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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싱톤중앙장로교회 정지운 목사, '하나님께는 로드맴이 있다.'
오륜교회 교육국장 정지운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출애굽기 3장 13-22절 갈길을 잃은 시대를 살아간다. 다들 답이 없다고 말한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없이 바뀌는 상황으로 인해서 인간적인 계획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께 로드맵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 모세는 하나님께 계속해서 묻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누구시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서의 언약을 이야기 하신다. 그리고는 바로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보낼 것이라고 모세에게 미리 알려주신다. 심지어 빈손으로 나가지 않을 것을 말씀해주신다. 사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 입장에서는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마치 공수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수포를 던지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림 필요 없다고 이야기 하신다. 하나님께 로드맵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상황과 분석은 모든 것이 좁디 좁은 생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께는 큰 그림이 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다. 이처럼 하나님께는 로드맵이 있다. 세상에 없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제한할 수록 믿음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을 뿐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의 스케일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좁디 좁은 한국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열방의 하나님이심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으로 제할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는 각나라의 족속을 향한 하나님의 로드맵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목회자와 선교사와 일터 사역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가실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에게 하나님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스케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믿음의 용량을 키우는 것이다. 부디 오늘 하루 종지그릇의 사람이 아니라 냉면그릇과 같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로드맵을 바라보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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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절제하는 삶'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고린도전서 9:19-27 복음 전파 완주를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는 삶 바울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었으며,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로,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로, 여러 사람에게는 여러 모습으로 그들을 대 했습니다. 비록 바울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한 비난을 괘념하지 않고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의도는 경주자의 비유를 통해 더 잘 나타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경주자의 상을 받도록 부지런히 달음질해야 합니다. 또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듯이, 우리도 바울처럼 썩지 아니할 승리의 관을 얻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합니다. 바울은 달음질을 향방 없는 것같이 하지 않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이같이 행동했던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설마 바울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이러한 말을 했을 리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바울은 경주자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장차 자신이 받게 될 상(승리자의 관)을 주목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은 우리에게 “자기 비움”, “희생”, “부지런함”, “절제”와 같은 숭고한 가치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추구했던 이러한 가치들은 “참여”라는 가치에서부터 기인한 것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했던 목적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23절). 여기서 “참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나누어 누리는 사람”을 뜻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가지고 있던 의무감이나 이타심으로 이 일들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먼저 복음의 은혜를 나누어 누리기 원했습니다. 만일 바울이 먼저 복음을 누리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 자체가 피곤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생명의 삶」, 2022년 5월호, 115). 나는 ‘날마다 복음을 나누어 누리고 있는가?’를 자문해봅니다. 제가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이 저에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말씀 묵상을 통해 날마다 복음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눔으로 복음에 참여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40개월 된 우리 집 막내 아이만 보더라도 부모의 손이 정말 많이 갑니다. 아이의 옷도 입혀 주어야 하고, 밥을 먹을 때 옆에서 도움을 주어야 하며, 대소변을 아직 가리지 못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의 옷을 갈아입혀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 막내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또래의 아이들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때로는 아이의 양육을 돕는 일이 피곤하기도 하지만, 제가 “이 아이가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라며 불평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부모로서 감당해야 할 사랑의 수고가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일을 감당하면서 부모로서 성장해가는 중입니다. 목회도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 부담스럽고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는 그 일을 통해서 복음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과연 복음을 위한 일을 행하고 있고, 그 일을 통해 복음에 참여하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그리고 저의 삶의 목표가 주님께서 주시는 승리의 관인지를 점검해 봅니다. 제가 복음에 참여함을 통해서 “자기 비움”, “헌신”, “부지런함”, “절제”의 가치들을 목회현장에 적용해 나가도록 힘쓰겠습니다. 저의 목회의 목표가 “복음에 참여함”과 “복음을 위하여”라는 두 가지 가치에 집중되기를 원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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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무 정성민 대표, '미스바'
나를 바꾸는 하나님의 말씀 묵상 정성민 대표./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I. Find 사무엘이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로 모은다. 미스바는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린 곳이다. 오늘은 그들이 요구한대로 왕을 세워주기 위해서이다. 미스바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렸던 곳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돌이키려고 결단했 곳, 하나님께서 참 행복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왕이신 하나님을 두고, 이스라엘이 요구한 새로운 왕을 세우는 곳이 되었다. 사울이 숨자,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들의 왕이 어디에 있냐고 하나님께 여쭈어가며 적극적으로 찾는다. 하나님의 행복과 슬픔이 공존했던 곳, 미스바 II. Feel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로마서 3:15) 이 말씀이 생각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어서는 더디고, 게을러지고 피곤해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죄를 짓는 것에 있어서는 내 발이 참 빨라진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평소에는 하나님께 여쭙지 않다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왕이 보이지 않자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여쭙는 것처럼 말이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기 까지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사무엘이 지속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애써 모른척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되길 바라는 모습이다.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죄인줄 알면서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모른 척하면서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들이 있다. 그런 나를 적극적으로 말리시지는 않지만, 가슴 아파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된다. III. Want 사랑하는 내 아들 성민아,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의로운 선택을 받고 싶어한다. 만일 내가 강요했다면, 애초에 로봇이나 컴퓨터처럼 정보를 입력한대로 반응하는 대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아빠는 우리 아들이 때로는 아빠 말고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더 바랄 때가 있는 것을 안다. 육신 안에 살기 때문에 죄를 아예 짓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아빠를 사랑해서 죄가 아니라 아빠를 선택하길 원한다. 세상을 사는 동안 손해를 보더라도 아빠를 사랑하기에 아빠의 뜻을 따르기를 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니 말이다. IV. Walk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처럼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시는 분이 없습니다. 강압할 수도 있고, 강요하실 수도 있는데 우리의 자의로 아빠를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 안에서 주신 이 자유로 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세상보다 아버지를 더 두려워해서, 세상보다 아버지를 더 사랑해서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더 선택하고 싶습니다. 성령님, 연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고 죄를 사랑하는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리고 저를 도와주세요. 죄가 아니라 아버지를 선택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V. Worship 하나님 아버지를 더 두려워하도록, 하나님 아버지를 더 사랑하도록,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선택하며 살도록 이끌어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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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복음선교회 대표 김정수 목사, '천국 복음'
