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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대학교 "어린 사무엘이 돈 때문에 학업 포기하지 않도록“ 칼빈대학교 올해부터 신학생 전원 장학금 추진
칼빈대학교 전경 /(사진제공=칼빈대학교) [아시아뉴스통신=최광대 기자] 칼빈대학교(총장 황건영)가 신학생 전액장학금을 추진하며 국내외 인재들을 모집한다고 6일 밝혔다. 황건영 총장은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 하는 어린 사무엘들이 학업을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할 것”이라며 이같은 방침을 밝힌 것이다. 황건영 총장 /(사진제공=칼빈대학교) 최근 학령인구가 줄어들고 신학대 지원자가 줄어드는 현실이다. 그로 인해 신학대학들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칼빈대학교 관계자는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창의적 인재를 길러내는 강소대학'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며 " 급변하는 교육환경 속에서 칼빈대학교는 하나님의 종을 길러내는 대학으로서 작지만 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어린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종을 준비시키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신학대학교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부터 칼빈대학은 신학생 전액장학금을 추진하고 있다. 학생들이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 학교의 방침이다. 칼빈대학교는 올해 유엔 아카데믹 임팩트(United Nations Academic Impact)의 공식 대학기관 지위를 획득했다. 유엔 아카데믹 임팩트는 유엔 공보국 산하 대외 협력부서(Outreach Division of the United Nations Department of Public Information)에서 발족된 특별 기관이다. isac09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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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 좋은학교, 김성국-강희정 교사선교사로 허입
김성국 교사선교사(왼쪽)와, 강희정 교사선교사./사진제공=프놈펜 좋은학교 [아시아뉴스통신=박주일 기자] 프놈펜 좋은학교(교장 유태종)는 김성국 교사와 강희정 교사를 프놈펜 좋은학교 교사선교사로 허입됐다고 12일 밝혔다. 프놈펜 좋은학교에 따르면 김성국 교사는 지난 9일, 강희정 교사는 지난 11일부로 프놈펜 좋은학교 교사선교사로 허입돼 각각 2023학년도 2학기부터 '컴퓨터(코딩)' 수업과 5학년 '과학' 수업을 맡아 가르친다. 프놈펜 좋은학교는 교육의 어려움을 겪는 선교사 자녀들을 교육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2010년 3월 15일에 설립된 Missionary Kids(MK)학교다. 코로나19 이후 지방과 선교 오지에서 교육의 도움이 필요한 MK들을 교육하는 온라인 원격수업 학교로 전환했다. 현재 캄보디아 지방 두 곳과 중동의 한 곳에 있는 MK들이 배우고 있다. 또한 프놈펜 좋은학교의 선생님들은 캄보디아, 한국, 필리핀 등에서 온라인 원격수업을 통해 MK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모두 교사선교사로서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MK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유태종 교장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다 하실 수 있지만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며 "우리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함께 기도해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고 밝혔다. pji24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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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 좋은학교, 2023학년도 1학기 성공리에 마쳐
프놈펜 좋은학교, 2023학년도 1학기 성공리에 마쳐./사진제공=프놈펜 좋은학교 [아시아뉴스통신=박주일 기자] 프놈펜 좋은학교(교장 유태종)는 '2023학년도 1학기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고 19일 밝혔다. 프놈펜 좋은학교는 지난 3월 1일 개학예배를 시작으로 ▲개교 13주년 기념식 ▲원픽 독서나눔 ▲교사리트릿 ▲부활절 헌금 사랑의 나눔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프놈펜 좋은학교는 교육의 어려움을 겪는 선교사 자녀들을 교육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2010년 3월 15일에 설립된 Missionary Kids(MK)학교다. 코로나19 이후 지방과 선교 오지에서 교육의 도움이 필요한 MK들을 교육하는 온라인 원격수업 학교로 전환했다. 현재 캄보디아 지방 두 곳과 중동의 한 곳에 있는 MK들이 배우고 있다. 또한 현재 선교지에서 홈스쿨링을 하는 MK들이 학교의 정규 교육과정 중 일부를 참여할 수 있는 '시냇물교실 1'을 운영하고 있으며, 곧 전 세계에 흩어진 선교사 가정 가운데 교육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MK들에게 맞춤형 교육으로 돕는 '시냇물교실 2'를 준비중이다. 아울러 프놈펜 좋은학교의 선생님들은 캄보디아, 한국, 필리핀 등에서 온라인 원격수업을 통해 MK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모두 교사선교사로서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MK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유태종 교장은 "프놈펜 좋은학교는 지난 14일 1학기 종업식을 하면서 한 학기를 은혜 가운데 마쳤다"고 말했다. 유 교장은 "이번 학기가 이전과 달라진 가장 큰 점은 프놈펜 좋은학교의 교육이 캄보디아 나라를 벗어나 다른 지역(중동의 한 나라)에 있는 선교사 자녀와 연결됐다는 것"이라며 "이 친구는 캄보디아의 시간대보다 3시간 늦은 지역에 있어 지난 1학기에는 프놈펜 좋은학교의 '시냇물교실'에 오후 3시간, 그것도 이슬람권이라 금요일이면 휴일을 갖기 때문에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만 수업을 해서 12시간만 프놈펜 좋은학교의 교육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24시간 통틀어 모든 시간대에 해당하는 전 세계 한인 MK들을 가르칠 수 있는 프놈펜 좋은학교를 꿈꾸고 있다"며 "성령님께서 여전히 꿈꾸게 하시니 나는 참 행복할 뿐이다"라고 전했다. 끝으로 "프놈펜 좋은학교가 '하나님의 선한 일꾼'을 양육하는 교육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온라인 원격수업 교육과정이 캄보디아 지방과 열방의 선교지 가운데서 교육의 어려움이 있는 MK들에게 연결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2023학년도 2학기에 새롭게 필요한 교사와 선교사들이 2학기 전에 다 채워지고, 프놈펜 좋은학교의 모든 지체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pji24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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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선한 행실'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디도서 3:1~15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응답, 선한 행실 바울이 디도에게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굳세게 말하라(8절)”는 것이었습니다. 왜 바울은 디도에게 “굳세게 말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목사에게는 너무나 분주한 일들이 많습니다. 지금 당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될 문제도 있고, 목양 외에 조직 관리에 필요한 현실적인 문제들도 처리해야 합니다. 그 외에도 목사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만나야 하고, 작은 교회 목사일수록 차량운행에서부터 시설관리와 청소와 같은 사소한 문제들도 직접 나서서 감당해야 합니다. 만일 목사가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목사는 현실적인 업무들을 처리하기에 늘 급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고 디도에게 강조했던 이유는 바울이 분주한 목회 적 환경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목사는 ‘말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전해지는 목사의 말은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구원의 공통적 경험을 잊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바울이 3절부터 7절까지 강조한 것은 공동체의 구원경험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은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선 공동체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디도를 통해서 공동체에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을 그레데교회가 기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가 끊임없이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피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목사는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10절).”라는 가르침은 목사의 우선적인 관심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양육에 있어야 함을 드러냅니다. 저는 오늘 목회 적 돌봄이 필요한 몇 명의 성도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 그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왔고,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했습니다. 목사인 제가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15절).”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보람된 일입니다. 저는 내일 주일사역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특별히 내일은 외부설교가 두 곳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저는 내일 오전 11시에 우리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한 후에, 오후 2시와 오후 4시에 각각 다른 교회에서, 각각 다른 설교를 해야 합니다. 저는 부족한 저를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저는 “너는 굳세어 말하라.”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지시의 말씀으로 받겠습니다. 저는 신앙공동체가 구원의 감격을 잊지 않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굳세게 말하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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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성령의 사람!'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靈的 死角地帶 ♧ 평소 천국에 관해 성경이 제공해 주는 내용에 대해서 상당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천국을 완전히 부정하는 불신의 입장도 아닌 한 유명한 시인이 어느 날 자신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한 천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천사는 시인에게 금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한 권의 책을 주면서 펼쳐볼 것을 권장했다. 시인은 "이게 무슨 책이냐?"라고 물었고, 천사는 시인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책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시인은 책을 받아 책장을 넘겨보았다. 거기엔 많은 글들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책에 이상한 표시가 되어 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천사에게 "여기 이런 표시는 무엇을 의미하느냐?"라고 물었다. 천사는 "그 표시들은 당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들을 표시한 것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시인은 또 책장을 넘겼다. 더 많을 표시가 되어 있었다. 천사는 그 표시들을 가리키며, "이것은 당신의 입에서 나온 악한 말들이오. 조금 전 당신이 본 악한 행동들보다 훨씬 많을 거요." 시인은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와 온몸이 오싹함을 느꼈다. 그러나 또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런데 더 많은 표시가 되어 있었다. 시인은 다소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이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천사는 "이건 당신의 머릿속에 있던 악한 생각들이오. 