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목신학원 조태성 교수.(사진제공=새생명교회) * 성령님과 성향 차이 1. 사람마다 성향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본성적인 성향 차이가 있듯이요. 성향 차이에 따라 상황 대처 방법이나 해결 선호 방식도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령 어딘가로 이동할 때도 성향에 따라 다릅니다. 걸리는 시간에 우선순위를 두는 성향은 교통비가 추가 되어도 빨리 도착하고자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시간이 금이니 빨리 가는 게 유익하다.> 2. 비용에 우선순위를 두는 성향은 좀 늦더라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교통비가 최대한 적게 드는 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돈이 어디서 뚝 떨어지나. 아껴야 잘 살지.> 인격적이신 분들은 잘 아시듯이 이런 것들은 성향의 차이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성향이 다른 것이지 상대방이 틀린 것이 결코 아닙니다. 혹시 상대방의 선택이 내 생각에 부족해보여도 존중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3. 그럼에도 저는 비용이 조금 더 발생하는 정도라면 시간을 아끼는 선택을 합니다. 시간을 아끼는 방법도 여러 가지 일텐데요. 시간과 비용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그중에서도 몸의 피곤함을 최대한 느끼지 않을 방법을 찾습니다. 가령 울산에서 부흥회 초청받아 이동할 때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야 합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고속버스도 좋으나 제가 체감하기에는 KTX기차가 좀 더 편하고 빨리 이동하는 방법이기에 선택합니다. 4. 저희 부부도 성향 차이가 있는데요. 비슷한 부분도 있습니다. 가령 손님을 접대할 때 집으로 초대해서 음식을 요리하여 접대하는 것은 선호하지 않습니다. 장을 보고 요리 하느라 스트레스 받고 에너지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니 밖에서 만나든가, 초대해도 맛있는 음식을 주문해드립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보다 젊은 부부인데도 손님을 초대하여 직접 요리해서 대접하는 걸 즐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 중 흔치 않은 경우이긴 하지만 참 대단해보입니다. 5. 그러나 적어도 저 자신은 더이상 성향의 문제로 지금까지 선호하던 방식으로, 습관적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나서 부터입니다. 남들과 제 성향이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님 보시기에 제가 변화되기를 추천하시는 경우가 있으십니다. 제 영혼의 성장, 내면의 성숙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제게 유익이며, 하나님 나라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의 제가 행복을 누리게 되더라고요. 6. 그래서 이제는 제 성향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성향이 앞서고자 할 때가 있지만 성령님을 언제나 앞세우고자 노력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동할 때도 빠르게 편히 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때로는 조금 불편해도 비용을 조금 아끼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은 성경대로 마음의 평안함으로 다가오며 지속적인 거룩한 소원, 감동이 있을 경우입니다.) 7. 더 나아가 아주 중요한 원리를 계속 배웁니다. 성령님의 사람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성령님의 친구들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요.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요. 그런 삶을 살아내도록 성령님께서는 그분의 가장 위대한 사역이신 예수님을 더욱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보지 못했으나 주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 은혜를 받고 누린만큼 자기 성향을 주장하지 않게 되어집니다. 은혜로 자기 부인이 되어집니다. 은혜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8. 억지로 그런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힘들고 불편해도 그런 삶이 영혼의 행복함을 선사하기에 스스로 기쁘게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영혼의 행복을 맛보시고 누리시는 믿음의 선배님들을 이곳에서 이렇게 뵙고 소통하며 교제 나눌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jso8485@naver.com
충신교회 전 담임 박종일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ἀκούσας δὲ ὁ Ἡρῴδης ἔλεγεν· ὃν ἐγὼ ἀπεκεφάλισα Ἰωάννην, οὗτος ἠγέρθη. (Mar 6:16 BGT) But when Herod heard of it, he kept saying, "John, whom I beheaded, has risen!" (Mar 6:16 NAS)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Mar 6:16 NKR) 예수님의 사역과 제자들의 전도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세상 속에 드러나자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헤롯 왕이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 왕은 헤롯대제(Herod the Great)와 부인 말타스(Malthace) 사이에 태어난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입니다. 헤롯 대제 사후 헤롯 대제의 영토는 자녀들에게 분배되었는데, 헤롯 아니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한 나라의 1/4 영주)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신분을 얻지 못한 군주였는데 로마의 칼리굴라(Galigula) 황제 시절에 로마로부터 왕의 신분을 얻으려 하다가 실패하여 A. D. 39년에 실각하였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그를 여전히 헤롯 왕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당시 관습 상 헤롯은 왕으로 불리운 것 같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이런 능력을 행하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명으로 세례 요한을 죽였지만, 요한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가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살았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그의 생각이 너무 확고했기 때문에 측근의 신하들이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합니다.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고 합니다' 하며 그의 생각을 바꾸려 해도 전혀 바뀌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헤롯은 오히려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고 하며 큰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헤롯의 가문은 근친상간으로 족보가 뒤엉킨 가문이었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헤로디아는 헤롯 대제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아리스토볼로스(Aristobolos)의 딸로서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빌립 1세(Herod Philip)의 아내 였으나 그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형제이자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와 재혼하였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지도자의 범죄를 보고 과거의 예언자들처럼 단호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즉 다윗 왕의 간음에 대해 나단이 비판하였던 것처럼(삼하 12:1-15) 또 지도자들의 죄악을 무섭게 비판했던 엘리야처럼(왕상18:1-15 ; 21:17-29 ; 왕하 1:1-16 ; 대하 21:12-15) 세례 요한 역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실로 세례 요한은 불의에 대해서는 권력의 힘도 개의치 않고 직언(直言)과 비판을 서슴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소명 의식에서 발동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1:3). 