 건져내고 의미있게 자리매김한다. 장애물을 디딤돌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깊은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의 깊은 위로와 격려와 능력을 체험한다. 내 힘과 능력과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 은혜로 보호받고 승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 순종하지 않으면, 싸워야 할 시기에 싸우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 아니 더 심각한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무시하고, 대충 편한대로 살다가 죽음을 향해 가는 인생으로 전락한다. 내면의 거룩한 준비는 실제 현장에서 싸워야 할 때 싸워야 비로소 온전한 균형을 잡는다. “성막 앞 동쪽 곧 회막 앞 해 돋는 쪽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소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일지니라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레위인을 각 종족대로 계수한즉 일 개월 이상 된 남자는 모두 이만 이천 명이었더라” 민 3:38~39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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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리콜운동, 여자 목사 천 명 초청 집회 개최
하나님의 리콜운동, 여자 목사 천 명 초청 집회 개최./사진제공=하나님의 리콜운동 [아시아뉴스통신=박주일 기자] 하나님의 리콜운동(대표 전두승 목사)은 여자 목사 천 명을 한곳에 모아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비밀계획을 알리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리콜 대성회를 개최한다. 10일 하나님의 리콜운동에 따르면 이번 집회는 오는 4월 10일부터 11일까지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오산리 금식기도원 예루살렘 성전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킹덤 빌더즈 전두승 목사는 "성령세례를 받은 지 33년이 지났고 정결케 하는 불세례와 하나님의 영광에 휩싸인 지 17년 모두 50년 준비시켜 주셨다가 한국 나이 70세가 된 저에게 하나님께서 한국의 여자 목사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사명을 이제 실행하게 됐다"며 "30년 가까이 외국 생활을 하면서 한국을 위해 기도해 온 저에게 조국에 계신 여목사님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셨기 때문"이라며 이번 집회에 관해 설명했다. 이어 "하나님께서 2014년 12월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KTX 기차 안에서 '여자 목사들 천 명을 한곳에 모아 놔라 통회개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고 덧붙였다. 전 목사는 "마지막 때의 성경에 약속된 운동 중 하나는 타락 이후 눌려 있던 여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일어나 원수를 물리치는 역사"라며 "하나님께서 여자 목사 천 명을 한 곳에 모으라 하면서 주신 말씀이 시편 68편 1절 '여호와는 일어나사 원수를 물리치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들로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는 말씀"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성경은 '주께서 말씀을 주셔서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의 큰 무리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으며(시 68:11), 영적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여자들도 탈취물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며 "역사가 있을 것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집회에 참여를 희망하는 여 목사는 오는 3월 31일까지 하리운 선교회 사이트 및 이메일 등으로 접수하면 된다. 한편 전두승 목사는 하나님 뜻에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 다민족 기도회 한인 코디네이터로 동성애 반대와 낙태 반대 100만명 서명운동을 위해 이민 130여 년 역사상 가장 많은 한인 중보자 1만3000여 명과 함께 다민족 수만 명을 동원해 모두 9차례 스타디움과 컨벤션 센터, 그리고 미국 국회 빌딩에 한인 중보자들을 인솔해 가서 미국을 위한 중보기도운동과 이스라엘 다민족 기도운동을 위해 사역했다. pji24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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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하나님의 벗이 되는 성도!'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야고보서 4:1-10 세상과 벗 됨을 버리고 하나님 벗이 되는 성도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절입니다. 주현절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저는 주현절 기간에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더욱 깊이 묵상하는 시간으로 삼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싸우는 정욕에 대한 경계와 기도에 관한 부분입니다(1~3절). 야고보는 교회 안에서 싸움과 다툼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그것이 우리의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온다고 대답합니다(1절). 야고보가 판단한 그들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살인하여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살인은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포함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고, 취하기 위해 다투고 싸웁니다. 이러한 성도들의 모습에는 싸우는 정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현실에 대해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영적인 판단을 내립니다. 그들이 무엇인가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기도한다 하더라도,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이 만약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욕심과 살인과 시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값진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기도를 통해서 받게 될 값진 선물은 “교회의 하나 됨”일 것입니다. 분열하는 교회, 다투는 교회에 대한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처방은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러한 야고보 사도의 영적 분별력이 놀랍게 여겨집니다. 그는 교회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맞는 영적인 대책을 세웠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영적인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꾸 다툼이 일어나고 소송과 분열이 일어나는 이유는 조직이나 재정, 인사와 관련된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기보다는(물론 더러는 그와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영적인 문제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싸우는 정욕에 매여 기도하지 않고, 기도해도 정욕으로 쓰기 위해서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도의 가르침을 본받겠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목양하고 있는 교회의 현실을 바로 판단하고, 영적으로 건강하고 지혜로운 대책을 제시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 일을 위해 제가 싸우는 정욕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부분입니다(4~5절). 