원형복음선교회 대표 김정수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마가복음 13:1-10 천국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끝이 옵니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막 13:10) 마지막 때에는 먼저 자연 재난이 극대화됩니다. 그런 혼란의 시대에 바다에서 나온 짐승, 곧 열국을 다스릴 강력한 통치자가 등장합니다. 한편으로 강력한 통치자의 조력자로, 통합된 종교의 지도자도 등장합니다. 그가 세계 통치자의 우상을 만들어서 만민이 절하게 하고, 오른손이나 이마에 666표를 받게 강요할 것입니다. 그런 환란의 절정에, 일곱 번째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께서 공중에 임하실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마지막 때에 전개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한편, 주님은 마지막 때가 오기 전에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지금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 잡은 기독교가 전파하는 십자가의 피만의 복음이 영혼들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천국 복음”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반쪽짜리 복음이며,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의 피만의 복음을 믿어서는 기독죄인(基督罪人)이라는 굴레를 결코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물과 피와 성령이 합하여 하나”(요일 5:8)인 원형의 복음에서 변형된 “다른 복음”입니다. 사도들이 전했던 원형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천국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신 후에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우리는 “성경대로의 복음”인 “천국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할 사명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Brief Commentary on Mark #13) Mark 13:1-10 The end will come only when the Gospel of the Kingdom is preached to the ends of the earth. “And the gospel must first be preached to all the nations” (Mark 13:10). The last time, natural disasters are maximized first. In such turbulent times, a beast from the sea, a ruler who will rule over the nations, appears. On the one hand, a leader of a unified religion as a coworker of the mighty ruler emerges. He will make an idol of the king of the world and make all the people bow down before it and force them to receive the mark of 666 on their right hands or foreheads. At the height of such tribulation, the Lord will come in the air along with the sound of the seventh trumpet. Such process is God’s providence to be unfolded in the last days. On the other hand, the Lord said that the Gospel must be preached to all nations before the end times come. “And this gospel of the kingdom will be preached in all the world as a witness to all the nations, and then the end will come” (Mat 24:14). Is the gospel of the blood of the Cross preached by Christianity, which has now established itself as a global religion, the “Gospel of the Kingdom” that allows souls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No. It is a half-gospel, and believing in this gospel of only the blood of the Cross cannot remove the bondage of the sinner from Christians. It is “a different gospel” other than the Original Gospel, which testifies “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as one” (1 John 5:8). If you preach the other gospel different from the Original Gospel preached by the Apostles, you will be cursed. It is God’s justice to judge the unbelievers after the Gospel of the Kingdom is preached to the whole world. We have received the Great Commission from the Lord to spread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Gospel according to the Scriptures”(1 Cor 15:3-4) to the ends of the earth.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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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감리교회 김진구 목사, '유리명왕의 험난한 생애(6)'
신동감리교회 김진구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시로 읽는 고구려 역사 - 열 다섯번째 이야기 유리명왕의 험난한 생애(6) 사랑하는 첫째 아들 도절 원추리 꽃 피는 18세에 죽으니 유리왕의 비통한 심경 양잿물 마신 胃腸이다 사랑하는 것이 이토록 참혹하고 애달픈 것이냐 눈길 닿는 곳마다 아들의 흔적과 체온이 느껴져 견딜 수 없다 텅 빈 소금창고 같은 방엔 짭짭한 바람 휘몰아치고 상실감이 동굴 속 종유석으로 자라는 장소를 떠나야 하리 슬픔을 달래려 수도를 옮기려던 차에 신께 바칠 돼지가 달아나 잡으러 갔던 설지가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보니 지역이 예사롭지 않다 산과 강이 깊고 험하여 적을 막기에 유리하며 땅은 농사짓기 알맞고 사슴과 물고기가 많다 그곳으로 수도를 옮기면 백성들이 살기 좋고 전쟁의 피해도 크게 줄일 수 있으리라 설지의 말을 들은 왕이 직접 가서 地理를 살핀 후 서기 3년 10월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니 압록강을 끼고 있어 교통이 좋고 천연의 요새라 무려 400여년 국내성은 고구려의 수도가 되었다 충남 태안에서 한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아내로서 살아가고 있는 오인숙 사모님을 내가 알게 된 것은 2007년 1월 경입니다. 그 분이 월간잡지 창조문예에 올리기 시작한 연작시 '시로 쓰는 고구려사'를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 나라에 이런 시인이 있다는 사실에 내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습니다. 오안숙 사모님과 통화를 하고 그사모님과 친밀하게 지내면서부터 사모님의 영적인 깊이와 겸손함에 다시 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인천에서 태어난 오인숙 시인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고 그 인근지역에 크리스찬들 사이에서 은사적으로도 꽤 알려지는 유명한 소녀였는데, 어느 날 부터 그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 그에게 주어진 모든 말씀들을 내면으로 묵묵히 삭이다가 어느날 부터 그것을 시로 다시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오인숙 시인은 1975년, 1976년에 '전국 주부백일장'에 장원으로 입상했고, 2001년에는 '믿음의 문학'에 신인상으로 시인들의 세상에 등단을 하기도 했는데, 2005년에는 시로 쓰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비망록 '귀향'을 세상에 내 놓으면서 한국문단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오인숙 시인은 위의 시집을 2005년 3월에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헌정하면서 "어려운 나날을 보낸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과 자료집들을 보면서 그들의 아픔과 원통함을 보면서 시로 승화시켰다"고 하였는데, 그의 시집을 읽어보면 우리 크리스찬들이 이 역사 속에서 타인들의 아픔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 지 그 지혜와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나와 오인숙 시인과의 만남에 징검다리가 되어준 그의 연작시 '시로 쓰는 고구려사'를 계속 연재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 분의 시는 우리 크리스찬들에게도 조국이 무엇이고, 역사의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혹시, 이 글이 부담스럽거나 불쾌하신 분은 언제든지 댓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한 분이라도 불쾌해 하는 분이 계시면 이 시를 연재하는 일을 멈추도록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한반도의 작은 나라로만 배워왔던 역사는 왜곡되고 위축된 역사였다. "라고 말하는 그 분의 음성을 들으며 글로벌 시대에 우리들이 내셔널리즘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이 민족, 이 조국에 담긴 우리 주님의 비전마저 상실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의 연작시 "시로 쓰는 고구려사"를 연재하려고 합니다. '시로 쓰는 고구려사'는 웅대한 비전을 가졌던 우리들의 고대국가 고구려의 '대서사시'입니다. 이 시를 읽으며 이 시대의 크리스찬들도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대민족적 비전을 품었으면 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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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양란'
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Ph.D./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양란(orchid) 나는 순백의 양란 꽃을 좋아한다. 3년 전에 산 양란이 창가에 있어 해마다 꽃을 핀다. 올해도 소담스런 꽃이 피어나고 있다. 몇 년 전 주택에서 살 때에는 햇빛이 부족했던지 한 해를 넘기지 못해 시들고 죽었다. 그런데 지금은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해마다 꽃을 피어 보답하고 있다. 집 안에 살아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생기를 더해 주는 것 같다. 꽃 가게를 지날 때마다 하나, 둘 사 놓은 화분이 20개가 되었다. 몇 달전 West Virginia grocery에서 산 shamrock이라는 꽃은 커다란 클로버를 연상시키면서, 저녁이면 잎을 오무렸다가 아침이면 활짝 잎을 편다. 연분홍 꽃도 순수하고 아름답다. 한 달전에는 치자 꽃과 제라니움을 샀는데, 제라니움은 붉고 커다란 꽃 망울이 네 개 피어있고, 치자 꽃은 장소를 잘못 찾아왔는지, 별로 생기있어 보이지 않는다. 진한 치자 꽃 향기가 생각나서 사왔는데 과연 꽃을 피어낼 것인지, 지켜 보고 있다. 오래 전 야마하 인티 앰프(A-S 1000)를 사고는 소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듣던 것을 Elac이라는 스피커를 연결해 주었더니,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가 나서, 요즘은 그 앰프와 스피커 소리를 듣고 있다. FM 음악인데도 그 소리가 그렇게 맑고 고울 수 없다. 집에서 듣는 음악과, 눈을 즐겁게 해주는 꽃들을 보면서 밖에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지금은 일년 중 가장 좋은 5월이다. 하루 하루가 아쉽게 지나가고 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람될까? 나는 시간 나는 대로 마태 복음 강해를 작성해 가고 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교인들에게 가르칠 교제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중 3년 때부터 읽어 온 성경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로 그 깊이를 다 알지 못하는 생명의 샘이 숨겨진 것 같다. 이 생명의 말씀을 손에 붙들고 지금까지 살 수 있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좋은 것을 붙들고 살 수 있어서 그렇다.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은 이 성경을 더 깊이 알아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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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net 대표 이승제 목사, '정치갈등의 시작'
가까운교회 이승제 담임목사.(사진제공=가까운교회) 삼상 10:17-27 정치갈등의 시작 백성들의 요구대로 사울을 왕으로 선출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사울이었으나 사무엘은 일방적으로 선포하지 않고 제비를 뽑는 매우 지혜로운 방법으로 선출한다. 공정성 그리고 제비라는 우연의 확률까지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확인하는 매우 지혜롭고 하나님의 개입을 극대화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을 대신할 왕을 뽑으면서도 자신의 애호가 따로 있고, 자신이 배제된 왕은 싫어하는 이중, 삼중적인 속성을 가진 존재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을때는 순종과 불순종으로 나뉘지만 사람을 왕으로 뽑으면 정치갈등이 일어난다. 내 인생의 왕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때 수없는 갈등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오늘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게 하소서.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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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 이성민 교수, '연합하라!'