사람이란 행동보다 생각하는 게 더 많으니까." 시인은 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이번에는 표시가 하도 많아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건 당신의 악한 마음일세. 악한 마음에서 악한 생각과 악한 말과 악한 행동이 나오지."라고 했다. 순간, 시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부림치다가 그만 침대 위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꿈에서 깨고 말았다. 너무도 생생하여 잊어버리지 않도록 잘 메모하여 가끔씩 읽곤 했단다. 그렇다. 우리 기독자들의 영적 사각지대는 행위나 행동으로 표현된 허물이나 잘못 혹은 죄의 범주에 속한 것들이 아니라 악한 생각과 악한 마음일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관여적 심판이나 형벌 혹은 징벌에 대해서도 대부분 이미 행위 된 범죄에 국한시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과 마음까지도 감찰하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때,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홍수로 심판하셨다는 당위성을 말씀하셨다. "인간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는 홍수 심판의 당위성 앞에 과연 그 누가 항변할 수 있겠는가? 이와 관련된 수많은 성경 구절들이 우리 인간을 유구무언으로 입술과 혀를 꿰매고 말 것이기에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교리가 전제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거리를 활보할 수 없는 이유다. 구군가가 보거나 안 보거나, 느끼거나 못 느끼거나 가 문제가 아니다. 이미 양심은 자아를 정죄하고 있고,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은 책망의 채찍을 가하고 있다. 물론 이를 알거나 느끼는 자도 흔치 않다. 대부분 죄의 불감증에 노출되어 있기에 그렇다. 수없이 반복될지라도 그런 심령 상태가 녹슬거나 화인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며시 주머니 속에 숨겨 놓았건만, 꺼집어낼 용기가 없다. '이실직고(以實直告)'라는 말이 자꾸 귓전에 맴돌며 자성(自省)을 부추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치는 세례 요한의 그림도 그려진다. 참 멀리도 왔건만, 달랑 '죄인'이라는 꼬리표 하나 뗄 수 없어 저기 보이는 의인의 빈자리 여전히 처량하게 비워둘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이미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와 허물 죄다 용서받은 사실을 알고 믿고 있은 지가 오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일어나 저 처량한 의인의 자리에 다가서는 자가 없다. 지나친 겸손이련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내 손 잡아 저 처량한 빈자리로 이끌어 주인 노릇하게 하시겠지만, 그때까지는 그저 흠모의 눈으로 바라볼 뿐 스스로 다가서기에는 가깝고도 너무도 먼 신기루와 다를 바 없다. 그럴지라도 주께서 내게 주신 고귀한 선물이 아니던가! 이를 깨닫고 마라 나타를 외친 사도 요한의 전철을 밟는 자가 성령의 사람일 터, 정중히 그댈 초대한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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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성원교회 박충권 목사, '사람의 본분'
평택 성원교회 담임 박충권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제목 : 사람의 본분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2 진실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신부로 단장이 되어야만 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전심전력하여 그리스도께 합당한 생활을 할 것입니다. 신부들의 마음에는 신랑을 향한 사랑 뿐이 없습니다. 진실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께 올인하십시오. 심령이 가난하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어 온유의 땅을 얻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부들은 팔복을 다 받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십자가의 그 사랑 어찌잊으리오 이 마음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3:16-17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은 진실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말로만 믿고 행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순종이 없는 사람은 성령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초대교회는 목숨까지도 드리며 진실로 행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생명책은 우리들의 순종의 기록입니다. 사랑을 행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증거한 기록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행하여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성령충만한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치고 지켜내는 자가 반드시 됩니다. 이들이 팔 복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세상과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성공을 구하지 말고 주님만 구하면 됩니다. 주님만 기뻐하는 마음 있으면 우리도 세상과 구별이 됩니다. 오직 믿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증인은 제자입니다. 결국 제자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심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심 됩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1:9 십자가의 증인의 삶이 예배이며 성찬식입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마다 천국은 지어져갑니다. 우리의 고난이 아무리 크더라도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보다는 크지 못합니다. 사도시대 에베소 교회의 신실한 자들은 증인된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도 사도행전에서 믿음을 배웠으니 그들처럼 증인의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천국은 우리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그리스도를 구하고 찾는 사람에게 천국이 있습니다. 시시각각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에수, 오직 하나님께 영광 뿐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하나님과 우리사이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되면 마음이 화평하게 됩니다. 마음이 변합니다. 순종의 삶의 예배가 드려집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니 반드시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일을 선악 간에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드리면 주님과 거룩한 동행이 시작됩니다. 그 사랑하심을 받아드리면 풍성하신 복이 임합니다. 이 복을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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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한인교회 에스더윤 전도사, '물에서 건져낸 자'
은혜한인교회 에스더윤 전도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Grace Time]-출애굽기 2:1-25 [물에서 건져낸 자] [출 2: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는 건져낸 자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그의 이름이 말하고 있듯이 그의 삶은 건져냄에 연속이었습니다. 나일 강에서 죽을 수도 있는 모세를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건져내셨습니다. 그 당시에 권력을 가진 바로왕의 딸에 눈에 띄게 하셨습니다. 그 후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나일 강의 기적과 홍해의 기적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쓰임받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어떠한 환경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누군가를 통하여서든지 아니면 초자연적인 가운데에서 건져주십니다. 민족적 대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자신의 삶가운데 놀라운 일들이 펼쳐졌습니다. 나의 삶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 있는 나를 보혈의 공로로 건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사명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가운데 죄를 짓고 결국 지옥으로 가는 영혼들을 건져내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성적인 유혹, 도덕적인 유혹, 물질적인 유혹, 정신적인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더러운 죄악의 바다에서 건져냄을 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심이 그들에게도 임하도록 기도와 전도를 쉬지 말아야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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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 '믿음의 순종'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사진제공=제자순복음교회) “믿음의 순종”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 작은 죄인이 따로 있지 않고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다. 저이보다 작은 죄를 지었고,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괜찮을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은 특별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와 의를 자랑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사역하고 있다고 힘을 주거나 자랑할 것이 없다.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가 확실하지만,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너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예수님짜리이다. 그러니 내가 상대적으로 크고, 부요하고, 권력이 있고, 인기가 있다고 해서 더 특별하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결코 나만 더 특별하거나 더 사랑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겸손히 그리고 끝까지 쓰임받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누군가의 연약한 죄와 허물을 발견하게 되면 지혜롭게 반응할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 채 그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비난하며 삶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성령의 조명을 받고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누군가의 죄와 허물을 보았을 때, 엄격하게 그것을 드러낼 것인지, 아니면 긍휼이 여기며 용서하고 덮을 것인지 분별할 수 있다. 그 근거와 목적은 그가 죄를 회개하고 생명을 얻고 온전한 삶을 사는 것에 있다. 예수님이 마음으로 간음한 것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기준을 제시한 것과 동시에 현장에서 간음으로 잡혀 죽을 수밖에 없는 여인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했던 것처럼 그 근거와 목적은 회개하고 살리고 삶을 회복하는 것에 있다. 나 자신도 연약한 죄와 허물에 대해 긍휼과 용서를 받았기에 그 누군가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없고, 의롭다고 결코 자랑할 수 없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을 것처럼 구원받은 이후의 삶도 의로운 행위를 자랑할 것이 없고, 겸손과 정직과 성실과 인내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뿐이다. 믿음의 순종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세움의 통로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2~3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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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성원교회 박충권 목사,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의미'