하나님을 남편으로 맞이한 영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이 남편인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벗 된다면, 그는 영적으로 간음한 여인이 되고 맙니다. 이는 성도가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행위입니다. 5절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성령”을 주어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반면, “성령”을 목적어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을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과 우리말 성경에서는 “성령”을 주어로 해석해서, “성령이 시기하신다.”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4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이해했기 때문에, 5절에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모하신다.”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할 것입니다. 만약 제가 사랑하는 아내가(물론 그럴 가능성은 확실히 없지만…) 저 말고 다른 남자와 더 어울리며 지낸다면, 저는 엄청난 시기와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와 제 아내는 서로 사랑의 언약식을 체결한 부부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제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제가 세상과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시기하기까지 저를 사모하십니다. 이 말씀은 저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저에게 경고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주님을 바라보면서도, 아직도 세상의 즐거움을 슬쩍 곁눈질하는 못된 습성이 남아 있음을 고백합니다. 머리로는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기회만 된다면 육체의 즐거움과 세상의 성공을 갈구하려는 본성이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6절). 하나님은 연약한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통해 일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에 저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셔서 성령께서 사모하는 거룩한 신부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약속의 말씀으로 붙들고, 더욱 겸손히 살아가겠습니다. 세 번째 부분은 우리에게 주시는 지시의 말씀입니다(7~10절). 이 부분은 수미상관(首尾相關)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 세 개의 짝을 이루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이지혜, 「생명의 삶 플러스」 2023년 1월호, 71).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7절).”와 “주 앞에서 낮추라(10절).”라는 말씀이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짝을 이루는 말씀은 “마귀를 대적하라(7절).”라는 말씀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8절 상).”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짝을 이루는 말씀은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8절 중).”라는 말씀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8절 하).”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짝을 이루는 말씀은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9절 상).”라는 말씀과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9절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저에게 적용하겠습니다. 저는 싸우는 정욕으로 말미암아 공동체 안에서 싸움과 다툼을 벌이지 않았는지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제가 더욱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자가 되기로 다짐합니다. 오늘 밤에 있을 금요기도회 시간을 통해 제가 더욱 주님께 기도로 나아가겠습니다. 제가 야고보 사도와 같은 영적 통찰력을 사모하겠습니다. 제가 교회의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영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가 다툼과 분열로 상처 난 공동체를 치유할 수 있음을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제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 앞에서 저를 낮추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주께서 저를 높이시리라.”라는 말씀을 약속의 말씀으로 삼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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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성원교회 박충권 목사, '믿음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평택 성원교회 담임 박충권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제목 : 믿음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요한계시록19:7-8 우리가 세상을 기뻐할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아니하시는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축복이다는 말씀입니다. 진실로 그 처절했던 십자가를 기념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도 세마옷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세마포 옷은 옳은 행실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낸 행실을 말씀하십니다. 행함의 믿음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악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께서도 선한 싸움을 마치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그래서 믿음을 지켰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지켰다는 것은 행하였다는 뜻입니다. 세마옷을 입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치우쳐서 행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파멸의 고생의 길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온전히 행할 수가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우리를 살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3:11-18 선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시려고 성경 말씀을 주셨는데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한 일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탐심과 교만은 악독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자기 자랑으로 가득차서 사람들에게 영광받고자 하는 것이 악독입니다. 우리가 찾는 길이 파멸과 고생의 길이다고하십니다. 우리가 찾는 평강의 길은 이 땅에서 좀 더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평강은 주를 위해, 주의 방법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한 꿈은 파멸입니다. 자기의 배를 채우는 것, 사람에게 영광 받고자하는 것, 이것이 열린 무덤인 것입니다. 