감리교신학대학교 이성민 교수.(사진제공=감리교신학대학교)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하나님의 백성이 ‘통일을 이루어 함께 사는 것(live together in unity)’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라고 다윗은 노래합니다(1절). 그는 통일된 이스라엘이 시온에서 영생의 복을 얻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3절). 이 통일과 영생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을 하나 되게 하시고 영원히 함께 살게 하십니다. 찬미예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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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우리는교회 심석보 목사, '행하심에 순종하는 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김해 우리는교회 심석보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말씀 : 사무엘상 10장 17-27절 1.하나님 행하심에 순종하는 자가 되자. 모든 이스라엘 앞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사울이 왕으로 뽑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뽑은 첫 왕이 될 사울! 사울을 보고 다른 두 그룹의 반응이 있습니다. 많은 백성들은 사울을 보고 흡족해 합니다. 그러나 몇 불량배는 비아냥거립니다. 왜 하나님의 택하심을 보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이 있을까요? 자기들의 기준에 들지 않아서? 자신보다 못하다 생각이 들어서? 사울이 약한 지파라서? 분명한 것은 결국 자기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세워진 이들을 향하여, 선출된 이들을 향하여 주의해야 합니다. 비방이나 비아냥거림은 없어야 합니다.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해주고, 더 잘해낼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소망해야 합니다. 2.결단 나는 내 잘난 맛이 있었습니다. 나보다 못한 이가 잘 되거나, 높은 자리에 있으면 맘에 들어하지 않거나 비아냥거렸습니다. 험담을 해가며 내가 더 높아지려고 했었습니다. 참 못난 나였습니다. 그땐 왜 그랬을까 생각해봅니다. 내 마음이 악했습니다. 욕심으로 가득했습니다. 학교에서도 그랬지만, 교회 안에서 그랬습니다. 시기 질투를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외면하기 바빴습니다.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순종하겠습니다. 나와 맞지 않더라도 기도하고 돕겠습니다. 나와 다르더라도 응원하고 협력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더욱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 세운 이들을 향해서는 더욱 그리 하겠습니다. 주여! 주의 일을 이루소서!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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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온누리침례교회 조민수 목사, '부활신앙을 기억하라!'
원주 온누리침례교회 조민수 담임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요한계시록 14:13]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성도는 죽음과 부활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죽음이란 믿는 자들에게는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이기에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괴로움이 많은 세상에서 괴로움이 없는 곳으로 우리의 장막이 옮겨가기에 성도는 죽음을 축하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음이 두렵습니다. 소망이 없고 끝이라고 생각하기에 무섭습니다. 어떻게 하던지 피하고 싶어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기에 두려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성도는 생명의 부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불신앙이거나 교회를 다녀도 믿음이 없는 성도는 심판이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부활신앙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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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한인교회 에스더윤 전도사, '사랑의 관계!'
은혜한인교회 에스더윤 전도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Bible Time ] - 로마서 8:31-39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사도바울은 아무리 핍박이 몰려오고 환난과 곤고함으로 인해 불편한 마음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만큼 자신의 생명을 걸을 정도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컸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어느 누구도 성도의 믿음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세상이 감당 못하는 자들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외부적인 사탄의 공격이 밀려올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를 위해 기도하고 믿음에서는 떠나지 않습니다. 35절에 바울의 고백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진실한 믿음을 가졌다면 외부적인 고통을 감내하고 주님만을 더욱더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어떠한지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바울이 가진 열정적인 신앙과 믿음을 본받아야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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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드하우스 박길웅 선교사, '사라지지 않을 것!'
브레드하우스 박길웅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사라질 것보다 사라지지 않을 것에 대해” (요일2:15-17) 1.사도 요한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것을 우리에게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우리를 세상에 빼앗길까봐 그랬을까? 그것도 틀린말은 아니겠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이유가 있다. 2.세상의 것들은 그럴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오는 것들은 육신의 정욕과 눈의 욕망과 세상의 자랑들 뿐인데, 이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지나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3.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뿐이니, 영원히 가치를 둘 것에 마음과 삶을 두는 것이 더욱 지혜롭고 현명한 삶이라는 것, 그리고 지혜로움을 넘어 영원히 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라 권고한 것이다. 4.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따르며 산다.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는 분명 무언가를 쫓고 따르며 살아간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고 있든 혹은 무의식중에든, 우리는 무언가를 따르며 산다. 5.그렇다면 따른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따르는가가 더 중요한 시점에 도달하게 된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들과 영원히 세세토록 남아 그 빛을 발하는 것들 가운데 무엇을 따를 것인가? 6.우리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일시적이고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존재라면, 사라질 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더욱 지혜로워 보일 수는 있으나,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에 지금의 가치 판단은 더욱 중요하다. 7.무엇을 따르는가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증명해내는 판단의 기준이 된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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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선한목자교회 문요한 목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라!'
서울 성북구 선한목자교회 담임 문요한 목사.(사진제공=선한목자교회) (골로새서 3장)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우리도 같이 죽었고 예수님께서 살아날 때 우리도 같이 살아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당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계십시오. 하늘에 있기에 하늘의 것들을 찾고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하늘을 찾는 것이 쉬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풍성할 때 당신은 이땅에서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전부이십니다. 오직예수!!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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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 '선을 넘어야 하는 것!'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사진제공=제자순복음교회) 권투 시합을 할 때에 벨트 아래를 공격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관계에서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남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다툴 수는 있지만, 그때에도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상대의 치명적인 연약함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싸울 순 있지만, ‘그래 헤어지자.’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감정이 업셋되었다고 선을 넘은 말이 정당화 될 순 없다. 나중에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 때문에 없었던 상처로 할 순 없다. 선을 넘은 행동과 말로 인한 상처의 회복은 아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회복이 되었다 할지라도 상처의 흔적은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선을 넘지 말아야 할 말이나 행동에 조심하고 경계하고 또 주의해야만 한다. 반대로 꼭 선을 넘어야 하는 것이 있다. 두려움의 선, 의심의 선, 걱정과 염려의 선, 뭐 이런 선은 넘어야 한다. 성실하게 살면서 쌓은 명성과 자리와 권위를 한 순간에 잃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숨겨 왔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마침내 두려움의 선을 넘었다.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모시고 장례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냈다. 숨긴 자신의 신분이 드러낼 때 지금까지 쌓아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지만, 그 순간에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에게 모든 초점 집중되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사람과 상황과 자신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에 마음의 중심이 가면, 길과 진리와 생명의 예수님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희생과 대가를 예측하고 두려워 그 선을 넘을 수 없다. 그러나 먼저 예수님에게 시선을 집중하면 다른 모든 것보다 그분이 크게 보이고,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게 아웃포커싱 되어 흐려지니, 두려움의 선을 넘을 수 있다. 그 두려움의 선을 넘고 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 선을 넘는다. 그리고 뒤 돌아보지 않고 그 길을 간다. 그렇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두려움의 선을 넘어가니, 그 길을 따라 가는 이들이 하나, 둘, 점점 더 늘어나고 계속된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이 예수게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요 19:38~39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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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아브라함의 언약(2)'
킹덤빌더즈, L.A 글로리 교회 담임 전두승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아브라함의 언약'(2) 여호수아 1:13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신명기 3:20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같이 너희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리니” 이 안식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려고 하시는 일을 알면 안식한다. 차를 사려고 하면 어떤 차, 가격, 어디에 가서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사고 나면 그 차 사려고 한 생각이 끝이 난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목적, 목표, 궁극적 사명을 알지 못하면 안식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한 자는 안식한다. 히브리서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히브리서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신명기 25: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찌니라. 잊지 말찌니라. " 아말렉’은 ‘골짜기의 거주자’의 의미이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가 엘리바스에게 낳은 아들이다. 출애굽기 17:18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방해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행군 후미에 처진 유약자들을 기습 공격한 ‘꼬리를 치다’의 뜻이다. 우리 안의 참된 안식은 하나님의 약속, 영광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고, 우리 약점을 공격하는 아말렉을 도말한다. 계시록 12:3-6 여자가 아들을 낳는다.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다, 이기는 자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열방 추수자다. 사단의 권세를 물리칠 자다. 먼저 생각에서 사단을 몰아내야 한다. 그래야 참 안식이 있다. 마음에 할례 받을 때, 사단이 우리 생각 속에서 떨어진다. 베드로에게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 하셨다. 너는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고 나를 넘어지게 하는 것과 같다 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받고도 사단의 생각을 했다. 목사가 되고서도 사단의 일을 할 수 있다. 주를 사랑하고 주의 일을 하는 것같으나 생각이 완전히 구속되지 않으면 내가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은 사단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죄요, 무지다. 계시가 없어서이다. 마음의 할례로 육체를 벗지 못해서이다. 계속 마음의 할례를 받아 내 생각이 바꾸어질 때, 주님이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실 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안식하게 되는 것이다. 안식의 반대는 혼돈이다. 혼돈, 혼잡은 신비의 바벨론이다. 교회가 무엇을 해야 될 지 모를 때 혼잡, 신비의 바벨론에 홀려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 앞으로 올 일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마음의 할례를 받고 육체를 벗을 때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장래에 대해 알게 된다. 휘장이 젖혀졌기 때문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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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채플교회 이광형 목사, '믿음이 없다면 도움을 구하라!'