한 나라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자들의 성범죄가 온 나라를 흔들고 있는 현 시국에도 꿀먹은 벙어리 모양 입을 닫고 있는 한국기독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행동에 대한 헤롯의 첫 반응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헤롯의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라 헤로디아의 마음을 얻기 위한 조치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하기도"(6:20) 하였던 것입니다. 정작 요한에 대해 살의를 품고 있었던 사람은 헤로디아였습니다. 헤로디아는 일개 선지자가 왕족인 자신과 헤롯 왕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느꼈습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알고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둔 것은 헤로디아의 살해 공작에서 그를 보호하기 위한 일단의 조치였을 수도 있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이기 위한 간계를 꾸몄고, 그 계획은 헤롯의 생일 날 헤로디아의 딸을 통해 실행되었습니다. 왕의 생일 날 헤로디아의 딸은 춤을 추어 왕과 잔치에 함여한 자들을 즐겁게 하였고,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왕의 말에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상으로 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이 뜻 밖의 요구에 왕과 온 좌중은 크게 놀라고 당황했지만 왕은 자기가 맹세한 것과 동석한 자들을 의식하여 요구를 받아들이고, 시위대 한 명을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베어다 소녀에게 줍니다. 이 모든 것은 요한을 원수로 여겼던 헤로디아의 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세상에 메시야의 오심을 알렸던 세례 요한의 30여 년 짧은 생은 그렇게 마치게 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와서 요한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린 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 선언했던 하나님의 사람 요한. 그는 그의 사명을 완수한 후 한줄기 바람처럼 홀연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의 망함으로 주님이 흥할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복음을 맡은 자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jso8485@naver.com
보안국가 Winnie Shin 선교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하나님 나라에 기록되는 자' (창세기 5장 1절 ~5장 11 절)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비로소 다시 계보를 정리하시는 질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늘나라에 기록되는 인생 살게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세기 4장까지는 약간 혼돈의 시간이었습니다. 천지 창조, 인간창조, 아담의 죄, 가인의 죄, 다른씨 셋 등장, 에노스 때부터 여호와라 부름 등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5장부터 갑자기 요약정리를 하고 아담의 계보를 적습니다. 새 계보에는 가인과 아벨이 없습니다. '다른 씨' 인 '셋'이 아담의 계보를 이어갑니다. 130세에 '셋'을 낳고 800년을 지내며 다른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다른 자녀들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사적 관점 중심으로 성경을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특히 자녀들이 성경 외적인 질문을 많이 합니다. 예를 들면 이부분 나눌때, "아담이 800년 동안 다른 자녀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그들에 대한 기록이 있는가?" 등등입니다. 답을 해줄 수 없을때가 많아서 힘이 듭니다. 좀더 공부하고 모임을 준비해야함을 성령께서 요구하십니다. 오늘은 큐티후 공부해서 모임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막간 이용해서 공부해보니, 아담의 자손은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약 200명-정확치는 않지만-쯤 낳았다고 합니다.) 창세기 5장 1절부터 11절 사이엔 시간의 공백이 엄청나며 기록이 생략된 사람들이 엄청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역사는 기자가 기록하고 싶은 것만 기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데체 셀수도 없이 많은 아담의 자손인데, 아주 간략하게 심플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바로 아벨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예배자만 기록이 됩니다. 장자여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봤을때, 하나님 입장에서 봤을때 아벨처럼 제사드리는 자가 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가인이 죽인 아벨과 셋의 아들 '에노스' 사이에 많은 시간적 차이가 분명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은 철저히 하나님 기준에서 볼때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며 예배드리는 자만 기록된 책'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이 시점에서 어떤 예배자인가를 성령께서 돌아보게 하십니다. 나라는 사람은 사람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기준에서의 '기억될 만한 예배자인가?' 라고 스스로 물을때,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드리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전 그분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결정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다윗 왕의 처분을 기다리는 므비보셋 같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니 아담, 셋, 에노스, 게난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안에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예배자의 모습과 문화 명령을 순종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은 하나님 가치관으로 보면 중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볼때 중심보십니다. 그 '중심'의 이미는 '하나님 사모해서 '예배드리는 자인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예배자', 전심으로 십자가 보혈 의지해서 빛가운데 기꺼이 자신의 죄 드러내서 성령으로 태움받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기꺼이 성경 말씀에서 "혈기낸거 자녀에게 사죄하라!" 했을때 주저없이 사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한대로 바로 순종하자, 자녀들도 저도 감정적으로 묶였던 묶임에서 자유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중시여기는 삶을 말씀 가운데 깨닫게 해주신 은혜의 하나님 찬양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기록되는 인생' 사모케 하신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영광 아버지께 올려드립니다. jso8485@naver.com