평택 성원교회 담임 박충권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제목 :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의미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로 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돈에 대해서도 죽고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죽고 세상에 대해서도 죽었단 뜻입니다. 거듭나야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가치관에서 천국의 가치관으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분부하신 모든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고 싶은 사람은 거듭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주님의 나라를 어떻게 세울까에 있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꿈만 남아 있어야 거듭났다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긍휼함을 입었으니 그들에게도 긍휼함이 있어서 모든 것 용납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말로만이 아니고 진실로 사랑을 행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었으면 받드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주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 참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재물은 복음과 구제의 수단일 뿐입니다. 사랑의 수단일 뿐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행합니다. 이미 예수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하려합니다. 행하지 않으면 복음을 누가 전하고 누가 구제를 하겠습니까? 누가 순교를 하겠습니까? 모두가 성경을 암기만 하고 기억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세우겠습니까? 성경 66권은 2000번이상 행하라고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말라 1개의 말씀을 받았지만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섯까지의 말씀을 받아서 다 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십계명을 받았으나 1계명부터 어겼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탐심은 우상숭배라 하셨는데 우리의 꿈은 진정 예수그리스도입니까? 하나님은 실제로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치고 지켜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행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예수그리스도께 드리십시오. 드리면 우리의 마음을 맡아주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장해 주십니다. 다윗은 지켰는데 아들인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를 받아서 기록을 했지만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남으로 버림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집을 깨끗이 청소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공동체가 오염돼서 사망의 냄새가 나는데도 본체 만체하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내가 안하면 누가 우리의 집을 깨끗이 치워주겠습니까? 이미 집이 더러운데 누구를 초대하게습니까? 성도는 옳은 행실이 있어야 안 밖으로 깨끗합니다. 우리 모두 온전한 성도가 되어야 비로서 복을 받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하십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하십니다. 근신하여 깨어있으셔야 합니다. 평안하다 그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늘 깨어서 오로지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여기 저기 죽어있는 영혼들이 가득합니다. 쉴 시간이 없습니다. 목이 터져라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고 구제를 해야 진짜 믿음입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3:10) "이단은 임박할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다고 하셨습니다." (벧후2:1) 이단과 함께하면 이단이 됩니다. 이단을 옹호하면 함께 다 이단이 되고 주님의 책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다섯교회는 책망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버가모교회에 구원파같은 영지주의, 두아디라교회 이단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 사데교회에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라오디게아교회에 열심없는 믿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처음사랑이 있습니까? 이단을 용납하지 않습니까? 구원파처럼 구원만 강조하지 않습니까? 지옥 불감증에 빠져서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복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은 십자가의 처철한 사랑이 날마다 우리 마음에 차고 넘쳐야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찾으면 온전합니다. 전심전력으로 주만 구하시면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이루어 집니다. 말씀을 전심으로 원하면 됩니다. 말씀의 인도함으로 주의 동행하심, 성령충만이 이루어집니다. 복의 길이 열립니다. 십자가의 문을 오늘도 내일도 열고 나가시면 정결한 신부로 살아낼 수가 있습니다. 오직 축복의 통로는 십자가입니다. 그 사랑안에서 은혜를 얻어서 우리도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며 말씀으로 권면하며 온전한 길을 쉬지 않고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달려갈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들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동일한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 없는 자는 믿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순종입니다. 지금은 순종의 시대입니다. 오래도록 참고 달릴 수 있는 힘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맡기시면 됩니다. 마음의 다짐이 온전한 길로 이끄십니다. 주로 마음을 다지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신부로 살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십니다. 그 이유는 지옥에 심판에서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주의 모든 말씀은 하라는 명령입니다. 명령을 따라 살아내는 것이 안다는 것이고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실이시고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가능합니다. 늘 세상만 기념하면서 무슨 성찬의 예배가 되겠습니까? 온전한 성찬식이 있는 교회가 되십시오. 온전히 주의 사랑을 알고 진실로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주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있으면 살아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누가복음 12:35 예수그리스도의 권능은 순종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순종의 날개를 펴고 저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가 있습니다. 이 복을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아멘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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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싱톤중앙장로교회 정지운 목사, '은혜를 받았으면 나누라!'
오륜교회 교육국장 정지운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사무엘상 25장 2-8절 큰 은혜를 받았으면 큰 은혜를 나눠야 합니다. 나누지 않으면 썩게 됩니다. 은혜를 흘러가야 계속해서 생수가 터져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기적으로 은혜를 나누지 않고 고여서 결국은 은혜의 샘물이 썩은 물이 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나발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마온 사람 나발 양 삼천마리와 염소 천마리를 가진 사람 나발이 왕의 축제와 같은 축제를 열자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나발의 목자들이 갈멜 지역에서 양들을 돌볼 때 다윗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을 생각하고 10명을 보내서 축제의 음식을 달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지극히 정중하게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요청에 대해서 나발은 무례하게 말하면서 다윗을 듣보잡 취급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을 하면서 나발은 은혜를 나누지 않는자라는 것을 그에 대한 캐릭터 분석에서 나타납니다. 돈이 있다고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나누게 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지 않으면 우리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나눠야 생수가 흘러갑니다. 나발처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에 와서 은혜를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식사를 대접하며 표현하는 분들을 만날 때 은혜가 고이지 않고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디 오늘 하루 나발처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나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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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하나님의 혼'
아나돗과 함께 읽는 성경 정이신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하나님의 혼(네페쉬) 성경은 영과 혼 그리고 마음(이성)을 통전적(統全的)으로 기능한다고 말하고, 독립된 실체로 기능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시편 11:5>을 보면, 하나님도 ‘혼(네페쉬)’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글번역성경은 <시편 11:5>에서 구약성경에서 주로 ‘혼’으로 번역한 ‘네페쉬’를 ‘마음, 진심’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심한 경우 아예 번역하지 않고 생략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있는 <시편 11:5>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훼가 의인을 세심히 살피시고, 악인과 폭력을 사랑하는 이를 ‘그분의 혼’이 미워하십니다.”(시편 11:5) [김정훈, 시편 렉시오 디비나 1, 새물결플러스, 2021년, 136쪽) 시편에 따르면 하나님께 영만 있는 게 아니라(요한복음 4:24), ‘혼’도 있습니다. 여기에 <전도서 3:21, 에베소서 4:23>까지 연결하면, 영=혼이고 마음(이성)은 이것과 통전적(統全的)으로 기능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복음 4:24) “마음(이성)의 영을 새롭게 하여”(에베소서 4:23) <요한복음 4:24>에 따르면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23>에 따르면 마음(이성)이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23>은 ‘너의 것’이란 표현인데, 이 문장에서 ‘너’가 주체이지 ‘것’이 주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23>은 ‘마음(생각)이 영을 담는 그릇’이란 뜻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영과 혼, 그리고 이걸 담는 그릇인 마음(이성)이 서로 별개로 존재하면서 기능한다는 주장은 완전히 허구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영에 담는 게 아니라 마음에 담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주님께 범죄하지 않으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합니다.”(시편 119:11)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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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배우고 학습하라!'