도곡동 드누보 문화선교센타 이광형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믿음이 없다면 도움을 구하라 (막 9:24) "제가 믿음이 부족합니다" 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내뱉는 말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실지로 스스로의 믿음이 연약하다고 생각하고 안타깝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을 동경하며 주변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을 존경하며 자신의 믿음도 그만큼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짐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성장은 결코 쉽지 않음을 이내 실감하고 오늘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 한 스스로의 믿음을 돌아보며 또 다시 믿음이 부족함을 반복해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고백은 반드시 믿음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단순히 넋두리를 늘어놓는 듯 한 이야기를 고백이라고 착각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믿음의 고백을 이렇게만 단정 짓는다면 솔직히 여기에 해당 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고백해야하는 순간에 또다시 자신의 믿음의 연약함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를 통해서 믿음의 고백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말씀하시고는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병든 아들과 주님 앞에 선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을 고쳐 달라는 자신의 간절한 바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간곡한 바램에는 스스로의 연약함이 깊이 묻혀 있었습니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막 9:22) 이 간절한 요구가 주님께 드리는 병든 아이 아버지의 간절한 고백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곧바로 이렇게 답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도와달라는 말은 스스로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먼저 솔직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자신의 단순히 넋두리에 불과한 이야기로 끝나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주님은 그의 이야기가 믿음의 고백으로 드려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어쩌면 제자들 역시 이것을 놓쳤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병든 아이를 향해서 자신들의 강한 믿음으로 선포를 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 했습니다. 그들은 불과 얼마 전에 주님께 파송을 받으며 놀라운 일을 행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해결하리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막 6:12-13) 그러나 그들이 과거 믿음의 경험으로 아이의 병을 고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주님은 이에 대하여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때 제자들이 가지고 있다고 여긴 확신은 믿음이 아닌 과거 경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강한 확신이라 여겼지만 그것은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그저 할 수 있으리라는 강한 자신감 뿐 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여기서 아이의 아버지가 쏟아놓은 이야기가 믿음의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나이다"라고 바꾸어 이야기해야 한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가 주님이 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못 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주님께는 불가능이란 없는것이 사실입니다. 주님은 아이 아버지의 이야기가 믿음의 고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깨닫게 하신 것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주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무엇인가 할 수 있으시거든" 이라는 넋두리를 늘어놓은 아이의 아버지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라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곧바로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주님을 이야기 한다면 어쩌면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너무도 급한 나머지 우선 인정하고 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그의 이야기가 더 이상 하소연이 아닌 믿음의 고백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입니다.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막 9:24) 그는 소리쳐 이야기 하기를 "주님은 모든것을 하실 수 있음을 내가 믿나이다" 가 아닙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것을 도와주소서" 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연약한 믿음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동시에 온전히 믿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일방적인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만 인정해 드리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저 반드시 아들이 나을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에 의한 의지와 확신도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확신을 잃지 않고 더 견고히 신뢰하기위하여 몸부림치는것과 같습니다. 믿음을 구하는 것은 전혀 없는것을 받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아 가지고 있지만 너무 연약하기에 굳건해지기를 원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말이냐?" 는 주님의 말씀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생각을 바꾸라는 의미이기 전에 이미 받고 가지고있는 믿음을 꺼내고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만일 아이의 아버지가 주님을 향한 믿음이 전혀 없었다면 그 자리에 있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말이냐?"는 주님의 말씀에 사과부터 드리고 주님이 하실 수 있다고 믿고 싶음을 이야기 하거나 만일 고쳐 주시면 오늘부터 믿겠다고 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에 자신의 믿음을 꺼내고 먼저 연약하지만 믿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 연약함을 강하고 담대하게 할 수 있기를 원하며 도와 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이처럼 믿음을 구하는 것은 단지 없는 믿음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이미 주셨기에 있습니다. 다만, 없어보이고 희미하게 보이며 연약해 보일 뿐 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믿음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것을 믿음의 고백으로 받으십니다. 또한 먼저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통해 능치 못 하심이 없으신 주님을 찬양 할 수 있습니다.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막 9:24)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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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성원교회 박충권 목사, '무슨 싸움을 싸우고 있나?'
평택 성원교회 담임 박충권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제목 : 여러분은 무슨 싸움을 싸우고 계십니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요8:51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집니다. 이것이 생명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이땅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다 행하셨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행함이 없다면 거짓 믿음입니다. 행할 사랑이 없다면 공허할 뿐입니다. 그래서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구원을 받았다고 여겨도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거짓 이단복음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기복 종교생활이 가장 큰 대적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사도행전 20:22 생명의 냄새가 나야 성도입니다. 생명의 냄새는 십자가에서만 납니다. 생명은 사나 죽으나 예수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는 길를 가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날마다 사순절이 되면 우리도 진정으로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목숨까지라도 주님께 맡기고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선한 싸움이요 천국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싸움을 싸우고 계십니까? 세상을 이긴 증거는 세상 끝까지 주의 죽으심만을 증거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다 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는 길을 선택합니다. 날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복음을 전하며 구제합니다. 사도바울께서는 그렇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사셨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조물로 사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권능을 받고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9:24 사도바울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면 로마에서 복음을 2년 동안이나 어찌 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새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야 합니다. 죽으러 가는 자들에게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있습니다. 세마포 옷이 입혀집니다. 믿음은 정확하고 정밀함로 진리입니다. 즉 온전히 회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온전히 변하는 것입니다. 어설픈 회개로는 거듭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를 먹고 마셔도 분별하지 못하고 세상 영광을 다 마셔버리고 맙니다. 회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완전한 새 부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져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새롭게 진짜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면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생명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켜내야 산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에 이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분부하신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라 사는것 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진짜 믿었으면 따라삽니다. 가짜 복으로 사시겠습니까? 기복신앙은 가짜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변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날마다 새벽을 깨워서 기도하시고 매일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성령님의 동행하심이 없이는 절대로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소유를 팔고 세상을 팔고 목숨도 팔아서 주님께 맡기고 밤낮으로 일하며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됩니다.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 우리도 이렇게 되어야 거듭난 성도입니다. 이 거듭난 구원의 축복을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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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열매맺는교회 이재식 목사, '성령을 선물로 주심!'