원주 온누리침례교회 조민수 담임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눅 9:20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때 주님은 많은 이적과 표적을 통해 정치, 군사적으로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줍니다. 갈릴리호수의 광풍사건을 잠잠케 하심으로 제자들이 주님을 경외하며 "그가 누구시기에"라고 합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능력을 행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자 분봉왕 헤롯은 "이 사람은 누구인가" 라고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작은 믿음을 소유했던 제자들이지만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할때 더 큰 믿음으로 점점 자라납니다. 예배의 자리,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 찬양의 자리를 통해 주님과 함께 하길 원합니다. 작은 믿음이었지만 주님과 함께하며 그분을 닮아갈때 제자들과 같은 더 큰 믿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더 사랑합니다. jso8485@naver.com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안디옥교회 김승환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두 명의 정탐꾼]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은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으로 자신과 온 가족은 생명을 구했고 그녀의 이름은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과 구원사적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올바른 선택을 했지만 여리고성의 주민들 입장에서는 철저한 배신자였습니다. 만일 내가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길을 선택했을까? 무엇을 내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믿음에는 혹독한 댓가를 치루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희생을 각오하고 참된 생명의 길을 선택할 굳건한 믿음이 있습니까? 라합은 하나님과 그 분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놀라운 이적을 듣고 그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라합은 현실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어느 쪽을 따라야 자신이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결국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여리고의 왕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에 대한 성경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도 라합과 같은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성에 몰래 들어온 두 명의 정탐꾼은 기생 라합의 도움으로 옥상에 펼쳐 놓은 삼대 사이에 숨어 지내며 목숨을 건집니다. 어떻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자기 동족이 아니라 여리고의 주민입니다. 자신들을 여리고의 관리들에게 넘겨줄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생 라합의 집 지붕에 숨어 있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곳에서 머문 몇 시간은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두 명의 정탐꾼이 믿었던 것은 기생 라합이 아니라 이스라엘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정복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했던 에스더 황후, 자신들의 안전을 기생 라합에게 맡긴 두 명의 정탐꾼, 주님과 함께 죽으러 올라가자고 말했던 도마. 우리의 삶에도 그런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의 운명과 직접 마주서야 할 때 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께 삶을 온전히 맡겨 드리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 후의 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jso8485@naver.com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품는교회 최준영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나는 소위 말하는 ‘아들 바보’이다. 하랑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때마다 기쁘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하랑이를 공의와 사랑으로 양육하길 원한다. 또한 하랑이가 자발적으로 순종 하는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하랑이는 누굴 닮았는지 호기심과 장난기가 참 많다. 그렇게 장난을 칠 때 나는 하랑이가 크게 다칠 수 있는 장난은 즉각 제재를 한다. 반면, 그 정도가 아닌 장난의 경우는 구두로 계속 경고를 해준다. 그럴 때 대부분의 경우는 하랑이가 나의 말에 순종하여 장난을 그만두기 때문에 다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자기 고집을 부려 계속 장난을 치다가 다칠 때가 있다. 하물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지 않는다면 어떠할까? 하지만, 오늘 말씀 속 유다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서의 시련이었다. 예레미야_11장_1-8절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언약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그들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1절).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2절). 여기서 말하는 ‘언약’(베리트)이 요시야의 종교개혁 시기에 갱신되었던 언약일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언약일지에 대한 견해가 나뉜다. 하지만, 요시야 시대의 갱신 언약 역시 시내산 언약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나누는 것보다는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백성들에게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3절). 이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마치 용광로 속에서와 같은 고난을 당할 때 구원해주시며 명령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4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과 하신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었는데, 지금까지 그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에 예레미야는 시내산에서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아멘했던 것처럼 아멘으로 화답한다(5절).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킬 것을 선포하게 하신다(6절).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때부터 오늘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경계하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말씀하셨다(7절).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각각 그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간곡하게 행하라 명령하셨던 그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시겠다라고 말씀하신다(8절).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언약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축복이요 생명이신 하나님께 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약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곧 저주요 사망 가운데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에게 제발 자신의 말 좀 들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 생각과 내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하는가? 오늘 나는 어떻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jso8485@naver.com
충주 열매맺는교회 담임 이재식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따뜻함이 잠재력을 깨우고 생명을 살립니다. 추운 날씨가 지속되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가 멈춰서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에 경유가 얼어 엔진이 꺼졌기 때문입니다. 추위는 달리는 차도 멈추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이 오면 죽어있는 것 같았던 씨앗이 흙을 뚫고 올라옵니다. 따뜻한 봄날씨는 아무런 변화없을 것 같았던 씨앗에 움이 돋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 형제를 미워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움이 지속되면 추운 날씨 때문에 달리던 차가 멈춰서는 것처럼, 상대방 뿐 아니라 자신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미움은 상대방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죽이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미움은 우리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지만, 사랑은 우리의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돕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품 안에서 생명을 누리며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생명을 살리시길 기도합니다. jso8485@naver.com