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Ph.D./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오늘은 학교에서 큰 행사를 치루었다. 목회학 박사 과정 학생들의 구두 시험이 있었다. 각자가 쓴 논문의 대략을 발표하고, 심사하는 날이다. 논문을 심사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떤 분은 정성스럽게 논문을 써왔고, 어떤 분은 성의 없이 다른 논문을 참고해서 써오기도 한다. 정성스럽게 쓴 논문에 대해서는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지만, 대충 써온 사람에게는 좋은 말을 할 수 없고, 쓴 소리를 하게 된다. 그런 자리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떤 모습으로 나와서 발표하는가도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무슨 시장 바닥을 나오듯한 복장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상식과 교양에 속한 문제 아닌가? 어떤 분은 학사 과정에서 시작해서 박사과정을 마치는 분도 있었다. 10년을 공부해서 오늘이 있게 되었다. 대단한 인내와 열정이 아니고는 이 자리에 올 수 없어서 아낌없는 칭찬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학문도 그렇겠지만, 신학의 분야에서는 배울 것이 끝이 없고, 성경 하나만도 그 배워야 할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다. 배운 사람과 배우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겸손에 있다. 정말 배운 사람은 그 학문의 세계의 높이 앞에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데 겨우 변죽을 배워 졸업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이 자기 자신의 지식과 학문을 자랑할 수 있을까? 없다. 그런 학문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아는 것을 자랑하고, 더 나아가 고집 세고, 교만한 삶에 빠지기 쉽다. 어느 학교에 나이 70이 넘은 부부가 신학 공부를 위해 찾아왔다. 한 학기를 마치고 나누는 소감에서, 자기가 한 학기 성령론을 배우다 보니, 교회 안에 지도급 신자들이 모두 와서 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배워야 할 것이 많고, 배워서 유익한 것이 많은 데, 그걸 모르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 정말 그렇다. 특히 이민 교회 현실은 부부 모두가 일터에 나가 사는 가정이 많기 때문에 낮 시간 교회 와서 배울 시간과 여건이 되지 않는다. 저녁에는 모두 피곤해서 돌아오는 데 무슨 교육을 실시할 수 있을까? 성경에 대한 교육이 미천하다 보니,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하는 일이 쉽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이 우선하기 쉽다. 이민 교회가 쉽게 출렁거리는 이유가 그런 교육의 부재에 있다고 본다. 사람이 배워야 하는 이유는, 사람은 자기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결국 자신의 실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배움에 소홀한 사람은 무식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안타까운 사실은 사람은 자기자신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배운 사람만이 그것을 알게 된다. 배우지 않으면 고집이 늘고, 사람 관계가 힘들어 진다. 자기 밖에서 자기를 볼 수 있는 것도 배움을 통해 가능하다. 대부분은 자기 안에 갖혀서 자기를 보기 때문에 자기 실상을 알지 못한다. 예전 읽었던 글에,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자기 신체 밖으로 나가서 자기를 내려 본다고 한다. 그 동안에는 자기 안에 갖혀 살았다는 뜻인가? 자기 밖에서 자기를 보아야 자기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잘 배워야 하는 이유는 성경은 사람의 실상을 거울처럼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성령의 도움 속에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성령 안에서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이 늘어 가면 고집이 세진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 말도 배우지 않고 살기 때문에 듣는 말이 아닌가, 싶다. 學以時習之 不亦悅互!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복습하면 그것이 기쁘지 않으냐," 옛날 한문 시간에 배운 말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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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도움의 손길!'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사무엘하 17:15~29 도움의 손길을 통해 길을 여시는 하나님 다윗의 친구 후새는 다윗왕을 돕기 위해 애를 씁니다. 후새는 압살롬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전했습니다. 후새는 “오늘 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라.”라는 당부를 두 제사장에게 전했습니다. 후새는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다윗왕과 백성들을 지켜주기를 원했습니다. 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은 후새의 전갈을 자기 두 아들인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전했습니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후새의 전갈을 다윗왕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찮았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에느로겔 가에 머물러 숨고, 어떤 여종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곧바로 다윗왕에게 가서 후새의 전갈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청년이 이 두 사람을 보고 압살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급히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어 아무도 우물 안에 두 사람이 있는지를 눈치채지 못하게 했습니다.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들이닥쳤을 때, 집 여인은 이미 두 사람이 시내를 건넜다고 거짓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도움으로 두 사람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후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다윗왕에게 나가 후새의 말을 전했고, 빨리 물을 건너도록 재촉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모든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압삶롬의 모사인 아히도벨은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압살롬은 요압을 대신하여 아마사를 군 지휘관으로 삼았고,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은 길르앗 땅에 진을 쳤습니다.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 세 사람이 다윗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소비와 로데발 사람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각종 음식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들은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행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사독의 전갈이 다윗왕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면서도 긴장감을 줍니다. 그러나 긴장감이 느껴지는 장면 속에서도 마음 따뜻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윗을 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에느로겔 가에서 도왔던 어떤 여종 이야기, 바후림 어떤 집 여인의 헌신적이면서도 용기 있는 조력 이야기, 다윗과 사람들의 시장과 곤고와 목마름을 해결해 주기 위해 음식을 싸 온 세 사람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저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히도벨의 자살 이야기를 통해 장차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회복시키실지를 기대하게 해줍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도우셨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저의 삶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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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홀리원교회 이동구 목사, '최초의 남은 자!'
캘리포니아 홀리원교회 담임 이동구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창세기 7: 23 최초의 남은 자 first remnant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Every living thing on the face of the earth was wiped out; people and animals and the creatures that move along the ground and the birds were wiped from the earth. Only Noah was left, and those with him in the ark. 하나님은 죄악이 가득 찬 세상을 대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악을 대 홍수로 심판하실 때 인간과 육지와 하늘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멸절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을 멸절 시키는 심판을 행하실 때에도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가족들을 보호하시고 남기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삶을 살아간 노아를 의로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창 7: 1; 히 11: 7. 참조) 육지와 하늘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죽어가고 있는 가운데서도 방주에 있는 노아와 가족은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 가운데 안전하게 평강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의 적막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심판의 홍수가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는 체험이 되고 악인에게는 고통스러운 죽음의 현장이 되는 일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 사도의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오래 참는 가운데 기다렸지만 말씀에 복종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의 물이 였지만 그 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세례를 예표하고 있었습니다. (벧전 3: 20, 21. 참조) 오늘날 이 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 세례를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 믿음의 고백을 사람들 앞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 물 세례 예식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믿음의 고백은 불완전하기도 하고 거짓된 것도 있어서 물 세례를 받은 것이 구원의 확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세례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잠기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노아 때의 대 홍수 심판의 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으로 여김을 받아 구원을 받는 사람과 믿음을 거절함으로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있게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심판 받아 멸망에 이르게 될 악인들로부터 믿음을 따르는 의인을 구별하여 남기시고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그분이 선택한 백성과 자녀들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살아가는 귀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저는 이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올려 드립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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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훈육 없는 무시'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사무엘하 14:25~33 훈육 없는 무시는 원한을 품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압살롬의 뛰어난 외모가 소개되는 것은 불안한 징조입니다. 물론 요셉 같은 경우에는 그의 뛰어난 외모 때문에 유혹당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성적을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울 왕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과연 압살롬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압살롬이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된 것은 정치인으로서는 장점이 될 것입니다. 특히 압살롬의 머리카락에 대한 언급은 좀 과장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외모와 달리, 압살롬은 마음에 원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는 딸의 이름을 다말이라 지었는데, 이는 아마도 자기 오누이였던 다말의 수모를 상기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있은 지 만 2년이 되었지만, 그는 왕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에 압살롬은 요압을 왕께 보내기 위해서 두 번씩이나 요압에게 사람을 보냈지만, 요압은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지르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압살롬은 이를 항의하기 위해서 자기 집에 찾아온 요압에게 할 말을 주어 다윗왕에게 보냈습니다. 압살롬은 요압을 통해 자신을 사면(赦免)시키던지, 아니면 자신을 죽이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해 달라고 다윗왕에게 요구했습니다. 결국, 다윗왕은 압살롬을 왕궁에 불러 그와 입을 맞춤으로 그를 사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이 진심으로 압살롬을 용서한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이일이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라는 정치적인 퍼포먼스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둘 사이의 관계마저 친밀하게 회복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흐르고, 압살롬의 뛰어난 외모로 인한 대중의 인기가 상승했습니다. 비록 압살롬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했기에 정치적 활동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오누이가 겪었던 수치와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압살롬은 요압의 보리밭을 불태웠던 것처럼, 언제든지 자신의 폭력성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표출할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입니다. 만약 다윗왕이 이러한 압살롬의 기질을 미리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그와의 관계를 풀어나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나기 전에, 가족들과 대화하고 공감하고 이해해 주는 가장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회 현장에서도 성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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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net 대표 이승제 목사, '하나님의 축복은 변함이 없다!'