충주 열매맺는교회 담임 이재식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증인되라고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권능은 여러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권능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며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합니다. 성령의 권능은 한 번에 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며 각종 방언을 말하며 방언을 통역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성령을 선물로 주신 목적을 잊고 성령의 권능으로 자신을 증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신 은혜를 간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 안에 거해야 성령의 보호하심 아래 거하게 됩니다. 증인 된 삶을 살아야 성령을 선물로 주신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증인된 삶을 통해 성령을 선물로 주신 목적을 이루어 가길 기도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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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교회 정영구 목사, '듣지 못하는 사람!'
하나교회 정영구 담임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자기문제에 빠져 듣지 못하는 사람 예수님의 ‘친구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있던 무리 중에 한 사람이 형제에 관한 문제를 주님께 묻습니다. 뜬금없이 유산문제를 주님께 물었습니다. 억울한 형제들 사이의 유산문제를 주님께 판단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이 질문을 보면, 이미 유산은 형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은 장자에게 유산을 두 배 주게 되어 있습니다. 장자에게 두 배를 주는 이유는 그 집의 계대를 이어가서 법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게 하는 지혜’ 였습니다. 지금은 민법상 무조건 일대일로 유산을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유산은 대부분 농사를 짓는 땅이었기 때문에 그 땅을 장자에게 줌으로 그 집의 계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율법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랍비로 불리는 주님께 묻는 것은 아주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라고 단호하게 답변을 거부하십니다. 더구나 주님의 답변을 들어보면, 주님도 몹시 감정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친구의 관계가 아니라, 3자를 부르듯이 ‘이 사람아’하신 것도 그렇고 뒤에 ‘탐심을 물리치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왜 주님은 화가 난 듯 답변하셨을까요? 12장 1절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4절에 제자들을 ‘내 친구들’이라고 부르시면서 친구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제의 관계, 형제간의 불화를 판단해달라는 질문을 받은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해 가르치시는 내용이었지만 분명하게 무리들도 함께 그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이 ‘자기문제’입니다. 그것도 주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질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이 사람에게는 다른 문제가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주님을 친구로 인정하고 시인하고 믿으라고? 자기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자기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것은 ‘형’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돈’이라는 물질입니다. 돈이 그 사람의 마음과 머리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듣고도, 생명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에 대한 관심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형과의 사이에 있는 물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주님께 판단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 누가복음 12장 13-21절, 잠언 14장 20-32절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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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성서침례교회 정환석 목사, '기분이 아니고 증거다!'
정다운성서침례교회 정환석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기분이 아니고 증거다 (대상 29: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1. 솔로몬과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정상적일 때의 모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있습니다.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게 드렸을 뿐입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2. 여러분도 이런 때가 있습니다. 드려도 더 드려도 섬기고 더 섬겨도 허나 화장실에 갈 때와 나올 때는 전혀 다릅니다. 긴박하고 급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처음에는 좋았다가 점점 더 좋아질수도 있고 점점 더 악화되어 상처를 남기고 돌아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3. 제 경험에 의하면 누가 주인인가에 따라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인색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자기의 의를 내세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하고 아까와서 벌벌 떨수도 있습니다. 4. 그러므로 수시로 마음을 정검합니다. 자동차가 이상이 있으면 정비소에 가듯 마음의 주인이 누군지 알쏭달쏭할 때는 정비합니다. 정비는 기본 고백을 근거로 합니다. 정비 도구는 회개와 굴복입니다. 5. “내가 주인 된 죄(예수 믿지 않은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되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의 구주와 주님이십니다” 정비 마무리 됐으면 찬양하면서 출발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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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싱톤중앙장로교회 정지운 목사, '새힘을 주신다!'
오륜교회 교육국장 정지운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출애굽기 3장 1-12절 하나님의 응답이 늦어질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힘이 빠져야 한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더 큰 힘이 있어야 하나님이 쓰실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힘을 다 빼게 하신 다음에 부르신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그러실까? 내 힘이 빠져야 새힘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모세는 사실 퇴물 중에 퇴물이다. 더이상 쓸모 없어 보이는 떨기나무 사람이 바로 모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를 쓰시지 않는다. 완전히 모세의 힘을 빼고 나서 모세를 부르신다.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결국 모세에게 필요한 건 모세 자신의 자체 발광하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새힘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힘을 전제하지 않으면 모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붙들어주시면 모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힘이 있을 때 나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내 힘이 다 빠지고 나서 오직 내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할 때 부르신다. 미국에 와서 40대 중반의 나에게 새로운 힘을 부어주시는 것들을 보게 된다. 청년 만큼의 에너지는 아니지만 모든 일이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새 힘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내 힘을 빼고 하나님이 만드신 새힘을 부어주길 원하신다. 그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오직 기도이다. 내가 만들어낸 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사는 것은 기도밖에 없다. 늦은 저녁 순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니 하루를 알차게 보낸 것 같아 너무나 행복하다. 부디 오늘 하루 내 힘이 빠져야 새힘을 주시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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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연단의 시간!'
킹덤빌더즈, L.A 글로리 교회 담임 전두승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마태복음 3:11에 나타난 정결케 하는 불로 세례를 받은 자는 횃불군대로서 주님의 정결한 신부의 군대를 일으킨다. 불은 지속적으로 태우는 것이다. 찌꺼기가 다 없어지고 재가 되기까지이다. 모든 악을 떠나야만 한다. 완전 굴복과 완전 정결이 이루어지기 까지이다. 말라기 3: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며 깨끗케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며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불세례 후에도 계속 뜨겁게 하는 것은 단지 교회 부흥, 은사와 능력 차원만이 아니다. 교회의 정화와 회복은 주님의 군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위한 ‘Firebrand-횃불 군대,’ 불 브렌드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거룩함의 횃불이다. 그래서 800도의 불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하더라도, 다시 1,200도의 더 뜨거운 불에 넣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불순한 찌꺼기를 다 제거하여 순금같이, 정금같이 나오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레위인을 깨끗케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로운 제물이 되게 하려 함이다. 스가랴서 13: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며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정결의 불, 부흥의 불을 던지는 사자가 되게 하려 함이다.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려 함이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 40:3-4). 그들은 용사의 군대요, 이기는 자의 군대이다. 요엘서 2:1-1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그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들의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가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초개를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항오를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애졌도다 그들이 용사같이 달리며 무사같이 성을 더위잡고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되 그 항오를 어기지 아니하며 피차에 부딪히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며 병기를 충돌하고 나아가나 상치 아니하며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더위잡고 오르며 도적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므로 연단의 시간은 힘을 기르는 시간이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힘을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모든 꿈과 약속은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것까지 주실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은 1.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함이다. 2.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다. 3. 행실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깨끗하게 하려 함이다. 4. 성품을 빚으려 함이다. 이를 위해 불세례 받은 자를 'Firebrand-횃불’로 만드신다. 불을 밝히고 불을 전달하는 불꽃의 사역자다. 도시와 열방에 불을 전달하는 신부의 군대를 일으킨다. 셀조직처럼 일어나고 홱폭탄과 같이 터질 것이다. 의로움의 횃불, 거룩함의 횃불, 진리의 횃불, 부흥의 횃불, 하나님 나라의 횃불이다. 이기는 천사의 군대이다. 계시록 6: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백마를 탄 정결한 군대이다. 계시록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리라.” 불세례의 목적은 1. 말씀의 검, 성령의 검을 예리하게, 강하게(다이아몬드), 빛나게(광채-하나님의 영광의 빛) 하려 함이다. 2. 병고침이나 능력을 넘어서서 정결함과 거룩함을 위한 것이다. 3. 불꽃이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함이다. 4. 횃불이 되어 불을 세상에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주님의 신부의 군대를 일으키기 위함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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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성령강림이 가져온 변화'