브엘라해로이 미니스트리 박길웅 대표./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눅9:18-27) 1.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뭐라 말하는지. 병자들을 고치고 기적을 베푸시던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2.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라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죽었던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3.그리고는 이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평하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의 관심과 시선은 오롯이 그의 제자들에게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4.그 때 베드로가 앞서 고백 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정말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물론 베드로의 이 완벽한 대답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넘어지고 깨어지며 실수 했지만, 이 고백 조차도 거짓이거나 형식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5.베드로가 고백을 마치자 주님은 자신이 가야 할 길과 자신을 따라오는 자들이 가야 할 길을 연이어 이르셨다. 6.세상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는 삶이 아닌, 그는 죽음으로 살리러 오셨고, 고난과 고통으로 구하러 오셨다.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메시야가 아닌 ‘영혼을 살리는 구원자’로 오신 것이다. 7.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주장하고 드러내야 하는 세대 가운데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고, 인정받고 높아지는 세대 가운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만 했다. 8.그러나 이것이 결코 손해 보거나 망가진 삶은 아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걸어가야 하는 길의 끝은 세상적 영광과 부와 명예가 아닌, ‘부활’에 초점이 있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영광 가운데 다시 일어날 그 날에 모든 힘을 집중하여 살아냈기 때문이다. 9.오늘 주님도 우리를 향해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도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걸음이 마땅하다. jso8485@naver.com
가까운교회 이승제 담임목사.(사진제공=가까운교회) 누가복음 9:18-27 예수님은 누구신가?의 질문에 사람들의 반응와 베드로의 반응이 다르다. 사람들은 기적을 많이 베풀고 가르침을 주며 백성들을 인도했던 선지자라고 보았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답하였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며 이전의 경험과 비교해서 인식했지만 가까이서 보았던 제자들은 오실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도 본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살아나기까지 비밀에 두어야 한다고 경고하신다. 두 가지 의문이 든다. 병든자를 고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이유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깨닫지 못하고 종합병원으로 오인할까 염려하여 그럴 수 있다. 그리스도를 깨닫고 고백까지 한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때가 안되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하시고 다시 부활하실때까지 비밀에 붙여 중간에 일이 그릇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아닐가 싶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예수님은 빠른 시간내에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하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제물로 드려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던 분이시다. 예수님 자신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시는 본”이 되신 분이시다. 이렇듯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 백성 자녀된 특징일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없지만, 그 나라백성이 되기 위해 지나가는 길은 좁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의 길일 것이다. 또 한가지 의문은 베드로의 고백이다. 예수님을 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는 계속 실수하고, 누가 큰지 싸우고, 선동하고, 넘어질 수 있는가? 그의 고백이 온전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면서 입술로만 고백했던 것일까? 베드로는 초신자로 이해하면 그럴 수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해서 그렇다고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인류 최초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봤고 예수님도 인정하시고 비밀에 붙여두라하실 정도이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메시야의 개념을 모를 리 없고 그의 고백도 거짓이 아니다. 그는 최소한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밤 최소한 검을 들고 말고의 귀를 자르며 목숨을 걸고 덤빌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의 고백도, 일련의 행동도 예수님을 인식하지만, 온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눈물로 만나고 입술과 삶으로 고백해 나가는 것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도 인정해주신다. 그런 위대한 고백을 한다고 해도 온전한 고백으로 이어질때까지는 계속 성장하고, 깊어져 가야 함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매우 인격적인 분이시고, 살아계신 신성체이시고 인격체이시다. 영원히 알아가고 닮아갈 분이시다.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고 깨닫는 것은 정말 첫 계단이요, 첫 단추 일것이다.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는 자기부인의 길을 걸으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는 길이 예수님의 참된 왕이심을 고백하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요, 제자의 도임을 가슴속에 새긴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하루이게 하옵소서. jso8485@naver.com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전도보다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 (누가복음 9:18-27) 1. 전도가 가장 중요할까? 많은 사람이 전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보면 전도가 가장 중요한지 아닌지 알 수 있겠다. 주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이다. (눅 9:20,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정답을 말했다. 진리에 대해, 즉 '도'에 대해 이렇게 정답을 말했으니 이제 해야 할 일은 나가서 전하는 것 즉 '전도'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다. (눅 9:21, 새번역)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셔서,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시고, "이제 나가서 전하라." 또는 "세상 끝까지 나가서 선포하라." 정도의 말씀을 하셔야 할 것 같은데 주님은 오히려 아무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엄중히 경고씩이나 하시면서 명하셨다. 