다 함께 치우쳐서 무익한 것을 원하여 파멸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살 길입니다. 온전히 평안하게 사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길에 있습니다. 참 행복의 길입니다. 반드시 우리도 십자가의 문을 열고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의 생각과 탐심과 교만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준행하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발하리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원합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만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온전히 사는 것만 소원합니다. 이 간절한 기대와 소원이 쉬지 않는 기도입니다. 꿈이 의로우면 기도가 의롭고 복됩니다. 기도가 응답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태복음 25:21, 1- 46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욱 더 큰 충성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부지런하고 착한 종아 잘하였도다 나의 찬치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충성을 예수그리스도께 드립니다. 오직 믿음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충성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져야할 의무입니다. 나라에 대한 의무를 지듯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주신 예수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셔야 됩니다. 온전케하시는 주님께 오직 충성입니다. 이것으로 축복이 풍성히 임합니다. 달란트는 십자가의 첫사랑이며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천국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가득히 내립니다. 말씀을 땅에 묻어 버리고 지키지 않는 자는 축복을 땅에 묻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가련한 신세가 된다고 하십니다. 영 벌에 쳐해진다 하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의 법을 지켜야 천국인이 됩니다. 목사만 의무가 있겠습니까? 목사만 구원이 됩니까? 목사들은 당연히 헌신을 해야 하고 시련을 당해도 되고 성도들은 편하게 신앙생활을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도시대에는 수많은 경건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다 사도들과 똑같이 나아갔습니다. 함께 헌신하고 함께 순교도 했습니다. 목사만 전 인생과 전 재산을 털어서 개척교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척교회가 무슨 개인 사업입니까? 혼자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외면할수록 개척교회들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대기업만을 좋아하듯이 큰 교회만을 좋아합니다. 대부분의 큰 교회 설교는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말을 합니다. 사도 중에 누가 세상에서 잘되라 했습니까? 세상을 버려라고 했지 어느 사도가 세상에서 잘되라 했습니까?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 4:32 주님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모든 권능을 다 받아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충성을 다 해야 합니다. 주께서 나그네 되셨을 때, 주리시고 목마르시고 헐벗고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반드시 돌보아야 합니다. 반드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합니다. 등잔에 기름을 가득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처녀가 되십시오. 여러분도 개척교회를 하시든지 개척교회의 동역자가 되시든지 하십시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다 라는 칭찬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중간이 없습니다. 절대 넓은 길에 있으시면 게으르고 악한 종이다 책망을 반드시 받게 됩니다. 칭찬이 아니면 책망이지 않겠습니까? 영생 아니면 영벌입니다. 생명 아니면 죽음입니다. 충성 아니면 게으름입니다. 착함 아니면 악함입니다. 유익 아니면 무익입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온전함이 아니면 믿음은 없습니다. 온전하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과 다니면서 행할 때 죄가 사해집니다. 단 번에 행하신 주님과 함께 다니면 우리의 옷도 흰색으로 변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어 주시는 주님께 오직 충성만 드리면 됩니다. 오직 주와 함께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신랑과 신부의 혼인잔치가 이루어집니다. 이 축복을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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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하나님은 그가 시작하신 일을 끝내신다'
킹덤빌더즈, L.A 글로리 교회 담임 전두승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하나님은 그가 시작하신 일을 끝내신다” - 그동안 우리를 하나님 만을 신뢰하고 그를 예배하는 신부의 군대로 만드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목적 없이 행하시지 않으신다. 또한 그가 여신 문은 누구도 닫지 못한다. 계시록 3:8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광야와 시련의 길을 걷게 허락 하시더라도 우리가 그 길에서 신실할 때, 그가 이제 새롭고 축복으로 가득한 넓은 길을 여실 것이다. 시편 18:19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단지 그 길과 그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정결한 신부의 군대로 만드시기 위함인 것이다.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와 어려움에 걱정하지 않고 그러한 일들을 통해 우리를 준비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를 예배하는 군대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아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협곡으로 이끄시더라도 우리가 그를 찬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에 우리가 비로소 주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우리가 그와 하나됨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계시네 좁은 길을 항상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9:1-2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주님께서 우리를 설득하셔서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그곳에서 경배하는 무기로 훈련하신다. 호세아 2:14-15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설득)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애굽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에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우리가 그 길에서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그를 경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 신부의 군대가 예수 그리스도 신랑이신 왕과 함께 춤출 때, 하나님 나라의 권위를 이 땅에 풀어 놓는다. 경배는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고 그 만을 높이는 것이다. 경배가 절망을 소망의 공기로 바꾸는 능력 있는 무기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이 하실 일,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다를 선포하는 것이 예배이다. 