가까운교회 이승제 담임목사.(사진제공=가까운교회) 민 22:36-23:12 하나님의 축복은 변함이 없다. 발람은 혹시나 해서 발락의 초청에까지 응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300Km의 거리로 예상되니 얼마나 멀고 긴 여정이었을까? 발락은 이스라엘이 그 만큼 위협적이었고 발람의 저주가 간절했을 것이다. 발람은 바알의 산당앞에서, 그가 아는 어림풋한 지식으로 숫소와 숫양 7마리를 제물로 드리고 여호와께 이스라엘에 관해 물었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변함이 없었다. 늘 불평하고, 리더들에게 대들고,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그럼에도 꾸준히 축복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내가 나를 돌아봐도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않다.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 겨우 사랑할 수 있을 정도다. 내가 이땅에 존재하여 스러지기까지 일향 축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침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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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생명교회 조태성 목사, '한 영혼의 무게 그 중요함(1)'
새생명교회 조태성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한 영혼의 무게 그 중요함! (1) 1. 신학생 시절부터 훌륭한 선배 목사님들에게 반복해서 들었던 말씀이 있어요. <목회자라면 반드시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한 영혼의 무게를 기억해야 한다.> 언제나 당연히 옳은 말씀이라고 동의했지만요. 과거의 저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교회가 빨리 커지고 사람들이 저를 많이 알아주고 불러주는 것이 사역을 잘하는 거라고 여겼어요. 2. 물론 많은 분들에게 은혜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필요하고 좋은 일이고요. 그렇게 쓰임 받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고난을 만나면서, 통과해오면서요. 이제는 제게 원하시는 사역이 무엇인지 조금더 삶으로 배우고 알아가고 있어요. 부족함에도 종종 많은 분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도록 세워주시는 것도 참 감사하지만요. 성령님과 친밀하게 교제 나누며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다보니까요. 제가 날마다 놓치지 말고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길 원하시는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3. 아마도 선배 목사님들께서 그렇게 중요하게 말씀하시던 한 영혼을 섬기는 법이겠지요. 한 영혼이 중요해서요. 많은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말고 한 사람을 만나서 깊이 있게 소통하는 것이 필요해요. 예전에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저도 모르게 하루에도 많은 약속을 잡고 일정들을 계획했었지요. 성령님과 의논하지 않고요. 기도하지 않고 말이죠. 4. 어려운 고난을 만난 분들께서 상담이나 기도 받으시려고 부족한 사람을 찾아주세요. 그분들 중에는 성도님들도 있고요. 절반 가까이는 전도사님들, 사모님들, 목사님들 이시더라고요. 목회자분들이 저를 찾아오시면 가뜩이나 자존감이 낮은 상태이셔서요. 주의해요. 최선을 다해 섬기고 그분이 충분하다 여기실 만큼 시간을 드려요. 상담오실 경우는 여러 사람과 동시에 만나지 않아요. 이후에 거의 다른 일정도 잡지 않아요. 5. <시간이 되어서 제가 다음 약속 장소로 이동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분은 조용히 마음에 상처를 받으십니다. 자존감이 더 떨어질 수 있어요.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심을 느낍니다. 하루는 조금 알려진 목사님께 상담 가셨다가 너무 바쁘신 걸 목격하신 목사님이 계셨어요. 6. 자신은 충분히 상담받지 못했는데요. 1시간 만에 다른 분이 그 장소에 오셨어요. 약속했다면서요. 나중 저를 찾아오셔서요. 그분에게 무시당하는 느낌적인 느낌에 도망치듯 나왔다는 뉘앙스로 하소연하십니다. 예전 제 모습이 생각나면서 부끄럽더라고요. 이제는 다짐하고 약속, 일정을 잡아요. <오늘 상담오시는 한 분만 만나야지!!> 7. 고난을 만나신 분들이 참 많아요. 누구에게나 다양한 모습으로 반드시 다가오고요. 종종 보이지 않는 영적 전투도 치열해요. 이곳에도 본이 되어주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저도 사랑과 섬김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인도하심이 있어서 만나게 되는 분들 한분한분을 제가 부족해서 많이 돕지는 못하더라도요. 충분한 시간 속에 그분들의 깊은 이야기를 들어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겸손히 성령님을 의지해서 필요하신 은혜를 조용히 전해주시는 통로로 쓰임 받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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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열매맺는교회 이재식 목사, '말하는 것!'
충주 열매맺는교회 담임 이재식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말하는 것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말은 힘이 있습니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말의 능력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율법적으로 하는 말은 뾰쪽한 송곳으로 사람을 찌르는 것과 같습니다. 뾰족한 율법적 언어는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낙심하고 절망하게 합니다. 은혜 안에서 하는 말은 추위에 떠는 사람을 따뜻한 이불로 감싸는 것과 같습니다. 따뜻한 은혜의 언어는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희망을 품게 하고 용기를 갖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따뜻한 은혜의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줍니다. 찌르는 율법의 말은 찌르기는 하지만 수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찌르기만 하는 율법의 말에는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따뜻한 은혜의 말은 우리의 나쁜 부위를 수술해 줍니다. 따뜻한 은혜의 말을 통해 성령님은 역사하십니다. 찌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수술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우리가 하는 말이 뾰족한 율법의 말이 아닌 따뜻한 은혜의 말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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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 '여전한 하나님 은혜'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사무엘하 12:16~31 엄중한 심판 후에도 여전한 하나님 은혜 다윗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서 낳은 아들을 치셨습니다. 아이가 심하게 앓자, 다윗은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다윗이 금식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다는 표현은 그의 기도가 간절한 기도였음을 나타냅니다. 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염려하여 음식을 권하였으나, 다윗은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아이가 죽은 줄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한 후에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아이가 죽기 전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됩니다. 아이가 죽기 전의 다윗은 정적이고, 고난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은 후의 다윗은 동적이고, 연쇄적인 활동이 도드라졌습니다. 그의 신하들이 다윗의 행동을 이상히 여겨 묻습니다. 다윗은 아이가 살았을 때 자신이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셔서 아이를 살려주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가 죽었으니, 자신이 어찌 금식하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다윗은 아이가 죽은 후에는 그것을 돌이킬 수 없고, 오직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태도는 현명합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지만, 내 기도가 여호와의 뜻을 돌이킬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아이가 죽은 것은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징벌이었습니다. 다윗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일상의 삶으로 신속하게 복귀했습니다. 저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또한 슬픔을 당한 후에라도 일상의 삶으로 신속히 돌아올 힘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려는 마음에 있음도 깨닫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다윗의 일상을 축복해 주십니다. 물론 칼이 그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리라는 예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삶을 회복해 주셔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솔로몬이 태어나게 하시고, 아기의 이름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 여디디야로 불러 주셨습니다. 또한,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자, 요압의 요청을 받은 다윗은 군사를 이끌고 랍바로 가서 그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습니다. 다윗은 금 한 달란트짜리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고,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 도끼질과 벽돌 구이를 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과 암몬 자손과의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벌하신 이유도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우리가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징벌 후에라도 우리의 삶의 자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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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열매맺는교회 이재식 목사, '시선의 변화!'