주님에 대해서 바르게 안 그 순간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주님을 전하는 일'이라고 해석이 된다. 당황스럽다. 분명히 '전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교회에서 목사들에게 수없이 듣고 또 들어왔는데, 주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신다. 도대체 왜 주님은 '전도하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절대 전도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하신 것일까? 2. 전도보다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눅 9:23, 새번역) [23]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주님이 전도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전도보다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일까? 누구나 새롭고 놀라운 것을 보면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일단 알고 보면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싶어진다. 주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말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진리를 삶으로 살아가는 것에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전도보다 비교할 수없이 중요한 것은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다. 진리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새겨야 하는 것이다.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 우선되면 안 된다. 전도는 삶으로 해야 하고 저절로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인은 '전도'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전도'는 저절로 되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전도'는 잊어도 좋겠다. 왜 잊는 게 좋을까? 전도에 신경 쓰다가 정작 신경 써야 할 가장 본질적인 일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가 가장 중요하게 온 신경을 다 써야 할 일은 전도가 아니라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다. 전도란 '도를 전하는 것'이고 '도'는 '인생의 길'인데, 인생의 길을 알고 걸어가는 것보다 인생의 길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할 리가 없다. 먼저 걸어가야 한다. 먼저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먼저 온 신경을 한 가지에만 집중해야 한다. 주님이 가신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3. 주님을 따르는 삶은 쉽지 않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다. '주님을 따르면서 동시에 전도하면 되지 않느냐?' 라는 질문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에만 신경을 써도 신앙의 삶은 쉽지 않다는 문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실제로 자신의 삶에서 실현해 가려고 노력한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신앙의 삶이 버겁다 여겨질 것이다. 어쩌면 '전도'를 못할 수도 있겠다 싶다. 옳은 길임은 알겠는데 자신조차도 제대로 걸어가지 못하는 길을 다른 사람에게 가자고 권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대해서 주님은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눅 9:24, 새번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하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인데, 그 고민을 안고 있으면서도 전도에 집중하는 것은 어리석은 삶일 수밖에 없다. '전도'를 제대로 하려면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어야 하고 그 길이 행복하다는 경험과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한두 가지 보고 듣고 깨달은 정도만으로 전도하겠다고 설치다가는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모독하는 행동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전도가 너무 쉬워요.' 라고 외치면서 대형교회를 세운 목사가 코로나 시대에 대면 예배를 고집하다가 확진자를 무더기로 발생시켜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는 짓을 하는 것은 전도에만 집중하고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 목사와 교회는 '전도'에만 집중하다가 기독교 신앙을 모독하는 짓을 한 것이다. '쉬운 전도'에만 집중하다가 신앙을 망치지 말고 '쉽지 않은 주님을 따르는 삶'에 집중해서 목숨을 잃고자 하여 목숨을 얻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주변 사람들이 그 삶에 의문을 가지고 그 사람이 가진 소망의 이유를 묻는 참된 전도가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4. 나는? '전도하지 마세요.'라고 설교 시간에 노골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성도 20명 정도의 작은 교회에서 전도하지 말라고 설교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배가 불렀구나' 정도의 반응을 할 것 같다. 그런 반응이 있을 걸 알면서도 왜 나는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말씀의빛교회에 새신자가 오는 것을 싫어할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말씀의빛교회에 새신자가 오는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성도들이 전도에 올인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전도에만 집중하다가 엉뚱하게 신앙의 방향을 잡아서 결국은 왜곡된 종교적 삶을 살아가다 망하는 안타까움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전도보다 중요한 것은 신자 개개인이 인생의 길을 바르게 걸어가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신자 개개인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할 길을 찾고 오히려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삶을 자발적으로 살아가도록 나는 최선을 다해 돕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도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즉 설교를 잘하는 것보다 매일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려 한다. 지금은 전도할 때가 아니다. 전도를 안 해서 기독교가 개독교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 다른 사람을 전도하려 해도 믿고 보낼 교회를 찾기 쉽지 않은 시대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전도에 집중하기보다 자신의 신앙의 삶이 어떤지 돌아보아야 할 때다. 자신이 신자로서 신자답게 살아가고 있는지, 신자로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할 때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걸고 주님을 알아가야 하고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알아가야 하고 그 길을 따라가야 할 때다. 사실 작은 개척교회를 섬기면서 '전도하지 말고 말씀에 삶을 걸자'고 설교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성도들이 참되게 신앙생활하려면 전도가 아니라 말씀에 삶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내 생각일 뿐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은 개척교회 상태임에도 나는 계속 그렇게 설교할 것이다. 성도들이 말씀에 삶을 걸고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삶을 걸 때, 자신의 마음에 있는 소망에 대해 누군가 묻는 그 놀라운 '저절로 되는 전도'를 경험할 것을 믿기 때문이고, 성도들이 그럼 경험을 하게 되길 너무나 간절히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설교를 잘 하거나 전도를 기술적으로 잘 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 그리고 묵상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 나의 삶을 다 걸고 살아가려 한다. 그것이 내가 살고 성도들이 사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말씀을 통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올바르게 따라가는 나와 성도들의 삶이 되길 간절히 소원하는 아침이다. jso8485@naver.com