군대가 혹독한 훈련을 통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는 강한 군대가 되듯이, 우리가 고난과 시련 중에서 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영역으로 찬미하며 들어감으로 신부의 군대로 준비되어 마지막 날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이기는 자로 열방을 추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훈련의 고난과 역경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를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본성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끝내시기에 능하시며 그가 하신 말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러하기에 시련 중에서도, 끝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은 올해 우리들 중에 적지 않은 수가 이제 시련의 광야의 끝에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지점에 서 있다. 하나님은 그가 시작하신 일을 끝내신다. 예배하는 자가 신부의 군대다. 댕큐 로드!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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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교회 정영구 목사, '잠재적 성도들'
하나교회 담임 정영구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잠재적 성도들 사도바울이 문제가 있는 교회들에 편지를 했어요. 고린도 교회는 파들이 너무 많았잖아요? 전통을 중시하는 게바파, 성경공부를 중시하는 아블로파, 이런 식으로 각 파들이 있었습니다. 또 교회 안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들이 아주 심각하게 있었어요. 그런데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성도들이라고 부른 거예요. 이게 중요합니다. 사람이 악하죠. 어린애들도 악해요. 그런데 그 악한 것을 파고들면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누구도 신뢰할 수 없어요. 어떤 목사님들이 사람은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사랑만 해야 된다고 얘기하는데 저는 어떻게 신뢰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냐고 말해요. 관계에는 네 가지 기둥이 필요합니다. 신뢰 존중 사랑 이해 이 네 가지를 관계의 네 가지 기둥이라고 하거든요. 이 네 가지 기둥이 다 있어야 온전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예를 들면, 사랑은 하는데 존중할 수 없어,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신뢰를 못하는데 어떻게 사랑을 하나요? 말이 안 되는 거죠, 우리가 사람과 관계할 때는 신뢰를 주고 존중해 주고 사랑하고 이해하는 이 과정으로 가는 거고, 이 네 기둥이 다 튼튼해야지만 관계가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것부터 시작하는 거냐면 신뢰를 100프로 주고 관계를 시작해야 해요. 그게 성도들이라는 관점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남편 또는 애들, 교회도 안 가고 말을 안 들어도 그냥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이라고 대우하는 거예요. 바울은 이런 자기 인식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인식이 아주 분명했어요. 내가 예수를 믿고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들을 잠재적 성도들이라고 생각하고 대우하고 사는 겁니다. 그렇게 간주하라고 그렇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누구든지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생명이고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람이고 함께 복음을 향해서 성장해 나갈 사람이라고 대우해 주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신뢰가 깨지고 존중이 깨지고 사랑이 깨지고 이해가 안 되는 과정에서 악순환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죠.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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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바기오 한인회 회장 이준성 목사, '기억에서 사라진 제사!'
필리핀 바기오 한인회 회장 이준성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기억에서 사라진 제사(예배) - 감사 성경 : 요나 2:9 구약 제사와 예배의 기본은 감사에서 출발한다. 감사는 예배의 본질이다. 요나 2:9절은 두 성경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시편 50:14절은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말씀한다. 시편 50:23절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라고 말씀한다. 선지자 요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고기 뱃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렸다. 그는 목숨 외에 모든 것을 잃었어도 감사로 제사를 드렸다. 그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는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인원수의 제한도 받지 않는다. 감사는 혼자서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예배다. 사탄은 성도들을 유혹해서 헌금, 종교 형식, 예배의 횟수, 자기만족, 자기 자랑에 몰입하게 만든다. 사탄은 성도들의 기억에서 감사로 제사(예배) 드리는 것을 지운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에 몰입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에 집중하고 감사하게 만든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감사하게 만든다. 오, 주여! 감사로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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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군기독교연합회, 2023년 조찬 기도회 개최
양평군 조찬기도회 /(사진제공=양평군청) [아시아뉴스통신=최광대 기자] 양평군 기독교 연합회(회장 심재학 목사)는 지난 3일, 양평군청 대회의실에서 2023년 조찬 기도회를 개최했다. 이날 조찬 기도회에는 양평군 기독교 연합회 회장 심재학 목사를 비롯한 임원진과 전진선 양평군수, 윤순옥 양평군의회 의장, 이혜원 · 박명숙 경기도의회 의원, 최영보 · 여현정 양평군의회 의원, 진오석 양평군청 기독 신우회 회장과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기도회는 인유진 목사(열방공동체)의 대표기도를 시작으로 심재학 목사(양평읍교회)의 설교, ‘나라와 민족을 위한’ 민병권 목사(덕평교회)의 특별기도, ‘양평군 복음화를 위한’ 유병중 목사(생명샘교회)의 특별기도, ‘양평군의 군·경을 위한’ 조한덕 장로(벧엘교회)의 특별기도와 홍성장 목사(양평순복음교회)의 축도 순으로 진행됐다. 특히, 기도회 중간에 펼쳐진 열방공동체교회 대안학교 Ad Fontes 학생들의 밝고 활기찬 특별 찬송 무대는 2023년 희망찬 새해를 바라는 이번 행사에 그 의미를 더했다. 심재학 목사는 설교를 통해 “2023년 사람과 자연 행복한 양평을 기원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담아,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섬기는 양평군이 되기를 축원한다.”고 전했다. 전진선 양평군수는 “군정에 적극적인 협조로 지난 한해 여러 위기 극복에 앞장서 주신 양평군 기독교연합회에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면서 “이번 조찬 기도회를 통해 모든 양평군민들의 마음에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isac090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