충주 열매맺는교회 담임 이재식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예수님을 만남으로 시선이 변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만나서 나누는 대화는 우리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관심이 있는 곳에 자연히 시선은 멈추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함으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을 무시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사마리아 여인의 시선은 마시는 물에 머물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는 물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자신의 필요에 시선이 머물러 있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남편을 데려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시선은 자신의 남편에게로 옮겨졌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자신은 남편이 없다고 말하였지만 자신의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여인의 시선은 예수님께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과 대화 하면서 여인 관심은 예배로 옮겨졌고 마침내 예수님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은 다르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모두 시선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의 시선이 참된 예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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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 '승리하는 삶!'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사진제공=제자순복음교회) “승리하는 삶” 고난과 위기 앞에서 두려워하고 걱정한다. 사람 앞에서는 의연해야 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은 척하지만, 그 마음을 잘 아는 주님 앞에서는 애쓰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의 사람도 두려워하고 걱정할 수 있다. 항상 괜찮을 순 없다. 힘든 것을 다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주님 앞에서는 그 마음 그대로 드러내도 괜찮다. 사랑의 주님이 그 말 못하는 마음을 얼마나 잘 아는지,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토록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가. 주님은 걱정하고 있고, 두려워 떨고 있는 그 마음을 안다. 주님 앞에서 무슨 부끄러움과 초라함을 감출 이유가 있는가.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면 된다. 주님은 결코 그 마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말만 하지 않는다. 함께 하면 돕는다.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한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는가?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는가? 주님이 항상 함께 하는 삶, 그것이 언제나 최고의 선물인 것은 그 약속의 말씀은 항상 신실하고, 이미 성공한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발견하고 평생을 주님만을 사랑하고 섬기고 따르기로 결정 했다.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소명의 자리로 나아간다. 이 땅에서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명에 충성한다. 그 어떤 걱정과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한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니 끝까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전쟁터로 나아가 싸운다. 어떤 희생과 헌신도 주저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한다. 때때로 보이는 현실에 마음이 흔들려 걱정하고 두려워하지만, 성령 하나님이 그 마음을 붙들어 주니 순종의 자리로 돌아간다. 삶의 자리에서 살아내고 견뎌내고 싸워야 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지만, 그 삶을 허락하고 감당하며 승리로 인도하는 분은 나의 하나님이다.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이 끝이 아니다. 승리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여전히 살아 있기에 소명은 계속된다. 작은 승리를 축하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간다. 실패의 자리에서 힘겨워하지만, 그곳에서 머물지 않고 다시 일어나 목적지를 향해 간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할 때, 신실한 하나님의 승리의 경험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나니 너는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그에게도 행할지니라 이에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백성을 다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의 땅을 점령하였더라” 민 21:34~35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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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
스위스한인교회 담임 김정효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사도행전 10:1-8)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일이니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바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사도행전 10:1-5)“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전파된 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을 때에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 이러라! (사도행전 10:34-46)“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首長)인 <베드로>를 로마군대의 백부장이며,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보내, 그 집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베드로가 보는 앞에서 그 집 식구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심으로써, 베드로와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민족들도 동일하게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 위주>의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바울 사도>는 이 <이방인 전도>를 위해 그의 삶을 <헌신>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 역사적 사건을 위해 <고넬료의 가정>을 선택하셨을까요? 고넬료의 가정은 주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사도행전 10:1)“ 한마디로 <소망이 넘치는 가정>이었습니다. (1) 온 가정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었습니다. (2) <구제를 많이> 하는 가정이었습니다. (3) <항상 기도>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은 <작은 천국>입니다. <천국 백성>에게는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이 이처럼 <가정천국>을 이룬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을 가정답게 하는 것은 가족들간의 끈끈한 <사랑>입니다. 가정이 좋은 것은 이 사랑으로 하나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안식처>이고, <천국>입니다. <주님의 낙원>이 좋은 것은, 그곳은 모두가 사랑으로 하나된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이 <사랑>으로 <가정 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주님의 이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1. 이 사랑은 <책임져주는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누가복음 15:4-6)“ 다른 사람들에게는 양 한 마리가 소중하지 않을지 모르나, 이 목자는 목숨 걸고 책임질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양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희생하신 것은, 당신의 목숨을 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 이여,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 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사야 53:5-9)“ 참사랑은 상대방을 책임지기 위해서 목숨까지라도 버릴 수 있는 사랑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11-15)“ 미국 <뉴욕>의 <성 요한 교회>는 매년 한번씩 <성 프란치스코(San Francesco d'Assisi, 1567-1622)>를 기념하는 예배를 갖습니다. 이 날은 <성 프란치스코>의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 신자들이 집에서 기르고 있는 모든 애완동물도 함께 데려오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자>로 불리는 <프랜치스코>는 그의 설교시간에는 지저귀는 참새들을 조용하게 만들고, 사나운 짐승들도 온순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그가 수중에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가 입은 값비싼 옷을 걸인들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리고서는 자신은 걸인의 누더기를 걸친 채 귀가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종종 <문둥병 환자>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걸인들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여, 진정 행복과 평화를 원하는가? 그러면 먼저 마음을 비워라! 그리고 그 빈 곳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채워라!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분노와 탐욕은 눈처럼 녹아 내린다! 사랑은 내 안의 나를 비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7-28)“ 2. 이 사랑은 <섬김의 사랑>입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3-15!“ 필리핀의 유명한 부자 사업가의 아들 <카풍카우>라는 청년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학교에 가 보니 화장실과 욕실이 너무 불결해서 학장에게 가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학장님,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깨끗하게 청소 좀 해주세요!” “알았네, 내가 다 알아서 조치할 테니 가 있게!” 잠시 후에 이 학생이 그 화장실에 다시 가 보았습니다. 안에서 요란하게 씻고 닦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청소부를 데려다가 청소하는 줄 알고 들어가 보니 학장님이 직접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학장님이 청소를 하다가 이 학생을 보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들어오게! 이제 곧 개끗해질테니 염려하지 말게!” “학장님, 청소부 데려다가 시키면 될 텐데 왜 직접 화장실 청소를 하십니까?” “교회나 신학교에서 이런 일은 먼저 보는 사람이 해야 하는 걸세!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네! 힘으로 해결하는 것도 아니네!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솔선해서 청소를 하게 되면 우리의 환경은 얼마든지 깨끗해질 수 있는 걸세! 부잣집 아들인 자네가 여기 와서 보니까 좀 불결해 보일 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네! 그러니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솔선해서 수고를 해준다면, 이 학교의 환경은 자네가 바라는 만큼 충분히 깨끗해질 수 있는 거라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代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5-28)“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3. 이 사랑은 <용서의 사랑>입니다. (1) <무조건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 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6:14-15)“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이 매우 심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백인 남자가 자기집 정원에서 한가롭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 해어진 옷을 걸친 한 인디언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구걸했습니다. 그 인디언은 매우 지쳐있었고, 극심한 허기와 갈증으로 인해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백인 남자는 빵을 구걸하는 인디언에게 '너에게 줄 빵이 없다!‘고 야멸차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매우 목이 마르니,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 잔 주십시오!‘라고 했으나 역시 거절 당했습니다. 몹시도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던 이 인디언은 마지막으로 '정 그러시다면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게 해주십시오!‘ 라고 했지만, 이 백인 남자는 '너처럼 개 같은 인디언에게는 한 방울의 물도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이 백인 남자의 모독적인 언사에 그 인디언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얼마 후에 이 백인 남자가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깊은 산속에서 사냥개를 놓치는 바람에 그만 홀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방향감각도 없이 산 속을 헤매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산속을 헤매다가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는 이제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침 그때 그 곳을 지나던 한 인디언이 그러한 그를 구출하여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그의 원기회복을 위해 기름진 음식으로 후하게 대접하며 충분히 먹고 마시게 했습니다. 그 백인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난 후 가만히 보니, 자기를 구출한 인디언은 바로 얼마 전에 자기가 문전 박대했던 그 인디언이었습니다. 그 백인 남자는 너무도 계면쩍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이 인디언은 조용히 말해줬습니다. "당신이 얼마 전에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지금쯤 당신은 산중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잠언25:21-22)" (2) <끝까지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21-22)“ 미네소타 <크리스챤 크로니클> 이라는 잡지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킴 푹> 여인은 베트남 여인으로 <월남전> 당시 <네이팜 폭탄>이 떨어진 마을에서 온 몸이 불에 데인 채로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와 생존한 사람입니다. 그녀가 <유명인사>가 된 것은 우연히 <종군기자>의 카메라에 그녀의 도망치는 모습이 찍혀, 전 세계 여러 신문에 실렸기 때문입니다. 1996년 워싱턴에선 <월남전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는데 그녀가 초청되어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연설에서 민간인 마을에 폭탄을 투하한 그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면 그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 <죤 머플러>라는 그 비행기 조종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바로 그 조종사입니다! 저의 오판으로 고통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그 일로 인해 그 동안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용서해 주시오! 용서해 주시오!" 그때 <킴푹>여인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합니다! 다 용서합니다! 저는 끝까지 당신을 용서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이 광경에 행사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빌고 용서하는 감격스런 장면 앞에서 눈물을 훔치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자기와 가족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긴 그 당사자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는지를 말했는데, 이는 그녀가 월남전이 끝난 후 이주해온 미국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4. 이 사랑은 <희생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和睦祭)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1서 4:7-11)“ 어떤 <목사>가 한 농가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크리스천>이 아니었지만 믿는 그의 아내는 오랫동안 남편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는 그 집 주인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참뜻을 설명해 줄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농장 주인이 상기된 표정으로 목사에게 와서 빨리 함께 닭장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를 따라 닭장에 가보니 둥지에 암탉 한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그 날개 밑에서 새끼병아리들이 삐죽 삐죽 머리를 내밀고 밖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농장주인이 말했습니다. „저 암탉의 머리에 난 상처를 좀 보십시오! 간밤에 족제비가 피를 빨아 먹었던 부위입니다! 하지만 어린 새끼들이 족제비에게 당할까 봐 꼼짝도 않고 피를 다 빨리 운 후 죽고 만 것입니다!“ 그때 그 목사는 농장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건 바로 인류의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꼭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고통을 다 견뎌내셨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도 있었고, 스스로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분께서 그렇게 하셨더라면 선생님과 나는 영원히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목사의 그 말을 들은 받은 농장주인은 그 말뜻을 깨닫고서 머리를 끄덕였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13-14)“ 이 사랑으로 <가정천국>을 이루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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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채플교회 이광형 목사, '동참해야 합니다.'