스위스한인교회 담임 김정효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성령강림이 가져온 변화(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사도행전 2:1-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8)“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들을 3년간이나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던 예수님이 그렇게 무력하게 십자가형에 처해지시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한없이 허망해했고,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왜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유월절>부터 <성령강림의 역사>가 이루어진 <오순절>까지의 50일간은 그들에게 너무도 견디기 힘든 혼돈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함께 모여 기도하던 그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성령으로 거듭난 그들에게 주님의 삶과 사역,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에 이끌림을 받게 된 그들은 담대히 주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즉 온 이스라엘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얻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니,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2:36-41)“ 그렇다면 성령강림이 주의제자들에게 가져다준 변화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 <제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8:1-2).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제자들은 그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무리들에게 붙들려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시고 그토록 허망하게 십자가형에 처해지심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고 생각했기에, 극심한 심적 혼돈과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을 때, 그들은 <성령의 계시>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에서의 부활>은 인류가 주 안에서 <영원한 새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며, 주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구원의 원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6: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3-2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1-2)“ 2. <제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1) <제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신령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한복음 3:5-8)“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2) <제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새로운 신분>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에베소서 5:8-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3) <제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드로후서 1:3-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 3:16-17)“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2:12-14)“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9-11)“ 3. <제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천국의 환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6-47)“ <제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대한 <영적 환희>를 <체험>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비겁함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고,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서도 기뻐할 수 있었으며, 어떤 환경에 처하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사도행전 5:33-35)“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사도행전 5:39-42)“ 4. <제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이적(異蹟)>을 행했습니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 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 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도행전 5:12-16)“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美門)이라 하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 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사도행전 3:1-10)“ 5. <제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강하고 담대한 <복음의 증인>이 되어졌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3:13-16)“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언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5-12)“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사도행전 4:17-21)“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사도행전 4:4)“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려면 사도들처럼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믿음의 기도>로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받게 되어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요 <부흥 설교가>인 <무디(Dwight Moody1837. 2. 5.-1899. 12. 22)> 는 <성령>을 사모하여 <기도의 씨름>을 많이 했는데, 그가 어찌나 간절히 <성령>을 사모했던지 ‚내가 성령을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고 생각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 역사상 최대의 화재인 1871년 10월의 <시카고 대화재>가 일어났고, 이 <대 화재>로 그가 담임하고 있던 <일리노이스트리트 교회 (Illinois Street Church)>의 건물과, 사택과, 그의 전 재산이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간절히 <성령>을 사모하였고, 더욱 간절히 <기도의 씨름>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가 그토록 간절히 소원했던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가 <성령충만>의 은혜를 체험했던 그날, 그는 홀로 뉴욕의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때 일을 회고하며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성령의 강력한 능력에 휩싸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당신의 손을 멈추어 달라고 간청해야 할 정도로 강력한 그분의 사랑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기에, 그 하나님의 손길이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지 말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같은 성령충만의 은혜를 체험한 후, 나의 설교는 전과 거의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능력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온 세상을 다 준다 할지라도 나는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가 <회심(回心)> 후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한지 꼭 16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성령충만>의 은혜를 체험한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성령의 은혜>에 <도취>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설교의 내용이나 방식이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그의 설교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떼를 지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성령의 능력>으로 위대한 <기독교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은 <성령>으로 <새 사람> 된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인 예루살렘 초대교회 교인들의 기쁨과, 감격과, <신앙의 열정>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6-47)“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아멘! >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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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교회 정영구 목사, '주님의 친구'
하나교회 정영구 담임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주님의 친구 친구는 함께 마음으로 칭찬하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잠언 27장 21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칭찬은 일반적인 칭찬과 다릅니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한다는 것은 칭찬이 은을 만드는 불을 담고 있는 도가니이고, 금을 만드는 불의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도가니는 화덕이고 용광로입니다. 풀무는 불의 세기를 더하기 위해 바람을 불어 넣는 도구입니다. 그것이 칭찬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칭찬은 일반적으로 장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더 성장하고,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때 힘들고 어려운 과정에서 격려하고 지지하고 끝까지 응원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친구는 성령께서 하시듯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관계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최고의 친구의 관계는 기도하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칭찬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교하고 경쟁하는 관계에서의 칭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지지하고 격려하는데, 믿어주고, 신뢰하고, 존중하며 우리를 인격적으로 도와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누군가의 기도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주님의 친구가 되어 기도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기도로 주님의 친구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빛으로 오신 영입니다. 돕는 자로 오신 영입니다. 성령을 거절하지 말고 성령의 사람으로 주님의 친구로 행동하고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친구는 당당합니다. 주님의 친구는 진실합니다. 주님의 친구는 존중합니다. 주님의 친구로 세상을 이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눅 12:1~12, 잠 27:17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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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제일교회 2부 담임 이정만 목사, '그리스도인의 폭력성에 대하여'