명성선교회 시므온 리 선교사.(사진제공=명성선교회) 민26:59. 아므람의 처의 이름은 요게벳이니 레위의 딸이요 애굽에서 레위에게서 난 자라 그가 아므람에게서 아론과 모세와 그의 누이 미리암을 낳았고 성경에는 여인의 이름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이 한 구절에만 요게벳과 미리암이라는 여인의 이름이 두 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모세의 어머니와 누이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이 된 것이다. 모세와 같은 인물이 가족 중에 있으면 여인일지라도 성경에 기록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인들이 자신이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할지라도 남편과 자식을 모세와 같은 자로 만든다면 성경에 기록되는 것 같은 명예를 얻을 것이다. 주님, 우리 가문에 태어나는 여인이나 우리가문으로 시집오는 여인들이 남편과 자식을 잘 섬겨 모세와 같은 자들을 배출하는 가문이 되게 하소서 ! 60-61. 아론에게서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났더니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죽었더라 아론의 아들들 중에 하나님의 진노로 죽은 자들이 있다. 아무리 신앙의 명문가문일지라도 자녀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아무리 내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 하더라도 자녀들 중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자녀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님,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말씀으로 잘 양육하게 하시며 그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신앙교육을 잘 시키게 하소서 ! 62.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레위인의 모든 남자는 이만 삼천 명이었더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준 기업이 없음이었더라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 중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준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계수에 들지 않은 것이다. 레위인은 땅에서 나는 기업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막에서 봉사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친 것들 중에 하나님께서 레위인에게 주라고 한 것들로 살게 하셨기 때문이다. 63-65. 이는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계수한 자라 그들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계수한 중에는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애굽에서 나온 후 시내광야에서 첫 번째로 인구 조사를 할 때에 계수된 사람은 이번에 계수한 두 번째 인구조사에는 한 사람도 들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모두 다 광야에서 죽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모두 다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였기 때문에 살아남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주님, 저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 jso8485@naver.com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사진제공=제자순복음교회) “내가 만난 예수님” 보모는 자녀를 사랑하기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를 한다. 교사도 사랑하는 제자들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 삶의 권위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지혜를 전해주고 도움을 주고자 한다. 그런데 꼭 필요하고, 좋고, 옳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본인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변화는커녕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그것들이 잔소리가 되고, 관계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차라리 침묵 했더라면 그래도 관계는 어색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때도 있다. 꼭 필요하고 옳은 이야기는 부모의 사랑의 코드이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사랑보다는 간섭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부모나 권위자는 상대의 감정적 상태와 분위기를 잘 분별하여 말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잘못했을 때, 감정적으로 상하고 힘들어 할 때는 최대한 말을 절제하여 감정의 여유를 만들어 “괜찮아!”라는 한 마디로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 아이들도 자신이 잘못한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거기에다 “무엇이 문제이고, 왜 잘못 했고, 어떻게 할 것이냐?”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다. 아니 더 깊은 상처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 변화는 본인이 깨달아 알고, 새로운 마음을 선택하고 행하고, 그리고 꾸준하게 살아갈 때 일어나지 강하게 주입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너도 이 다음에 커서 철이 들면, 내 맘을 알 수 있을 거야!” 그렇다. 철이 들어야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자녀를 양육 하면서, 어릴적 나를 향한 부모의 마음을 깊이 있게 알아간다. 나의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아이였는지 돌아본다. 얼마나 많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입혔는지 마음이 저려오기도 한다. “더 잘 해야 했는데,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그런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다. 그래서인지 자녀를 향한 마음이 더 온유하고 인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를 강하게 가르치고 엄하게 훈련하는 것만이 바르고 건강하게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교훈적인 말보다는 기다리고, 더 많이 인내할 때 훨씬 더 건강하게 양육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채 그저 참고 기다리는 것만은 아니다. 힘겨울 때에는 말보다는 잠잠히 손을 잡아주고, 넘어졌을 때에는 고통스럽지만 충분히 기다려주고, 잘 나갈 때에는 함께 기뻐하며 겸손의 소중함을 가르친다. 때로는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에 거칠게 논쟁도 하고, 잘못한 것은 권위에 상관없이 정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 완벽할 수 없기에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에는 많이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철이 들어 마음과 마음이 소통하고, 또 다른 다음세대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한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의 자리는 직접적인 만남, 경험에서 일어난다. 듣고 배우는 것에서, 그것을 행하고 가르치고 살아갈 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간접적인 경험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면, 그것을 직접 행하고 가르치고 살아갈 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만난, 내가 경험할 때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시냇물의 빠르기를 기계로 측정 했을 때는 감이 잘 오지 않지만, 직접 그 시냇물 속으로 들어가면 “아, 이 정도구나!”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라고 말하는데, 그것만 듣고 따라갈 것이 아니다. ‘메시야’, 구원자 예수님을 직접 만나 경험하고, 그분이 ‘나의 구원자, 나의 주님입니다!”라고 고백하고 믿음으로 따라가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눅 9:20 jso8485@naver.com