도곡동 드누보 문화선교센타 이광형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동참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어떤 일에 동참한다고 했을 때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사람이라면 그 일에 대한 기대감과 자부심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소 동참에 소극적인 이유는 거기에서 느끼는 부담감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극적이든 조금 소극적이든 동참을 하기로 했다면 반드시 갖게되는 공통점은 바로 책임감이라는 것입니다. 동참은 책임감을 필요로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더 강한 책임감을 감수하고자 한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이고 책임감에 부담을 느낀다면 동참하는 일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그 일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부담감을 뒤로 한채 책임감을 가지고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서는 어떻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에대한 적극적인 동참을 이루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받음으로 족하다 여기며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나를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달리신 주님의 십자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며 갖는 생각일 것 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실을 믿으며 베풀어 주신 그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것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갖게되는 공통적인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잘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은혜와 사랑을 묵상하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반드시 함께 공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살리고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나의 죄 때문에 주님이 나 대신 달리신 것이기때문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4:25)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위해, 곧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살아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 고백을 오늘 여러분의 입술로 선포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를 따라서 고백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죄 때문에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의롭다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는 추상적이거나 일방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는 일 년에 한 번 씩 우리의 묵상을 위하여 고난주간에 필요로 하는 요소일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나의 신앙의 중심에 그래서 나의 삶을 에워싸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 년에 한 번 쯤 참여하고 가끔 힘들거나 은혜받고자 할 때 찾아보는 종교적인 것으로 취급 되어질 수 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주님의 은혜와 사랑만 바라보며 만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그 사랑을 이성적이고 지식적으로 충분히 알고 돌아가라는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결코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게 될 지언정 진정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깊이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나 때문에, 나의 범죄 때문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먼저 이 사실을 생각해야 할 책임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참하기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라는 것이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동참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오늘 말씀을 통해 자세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여러분은 이제 이 고백에 동의하십니까? 이것은 그저 바울의 신앙이고 바울의 고백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우리는 말씀을 통해 오늘같이 본문을 읽을 때에 은혜 받으면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은혜와 사랑에만 머물고 있는것이 아니라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단순히 주님이 달리신 주님만의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자신도 달린 주님과 자신의 십자가였습니다. 비록 실지로 똑같이 못 박힌 것은 아니지만 바울은 주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는 자신의 죄악 때문임을 알기에 먼저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책임감을 가지고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을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님과 함께 자신도 죽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것은 동참하지 않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과 함께 죽지 않고는 누구도 언급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실지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이나 우리는 똑같이 그러한 죽음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때문에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으신 주님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는데,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의 죄와 함께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여기서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죽으셨음을 고백하며 십자가에 동참해야하는 까닭이 바로 주님이 나 때문에 내 죄와 함께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은 그저 주님께 맡겨 드린 내 죄의 일부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나 상황 때문에 미처 다 내어 드리지 못 한 내 죄의 또 다른 한 부분은 죽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모든 죄, 곧 죄인 그 자체인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혔고 주님과 함께 죽었기에 이제 다시 사신 주님으로 인하여 이전의 내가 아닌 주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는 나로 변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동참입니다. 그리고 이전의 나는 죽고 오직 내안에 계시는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삶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은 주님의 십자가는 긍휼과 은혜이고 무한한 사랑과 구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먼저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과 은혜는 공허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구원의 감격은 있는데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 하고, 부활은 믿는데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그 능력으로 살아가지 못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본다면 또 다시 다른 은혜만을 운운할 것이 아니라 다시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에 오늘도 나는 동참하고 살아가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까? 아니면 못박히신 주님만 바라보고자 하십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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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한인교회 에스더윤 전도사, '마음의 눈'
은혜한인교회 에스더윤 전도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Grace Time]-마태복음 6:1-34 [마음의 눈]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마음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행동을 한다면 1절에 말씀처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모든 것을 은밀하게 행하는 자일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1절).”라고 하셨습니다. 4절에 구제할 때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고, 6절에 기도할 때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하라 하셨으며, 18절에 금식할 때도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은밀하게 행하는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하나님의 눈에만 보이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구걸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을 잃어버린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적으로 종교적 관행을 행하는 것을 비난하셨습니다.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면 위선적인 가짜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내 마음의 눈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은밀하게 행한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모르게 내가 행한 사랑과 믿음의 행동 그리고 아름답고 좋은 생각으로 시작한 모든 것들을 주님이 아십니다. 내 마음의 눈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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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교회 정영구 목사, '가치 싸움'
하나교회 정영구 담임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가치 싸움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머리가 나쁜 것도 죄입니다. 무지, 오지, 망지, 맹지, 모두 죄입니다. 몰라도, 왜곡해도, 잊어버려도, 맹해도 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머리 쓰고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머리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자꾸 마음먹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진리지식입니다. 그런데 진리지식이 아니라 사망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싸움이 지식싸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내 몸의 흔적이 죄입니다. 온갖 죄가 보이니까 당연히 사망지식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망지식은 매일 옳고 그름을 따집니다. 판단은 괜찮은데 심판까지 가면 안 됩니다. 최종적인 심판은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데 인간이 합니다. 지옥 갈 놈, 천국 갈 놈 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는데 방 하나를 보여주지 않아서 도대체 그 방에 누가 있을지 궁금했다고 합니다. 보여 달라고 하니까 시험에 들까봐 못 보여주겠다고 하기에 그래도 보여 달라고 졸라서 봤다고 합니다. 보니까 그 방에는 자기가 땅에 있을 때 지옥에 갈 놈이라고 생각했던 그 놈들이 다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심판자가 되어서 지식을 옳고 그름으로 얘기합니다.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인데 거기에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독으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쁜 일이 온 가족을 뭉치게 만들고 화해하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옳다 그르다, 옳다 그르다 하고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 하지 말고 예, 아니오 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과 예, 아니오의 차이가 있습니다. 옳은 것은 하나님이 되고 그른 것은 사단이 되는데 예, 아니오는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예, 아니오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예입니다. 예, 아니오는 가치중립이지만 옳고 그름은 이미 그 안에 마귀의 자식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망지식은 매일 옳고 그름을 얘기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진리의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지식이 결국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살아가는 내 삶은 모호합니다.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때 사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습니다. 구치소에 가보면 아리랑이든 강도든 다 이해가 됩니다. 강도는 물건을 움친 사람인데 대통령은 나라를 훔친 놈입니다. 