서울제일교회 2부 담임 이정만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그리스도인의 폭력성에 대하여 1 세기 성서시대를 마감하고 2 세기부터 출발하여 종교개혁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수 사역과 메시지가 신학 중심에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 성서신학이라는 별도 분야가 발생했습니다. 칼 바르트(1886-1968)는 교회교의학이라는 기념비적 저술을 남겼습니다. 1 권 창조론에서 성부하나님을 조금 저술하고 12 권 전체가 예수에 관한 신학입니다. 그는 예수에 관한 기독론을 통해 화해신학을 세웠습니다. 그는 예수를 화해자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성령론은 쓰지 못하고 작고했습니다. 한국 주류 신학계와 교회는 바르트 신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그 이유가 황당합니다. 바르트가 성부 하나님보다 예수를 너무 많이 말했다는 겁니다. 예수교에서 예수 많이 말한 게 결격 사유라고 합니다. 2 세기 신학이 출발하면서 예수 사역과 메시지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땅의 하나님나라가 실종되고 그에 따라서 삼위일체 신론의 중요성이 망각된 현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못하는 한국교회는 예수를 많이 말하는 게 결격 사유가 됩니다. 결국 예수 사역과 메시지가 그리스도인 믿음 중심이 되지 못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선과 악 정결과 부정의 경계를 허물고 화해와 평화 세계를 여시었습니다. 선과 악을 경계지어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에서 낙오한 실패자들 병든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기득 세력에 강력하게 저항하십니다. 2 세기에 출발한 신학은 예수 사역과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예수께서 어떻게 신인가와 하나님이 세계를 어떻게 통치하시는가를 설명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유대교 하나님이 그리스 철학 옷을 입고 기독교에 니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폭력성은 예수께서 기독교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 신이 기독교 하나님이 된 까닭에서 발생했습니다. 기독교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실은 지배와 폭력에 대한 종식 선언입니다. 인류에게 최초로 선과 악을 생각하게 한 사람은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입니다. 그는 BC 2천 년대 아리안계인 인도 이란에 공유되었던 종교를 개혁한 사람입니다. 동물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드리는 제사가 악임을 선언하고 인간에게 선과 악이 있음을 설교했습니다. 그는 사제를 비롯한 기득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조로아스터교가 탄생했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아후라마즈다라는 유일신과 그의 쌍둥이 아들인 선한 영 스펜타마잉유와 악한 영 앙그라마잉유의 대결을 통해 이 신들이 세계를 지배합니다. 조로아스터는 악한 자들에 대한 벌과 선한 자들에 대한 보상에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1) 이 사상은 플라톤의 천상이 본질(이데아)이고 땅이 가짜(그림자)라는 이원론과 결합하여 악을 물리치고 선한 사람이 되어 신에게로 가는 것이 구원인 신플라톤주의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신플라톤주의 사상이 아우구스타누스에 의해 기독교 신학으로 정립되고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예수께서는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물고 악을 포용함으로써 해결하는데 악을 무찔러 없에는 조로아스터 사상이 기독교 신학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기독교가 폭력 종교가 된 원인입니다. 인류 정신사가 18 세기 계몽주의 19 세기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이성으로 고양된 세계인들에게 기독교를 변증해야 했습니다. 이때 태동한 신학이 사회인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존엄을 찾으려는 자유주의 신학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실존주의 신학입니다. 이들은 성서가 1 세기 당시 사람들 삶의 정황에서 기록되었음을 인식했습니다. 즉 성서가 그시대 과학 수준과 역사 인식 문학 형태로 씌여졌슴을 인식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실존주의 신학자들은 자기 시대 삶의 고백을 위하여 성서를 비평했습니다. 이로인해 성서를 문헌 비평과 언어 비평 역사 실증주의 등을 통해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실패가 예견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가 복음이 아니라 예수 가르침이 복음입니다. 하르낙은 「기독교 본질」에서 예수 가르침이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도덕 신학과 유사한 길 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가치를 이땅에 구현하거나 예수 가르침을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이 기독교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게 이상하게 들릴텐데요 현재 그리스도인 믿음이 바리새인 믿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 가르침을 몰라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고수하면 그 말씀이 법이 됩니다. 말씀을 순종한다는 믿음은 법을 순종하는 유대인 믿음과 같습니다. 기독교 믿음은 사랑을 기준으로 그 법을 해석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사랑은 법의 마침이요(로마13:8) 사랑은 법의 완성이다(로마13:10) 라는 바울 진술의 의미입니다. 바르트는 성서 문자가 말씀이 아니고 그 문자가 성령을 통해 나를 감동시킬 때 말씀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진술과 같습니다.(고후3:6) 유대인들처럼 말씀에 순종을 목표하여 살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게 되고 역시 기득 세력이 그러한 것처럼 차별과 배제 소외가 일어나고 폭력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위대한 지혜자가 됩니다.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이 뻐진 함정입니다. 말씀을 순종하여 살면 폭력이 발생하고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살면 폭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사는 것과 사랑으로 사는 것은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훌륭한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서 분투 노력하는 꼴 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 예수께서 가장 싫어한 바리새인 믿음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정말 없습니다. 기독교가 분열되어 갈등 폭력 불화를 일으키는 현실이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를 신앙하고 그분의 사역과 가르침에 의해 삶의 변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의를 버리는 믿음이 바리새인 믿음을 벗어나는 길 입니다. 예수에게 가장 가까이 간 자유주의 신학조차도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 의를 따라 사는 기독교 중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냥 사랑하며 삽니다(요한6:28-29) 이것이 자기 의를 버리고 평화로 가는 길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의를 버릴 때만이 갈등과 폭력 불화가 종식됩니다. 당시 독일 주류 신학인 자유주의 신학은 결국 히틀러를 지지하게 됩니다. 자기 의를 찾는 믿음이 빠진 함정입니다. 칼 바르트는 자신의 스승들이기도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히틀러를 지지하는 데 실망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떠나서 신정통주의 신학을 세웁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에게 신정통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자유주의 신학보다 더 악질이고 폭력인 믿음 형태를 살펴봅니다. 자유주의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미국에 근본주의 신학이 태동합니다. 미국 근본주의는 1920 년 딕슨, 루벤토리, 윌리엄 라일리가 세계기독교근본주의협회(Worlds christian fundmentals association)를 창립함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근본주의자 대부분은 칼뱅주의자들입니다.(2) 지금은 근본주의라는 용어 대신에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 주장하는 바는 같습니다. 이들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성서 무오설 즉 성서 비평을 거부하고 문자 그대로 믿을 것을 주장합니다. 문자주의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2. 예수 신성을 강조하고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죽으심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사역과 메시지 즉 역사성은 거론하지 않습니다. 3. 예수그리스도 부활과 승천 그리고 심판을 위한 재림을 강조합니다. 4. 사탄과 비그리스도인 멸망을 주장합니다. 악을 물리칠 대상으로서 공격하고 선을 숭상합니다. 예수의 원수 사랑은 사실상 폐기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와 사실상 같습니다. 5. 믿는 자들 부활과 하늘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강조합니다.(3) 이들은 땅에서 삶의 구원이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사역과 가르침을 알아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나라 신학이 실종 상태이고 따라서 삼위일체 신론 중요성이 망각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역사 예수는 없고 아버지 하나님 신앙이 중심입니다. 칼뱅이 그러했습니다. 우리의 주제인 그리스도인 폭력성애 관해서 우리는 3 번과 4 번을 주목합니다. 근본주의를 담은 복음주의 신학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고 그분은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요한316-17)는 성서 말씀은 외면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주의 깊게 관찰하면 목사들이 독생자 예수께서 오셨다는 3 장 16 절만 읽고 예수께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요한복음 3 장 17 절은 읽지 않는 관행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주의가 신학 제목은 복음(기쁜소식)이지만 복음이 아니라 무시무시합니다. 카렌 암스트롱은 「신을 위한 변론」에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근본주의 연구한 결과를 말합니다. 그녀는 근본주의는 깊은 두려움에서 발생했다고 합니다. 사랑을 체험해 보지 못한 신앙 형태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근대 신학인 자유주의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을 경험하지 못해서 그 신학을 평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미국 따라서 비난만 합니다. 미국과 같은편이라 든든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 태극기 부대가 미국 성조기 들고 나오는 이유입니다. 한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을 비난하는 근본주의 신학이 여과 없이 유입되어 폐쇄성 편협성과 폭력성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복음주의(근본주의)는 예수께서 전하는 하늘 계시와 세속 가치를 구분하는 태도가 없습니다. 그들은 종교 광신 속에 들어있는 정치 주장을 펴기도 하고 자본주의 논리를 믿음에 결합합니다.(4) 이들로부터 예수와는 정반대인 번영신학이 태동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복음주의(근본주의)는 폭력적이고 전투적 믿음입니다. 근본주의가 신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성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신의 사랑을 무엇이든지 결과를 얻으려는 결정주의 믿음으로 이해하려는 의도와 한편으로는 신의 사랑을 실천 덕목으로 축소하려는 의도입니다. 근본주의는 신의 사랑이 무한하고 산정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신앙 실패입니다.(5) 필자는 근본주의 연구소 소장 목사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모두 몰아내고 그곳에 교회를 세우면 하나님나라가 완성된다고 합니다. 미국이 주도하면 할 수 있다고 설교합니다. 선을 위해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설교입니다. 신성로마 제국 이전까지는 교회가 제국의 폭력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교회가 직접 폭력 행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샤를마뉴(747 - 814)는 그의 신성로마 제국 확장을 위해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십자군 전쟁 유대인 대량학살 종교재판 마녀사냥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노예사냥과 노예무역 서구세계의 식민지 개척을 위한 약탈 길이 열렸습니다.(6)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예배 마친후에 목사와 교인들이 무장하고 인디언 사냥을 나갔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피안 구원을 위해 오늘날까지 폭력을 서슴치 않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설명했다는 가톨릭 성인 끌레르보의 베르나르(1090 - 1153)도 이슬람을 격멸하기 위해 십자군 모병하는 격문을 썼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이슬람 5 억 명을 격멸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지 말고 그들을 악의 축이라 호칭하지 말고 의롭다고 칭의 함으로써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어린이는 누구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낍니다. 인간은 함께가 편안한 정서라는 말 입니다. 근본주의(복음주의) 종교 광기는 이러한 편안함이 없습니다. 근본주의는 불굴의 신념을 전해야 한다는 것 선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없애버려야 한다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리차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기독교 폭력성을 이유로 기독교가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주장하지만 니체는 자신이 기독교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주장합니다.