캐나다 큰빛교회 파송 조남홍 선교사.(사진제공=한국 불어권 선교회)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3, 8 요한복음 14장 서두와 그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 27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세상이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지만 이 땅의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는 일종의 심장병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 장의 제목을 ’영적 심장병 그 원인과 치료‘라고 붙일 수도 있을 정도로 위대한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기록하는데, 이 병의 원인은 주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임박했다는 사실과 이제 곧 예수님이 자신들을 버리시리라는 생각 때문에 제자들에게 심장병이 왔고, 유일한 치료책은 ’다시 오시리라‘는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리라는 내용이 이 장 처음 열 네 구절의 주제인 것은 물론 이는 우리가 죽을 때도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1)”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2절) 그래서 성도들의 죽음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2)”내가 다시 와서“(3절), (3)”너희를 내게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3절), (4)”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6절)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기도 하신 그분이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우리를 호위하시고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15~26절은 그리스도께서 중간에 오시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분이 미래에 오신다고 해서 그 사이에는 제자들을 버려두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반대로 그분은 성령을 보내신다는, 아니 그분 자신이 성령의 위격으로 오실 것인데,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 즉 순종으로 그 사랑을 증명해 보이는 이들(21절)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마지막 27~31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죽음으로 주제를 되돌립니다. 다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샬롬!“ 즉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떠나시며, 그분의 영혼은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셨고 그분의 육체는 아리마데 요셉에게, 그분의 옷은 로마 병사들의 차지가 되었고, 그분의 어머니는 요한에게 부탁하셨으며, 그분의 제자들에게는 은도 금도 없었지만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주는 평안이라는 최고의 것을 남기셨다는 감사가 가득한 아침입니다. jso8485@naver.com
성공과가치 연구소 김형철 소장./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과거의 자화상-3년 전의 나를 기억해 보십시요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각색하기 좋아하는 존재입니다. 하버드대학교의 심리학자 다니엘 샥터(Daniel Schacter) 교수는 '기억의 7가지 큰 죄'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우리 기억의 허구성을 낱낱이 밝혀냈습니다. 그는 우리 기억이 얼마나 모순되고 모호하기까지 한지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위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7가지 죄에 비유하여 기억의 모순점을 7가지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과거의 자화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3년전 자신의 모습을 떠 올려 보십시요. 당시 여러분의 능력과 지식은 어느 정도이었습니까? 생명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성장을 합니다. 육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3년 동안 경험과 지식을 쌓았으니 지금의 나는 3년전의 나보다 한결 나은 존재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3년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비교해 얼마나 모자란 사람이었을까요? 캐나다 워털루 대학교 마이클 콘웨이(Michael Conway) 교수와 그의 연구팀은 과거 자화상에 대한 재미있는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콘웨이 교수 팀은 이 실험을 위해 ‘학습기능향상 프로그램’이라는 과목을 신설하였습니다. ‘학습기능향상 프로그램’은 카나다뿐만 아니라 여러나라 대학에서 개설되어 인기강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강좌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프로그램은 성적향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 다양한 조사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수강 전쟁까지 벌여가며 이 프로그램을 듣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과거 자화상’ 시험은 이 ‘학습기능향상 프로그램’과 함께 3주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연구팀은 강의 첫날 학생들에게 현재 자신의 성적과 공부시간 집중력 등을 스스로 평가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효과적인 청강 방법과 필기법 독서법 등을 날마다 90분씩 강의하였고 3주 후 종강 시 설문 조사를 다시 실시하였습니다. 수강한 학생들은 대다수가 수업에 만족한다고 응답을 하였고 학습 능력도 향상되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업 첫날 실시한 수강 이전의 자신의 학습능력(수강 전)을 다시 한번 평가(수강 후)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조사결과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수강 전에 평가한 '과거의 학습능력평가 점수'보다 수강 후 평가한 '과거의 학습능력평가 점수'가 더 낮게 나타났습니다 수강 후에 평가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더 부정적으로 적어냈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을 통해 많은 사람이 과거의 자신을 현재의 자신보다 훨씬 더 부족했다고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사실 왜곡은 ‘학습기능향상 프로그램’을 수강하지 못한 학생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학생들이 자신이 수강한 과목이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자신의 확신과 이치에 맞게 자신의 과거 기억을 조작하고 왜곡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 왜곡에는 또 한가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 자신의 수준을 되도록이면 낮추어야 현재의 성장 정도가 더 높아지고 그래야 자신이 투자한 3주간의 노력이 정당하다는 자기방어 기제가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젊어서는 바보 같은 짓을 참 많이 했지! 학교 다닐 때 맨날 놀기만 하고 공부는 하나도 안했어!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 과거 일을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내가 왕년에 주먹질을 좀 하고 다녔지!’라며 어두운 과거 경험을 자랑스레 밝히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싸움이나 일탈 경험을 습관적으로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일수록 학창시절 행실이 불량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과거의 나를 직시하십시요! 그리고 현재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거 기억의 왜곡을 통해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밝혀줄 수는 없습니다. 미래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 놓은 터전 위에 현재의 내가 새로움을 입혀야 지금과 다른 새로운 미래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잘났던 못났던 그건 우리의 통제 밖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입니다. 