그런데 나라를 훔친 사람은 바깥에 돌아다니고 강도는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변호사하고 판사하고 검사가 얼마나 나쁜 놈들인지를 얘기해 줍니다. 예를 들어 천만 원을 갖다 주면 7년 살 사람이 3년 산다고 합니다. 강도는 2천 만 원을 훔쳐서 감옥에 들어가서 천만 원을 변호사한테 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죄는 얘기하는데 사회적인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 둔감합니다. 또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은 늘 구조적인 공의의 죄를 얘기했는데 우리는 매일 사적인 죄에 대해 생각하고 삽니다. 그것을 사사화라고 합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기준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준은 있습니다. 기준은 분명히 있는데 그런데 그 기준으로 내가 하나님처럼 심판자가 되어서 심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어놔야 합니다. 나중에 에베소서 마지막에 가면 혈과 육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싸움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싸움을 지금의 언어로 얘기하면 가치싸움입니다.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도덕과 어떤 윤리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지 저 사람은 나쁜 놈이야,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하고 혈과 육이라는 개념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 사람을 잡고 있는 정신이 있는데 그 정신과 싸워야 합니다. 내가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혈과 육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 싸움입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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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죄의 불감증'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죄의 불감증 ♧ 팔월 대보름날 고개를 넘어 큰집에 다니러 가는 부자(父子)가 있었다. 아들은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으나 아버지는 불신자였다. 그런데 길 가던 도중에 아버지가 목이 마르다며 아들에게 "얘야, 갈증이 많이 나는구나. 마침 저기 무밭이 있으니 무 한 개만 뽑아 먹어야겠다. 너는 여기서 누가 오는지 망을 잘 보거라" 아버지는 아들의 대답도 듣지 않고는 바삐 무밭으로 들어갔다. 마침 다리통 만한 무를 발견하고 막 뽑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아들이 "아버지 누가 보고 있어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아이코 큰일 났구나' 싶어 밭머리로 신속하게 나와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놈아 아무도 보는 이가 없지않으냐? 남자는 간이 커야지. 똑똑히 지켜!" 하고는 다시 무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번에도 막 무우를 뽑으려는데 아들이 "아버지 누가 봐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급히 뛰어나온 아버지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조금 화가 난 얼굴로 "도대체 누가 보더냐?"라고 다그치자 아들이 "하늘과 별이 그리고 저기 보름달이 보고 있어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턱없는 아들의 말에 짜증 난 말투로 "이놈아 똑똑히 지켜!"라고 윽박지르고는 다시 무밭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막 무를 뽑으려는데, 아들이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아버지 진짜 누가 보고 있어요."라고 했다. 놀란 아버지는 헐레벌떡 뛰어나와 "누구냐?" 숨찬 목소리로 아들에게 힐문했다. 그러자 아들이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계시잖아요?"라고 하며 오히려 아들이 불편한 듯한 태도로 아버지를 나무라듯 대답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너무도 진지하게 자신을 책망하듯이 대답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꼬리를 내렸다. 아들에게 다소 부끄러웠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평소 익숙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얘야, 아빠가 잘못했다."라고 하면 될 것을, 아들의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가자, 장난으로 그래 봤다."라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과연 누가 이 아버지에게 정죄의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머지않은 미래에 하나님 앞에 설 때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 것이 우리네 인생사가 아니던가? 한 사회의 사회화가 주도하는 문화적 양심에 준거하여 윤리와 도덕의 가치관이 사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사람 사는 양식이 별반 차이가 없어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하지 않을까 싶다. 신앙세계의 성경적 윤리와 도덕의 가치관과 거리가 먼 일반 불신 사회의 도덕률은 인생의 양심에 준거할 뿐이다.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제 마음, 곧 제 양심의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취한 행동에 대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흥분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게 된다. 의의 준거가 없고, 행동의 안천 장치가 없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시내산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부여받기 전까지는 인간행동이 죄의 영역 안에서 절대 영향을 받았음에도 그것이 죄임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렇다고 시내산 율법 이전의 모든 세대가 지은 죄가 죄일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죄임을 알았던 몰랐던 죄의 정죄 아래서 자유할 인생은 아무도 없다. 다만 율법이 온 후로 죄가 무엇이며, 죄의 본질과 특성과 속성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죄의 결과가 영원한 사망임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무엇보다 죄는 사죄 받아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가 있고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대속을 통한 속죄임을 알게 되었다. 이를 우리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없었고, 율법의 정죄를 통해 사죄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위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순전히 자연인으로서 율법의 존재도, 정죄도, 사죄의 필요성과 절대성도 몰랐다. 다만 양심의 준거에 의한 도덕적 존재로서 최소한의 부끄러움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은 성격적 윤리 기준에서 아버지의 범죄 현장을 극복하고 있었다. 이것이 율법의 정죄를 통한 죄인임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연인과의 차이점이다. 사람이 자신의 양심이나 성경의 율법 앞에서 정죄를 피해 갈 수 있는 인생은 제 아무리 '법 없이 살 수 있다'라고 자부하거나 타인의 인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성역도 예외도 없다. 그러나 은혜의 법은 다르다. 은혜의 법은 정죄가 주어가 아니다. 용서를 전제한 회심(回心)이 주어다. 곧 회개와 신앙을 합성한 것이 회심이다. 죄는 회개하고 회개한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힘입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받고 믿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첫 사역의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위 이야기 속의 아들을 보자. 얼마나 순수한가? 맑고 깨끗한 옹달샘의 생수 같은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가? 예수님은 이런 아이들을 모델로 세우시고 때묻은 어른들을 향해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누가 이야기 속의 아버지에게 정죄의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적어도 우리 기성세대들의 위선과 겉치레적인 양심에 비추어 봤을 때, 부끄러움과 잘못된 용기에 최소한의 진솔함을 가진 평범한 사회적 존재로 평가된다. 오늘날 흔히들 말하는 얼굴에 철판을 깐 철면피는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낙인찍힐 만큼 최악의 유명세를 치르는 인사들이 정계에도 경제계에도 교육계에도 종교계에도 제야의 묻힌 인사들에게도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지천에 깔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를 우리는 횡단하고 있다. 날마다 자신을 쳐서 십자가의 도 앞에 복종시키려 몸부림쳤던 곤고한 인생 바울 사도처럼 우리 그렇게 날마다 정신 차리자고 목매어 호소해 본다. 더 가지면 어떻고 덜 가지면 어떤가? 어차피 이 땅에서 살 동안 다 소비하고 가야 할 것들이 아니던가? 더 소중한 것, 그리스도의 소유권에서 제외되거나 버림받지 않기를 위해, 그리스도의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기를 위해, 주님으로부터 부인 받는 불법을 행한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위해, 몸부림친 바울의 길에 꿋꿋하게 서서 십자가의 복음 꽉 붙잡기를 주문한다(고전 9:27).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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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 '기여하는 삶'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사진제공=제자순복음교회) “기여하는 삶” 부모는 자녀를 향한 비전과 기대가 있다. 그렇다고 부모 자신의 비전과 기대를 자녀에게 주입하여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진 않는다. 부모는 자녀 스스로가 인생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고, 자신을 향한 오리지널 디자인을 찾고, 그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길 바라고 기도한다. 부모는 자녀의 삶을 통제하며 주도하지 않고, 인생의 소중한 목적과 가치들을 삶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온전히 찾아갈 수 있도록 인도한다. 부모가 자녀의 인생을 대신하여 살아가지 않고, 그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찾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한다. 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온전히 찾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기꺼이 훈련하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어떤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여 일어서며 끝까지 완주하길 바란다. 이것은 개인적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끝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으로 인하여 가정과 사회에 선한 영향력과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기여하는 인생을 살길 바란다. 개인주의 성향의 강함을 넘어 이기적인 자세에 익숙해진 지금의 상황에서는 가정과 사회에 기여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이고, 삶의 목적과 자세라는 것을 잘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것이 옳고 선하고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보다 조금 더 먼저 살아가며 인생의 소중한 목적과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간다.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하나님이 진정한 인생의 주인임을 삶으로 표현한다.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기쁘다는 것을 삶으로 경험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보호와 인도, 훈련과 성장, 끈기와 성취가 내 인생의 멋진 내러티브를 만든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인생에서 풍성한 선물을 잘 누리고, 잘 사용하길 바란다. 하나님은 그 선물을 가지고 그 인생을 통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인생이 주도적으로 그 선물을 누리고, 잘 사용하길 바라고 기대한다. 하나님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거룩과 정결이지, 통제와 억압이 아니다. 거룩과 정결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인정하고 의지하는 삶의 기본기이다. 거룩과 정결한 마음과 삶의 자세는 그 풍성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나타낸다. 자신의 부요함은 누군가를 부요케 하는 도구이고, 자신의 성공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선한 능력이고,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은 하나님 나라의 한 지체로 그에 합당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잘 사용한다. 부모가 자녀의 삶을 향해 바라고 기대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길 원하고, 그 풍성한 삶이 개인을 넘어 가정과 사회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길 바라고 기대한다. 다양한 인생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그 다양한 삶으로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길 바라고 기대한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민 18:20 jso848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