(7) 기독교가 자신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뜻 입니다. 니체는 루터가 삶의 의지를 부정하고 도덕을 부활시켰다고 평가합니다.(8) 루터는 예수께서 제시한 하늘 계시를 통해 가치관 변화로서 일어나는 새로운 삶에 대해 알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하나님나라 신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운 그리스 도덕이 하늘 계시를 물리치고 기독교 신학이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기독교는 오늘날까지 성서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 의를 따르는 길을 가지 못합니다. 도덕과 경건 그리고 말씀 순종은 자기 의 입니다. 니체는 선한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유해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인간은 진리를 훼손하고 미래를 훼손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9) 도덕과 경건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항상 공격할 대상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남과 비교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도덕 경건은 스스로 자기를 이념에 구속함으로서 불안합니다. 자유 없는 불안은 항상 공격할 대상을 찾습니다. 선善이 순결이 아니라 선과 악을 비교하지 않는 상태가 순결이고 이 상태가 자유의 가능성입니다.(10) 라깡은 아버지 하나님 신앙만을 강조하면 덩달아 선이 강조되어서 세상 향유享有enjoy를 막는 믿음이 된다고 합니다.(11) 교조주의자들의 확신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 입니다.(12) 진정한 승리란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 패한자를 기쁘게 하는 것 입니다.(13) 구약학자 폰 라드는 고대인들이 성스러움을 보호하기 위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스러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피한다고 합니다. 즉 성스러움은 언제나 그 안에 폭력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에 대해 존중을 넘어서 성스러움으로 상징화하면 그로 인해 폭력이 발생합니다. 명망있는 학자도 성서 비평학자를 공개석상에서 성서를 비평한다고 이름을 거론하며 비난하는 폭력을 서슴치 않습니다. 자기는 성서를 성스럽게 대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세상 종교로부터나 세속에서 기독교로 들어온다는 것은 폭력적인 성스러움으로부터 사랑으로 이동하는 행위입니다.(14) 우리는 진리에 사로잡혀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 예술을 가지고 있습니다.(15) 문화는 신의 세속적 다른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난폭한 이성을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16) 인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과학 만능 시대를 거치면서 이성의 폐쇄성과 편협성을 경험했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은 신의 세속화입니다. 종교는 세속화를 통해 폐쇄성과 경직성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문화는 타락을 막기 위하여 종교를 입고 종교는 폭력을 막기 위해 문화를 입습니다.(폴 틸리히) 신이 땅으로 오심은 폭력과 갈등을 끝내는 평화를 위해서 입니다.(누가2:14) 1 세기 예루살렘은 폭력과 갈등이 난무하는 불화 세계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 파멸을 예견하시고 우십니다. 그들이 평화 길을 모르는데 그 이유는 보살핌받는 날을 몰라서 입니다. 보살핌받는으로 번역된 말은 에피스코페인데 방문visit입니다. 즉 신이 오심이고 하나님나라 시작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유대인들이 평화 길을 모르는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상대를 의롭다고 칭의함이(의롭지 않지만 의롭다고 호칭함) 평화로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로마5:1) 로마서 중심은 의롭지 않은 우리를 하나님이 우리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하셨으니 너희도 서로 의롭다하여 화해하고 평화하라 입니다. 이러한 칭의가 하나님나라 입니다.(케제만) 하나님나라는 가난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성소수자 장애인 등 부정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사회에서 낙오한 사람들 부모 도움 없이 사회에 나와서 두려워하는 청년들 자립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들 노후 준비 없이 늙어가는 노인들 이주 노동자들 코로나 전염병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의롭다고 호칭하여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하며 그들의 존엄을 존중하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나라가 실현되어 갈 때 갈등과 폭력이 종식되고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다음회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올리면서 19 개월 간의 글쓰기를 모두 마칩니다. 1. 미르치어 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1 이용주 이학사 2005, 460-468p 2. 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론 정준형 웅진자식하우스 2016, 412-421p 3. 최대광외 종교근본주의 「기독교근본주의 정의와 미국과 한국의 근본주의」모시는 사람들 2011, 56p 4. 위르겐 하버마스 지오반나 보리도리 테러시대의 철학 손철성외 문학과 지성사 2004, 59-90p 5. J D 카푸토 종교에 대하여 최생열 동문선 2003, 131-132p 6. 존 캅 영적인 파산 박만 한국기독교연구소 2014, 81p 7. 프리드리히 니체 이사람을 보라 이상엽 지식을 만드는 사람들 2016, 25p 8. 같은 책, 159p 9. 같은 책, 175p 10. 쇠얀 키르케고어 불안의 개념 임춘갑 치우 2011, 76 - 77 93p 11. 케네스 레이너드 에릭 L 샌트너 슬라보예 지젝 이웃 정옥현 도서출판 b 2010, 74p 12.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 강영계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78p 13. 같은 책, 134p 14. 정일권 십자가의 인류학 대장간 2015, 139p 15. F W 니체 M 하이데거 니체의 신은 죽었다 강윤철 스타북스 2011, 264p 16.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조은경 알마출판사 2017, 102p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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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복음선교회 대표 김정수 목사, '환난의 절정'
원형복음선교회 대표 김정수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요한계시록 / 13:1-18 환란의 절정: 바다와 땅에서 나온 짐승의 시대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 자연의 재난이 극대화되면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지고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세계의 통치자로 등장합니다. 또 땅에서 나온 짐승으로 상징되는 세계 종교의 지배자가 세계 통치자의 조력자로 등장합니다. 그 환란의 절정을 향하면서 땅에서 나온 짐승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우상을 세우고 그 우상에게 절하게 강요합니다. 또 오른손이나 이마에 666표를 받지 않으면 아무도 매매를 못하게 합니다. 그때가 오면 거듭난 의인들은 감당 못할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처럼, 적은 능력으로도 진리의 복음을 지킨 의인들에게 시험의 때를 면하게 지켜 주십니다.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 24:22). 그러므로 우리 의인들은 환란의 때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하루하루를 진리의 복음을 충성되게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Interpretation on Revelation #14 / Rev 13:1-18 The climax of the tribulation: the age of two beasts from the sea and the earth “He was granted power to give breath to the image of the beast, that the image of the beast should both speak and cause as many as would not worship the image of the beast to be killed” (Rev 13:15). As natural disasters are magnified, the beast from the sea emerges as the mighty ruler of the world. Also, the ruler of the world religions, symbolized by the beast from the earth, appears as an assistant to the king of the world. As we approach the climax of the tribulations, the beast from the earth sets up the image of the beast that came out of the sea and forces us to bow down to that image. Also, if we do not receive 666 votes on our right hand or forehead, we will not be able to buy or sell. When that time comes, the righteous who have been born again will face tremendous difficulties beyond expression. That is when the patience and faith of the saints are needed. However, the Lord protects the righteous, who kept the Gospel of truth with little power, from the times of temptation, just like the promise given to the saints of the Philadelphian Church. “And unless those days were shortened, no flesh would be saved; but for the elect's sake those days will be shortened” (Mat 24:22). Therefore, we, the righteous, should not be afraid of the time of tribulations. Instead, we should faithfully preach the Gospel of truth now, day by day.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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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예수사랑교회 이성웅 목사, '기다림'
워싱턴 예수사랑교회 이성웅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기다림 몇 달 전 이사한 저희 집 앞 작은 마당에 꽃이 피었습니다. 몇 주전부터 작은 꽃봉오리가 생겼는데 이제야 이쁜 꽃을 이렇게 피웠습니다. 저는 어떤 꽃이 필지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내일은 필까? 또 기다렸습니다. 오늘은 피겠지? 또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야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 신비와 아름다움을 셀폰으로 담아보았습니다. 꽃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힌 후 오랜 기다림 속에서 핀 아름다운 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놀라운 것은 저 작은 꽃봉오리 안에서 저렇게 많은 꽃잎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니 아름다운 꽃이 피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선하심 안에서 기다림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내일은, 내년은……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요셉도 오랜 시간을 기다립니다. 모세는 40년을 기다립니다. 다윗도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때로는 힘들 때가 있습니다. 지루할 때도 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다림의 시간은 아름다운 인격의 꽃을 피우는 성숙의 시간이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5).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닮아가는 시간이요,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시간이요, 영원한 영광이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2~4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까? 힘들고 지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부재의 고통을 느끼고 계십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붙들고 계시고, 우리를 교훈하고 계시고, 장차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를 영접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실 선한 뜻과 산 소망 가운데 오히려 감사함으로 기대하며 인내하시는 은혜가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소망 가운데 용기와 힘을 얻기를 간구합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4~15. 기다림의 속에서 그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영원하신 주님을 바라봄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다시 오실 우리 주님과 주님 안에서 영원한 가족된 여러분으로 인해 행복한 목사 드립니다. jso848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