아무리 미화를 하고 왜곡해도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의 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현재에 반영하고 현재의 내가 미래를 바꾸어 나가도록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과거를 직시하고 우리의 현재 태도와 생각을 바꾸어 미래를 밝게 만들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도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소망이라고 누차 말씀하셨다면 우리가 할 일은 과거를 딛고 일어나 그 소망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코로나를 딛고 일어나 그 분의 말씀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jso8485@naver.com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김해 우리는교회 심석보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말씀 : 누가복음 9장 18-27절 1.고백대로 살아가자. 베드로의 고백이 실로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이는 세상의 평가와 다른 고백이며, 세상과 적이 되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은 최고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고백은 베드로와 같아야 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성인 정도로 여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와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교회들이 비춰진 모습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름이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숨기고자 합니다. 더욱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임을 더욱 드러내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손가락질이 두려워도, 회복을 위한 걸음을 우리부터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도록, 우리를 통해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회복되도록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잘 알고 있지만, 잘 행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분명 우리에게 ‘날마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우리는 일상에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제자는 하늘을 소망하는 자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자 하는 자는 제자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높임을 받을 수 있지만, 마지막 때에 주님은 온 천하를 얻은 자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무엇을 쫓으며 살고 있는지 우리는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지만, 날마다 고백하지는 않고, 내 필요에만 고백하는 자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온 천하를 얻고자 하는 이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백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날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결단 나는 언제나 주님의 제자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야 하는 줄 알면서도 시시때때로 놓칩니다. 수없이 후회합니다. 아! 한 번 더 참을 걸, 차라리 내가 손해보고 말 걸. 지는 것이 싫고, 내가 손해보는 것이 싫어서 같이 분을 내고, 다투기 바빴습니다. 내 안에 주어진 하나님 나라가 그 사람에게 흘러가지 못했습니다. 주님, 날마다 주님의 제자로 살겠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감당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내 인생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 되더라도, 한 영혼이 예수님을 통해 살아나는 일의 거름이 되겠습니다. 날마다 그런 삶이 살기 위하여 오늘부터 다시 고백하고 도전합니다. jso8485@naver.com
송림교회 담임 정경호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브온과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 날씨가 포근했다가 다시 추워지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금씩 겨울의 차가움이 봄의 따스함으로 교체되어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얼마 후에는 벌써 '설'이 다가옵니다. 세월의 흐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가 봅니다. 어제는 비가 상당히 내렸습니다. 제 집에 키우는 '경주견'이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 견의 이름이 '눈별'인데, 이 녀석은 비만 오면 들판에 나가서 큰 일을 보질 못합니다. 하루든 이틀이든 참는 것을 보면서 걱정을 하게 합니다. 어제도 몇 번 밖에 데리고 나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비가 그쳤고 온 들판이 살얼음으로 얼어 있습니다. 쪽지 나눔 끝나면 데리고 다시 나가려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눈별'이는 집 안에서는 볼일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2-3번 밖에 데리고 나가야 하는 상전 중에 상전입니다. 덕분에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제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ㅎㅎ 오늘 묵상은 여호수아 10장 1-5절 말씀입니다. 1 그 때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빼앗아 진멸하되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또 기브온 주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 중에 있다 함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듣고 2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큰 성임이요 아이보다 크고 그 사람들은 다 강함이라 3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보내어 이르되 4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이는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화친하였음이니라 하매 5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이 함께 모여 자기들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올라와 기브온에 대진하고 싸우니라 여호수아가 아이를 정복했고 기브온 주민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는 화친의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소식에 적잖게 놀란 왕이 있었습니다. 근방에 있던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었습니다. 그는 기브온의 소식에 상당한 충격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 성 보다 더 크고 강한 족속이 기브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아도니세덱이 연합군을 결성하게 됩니다. "헤브론 왕 호암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을 연합군으로 부릅니다. 이제 기브온을 치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맞써 싸워서 가나안에 있는 각 족속들의 땅을 지켜내도 모자랄 판에 항복을 선언한 기브온이 괘씸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기브온을 치지 않으면 다른 모든 족속들도 이스라엘과 화친의 조약을 맺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태는 감당할 수 없는, 모든 족속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는 일들이 발생할 것을 염려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전쟁을 준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화친을 맺는 이들을 향한 아도니세덱의 맹렬한 분노는 사탄의 그리스도교를 향한 공격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제 기브온과 아도니세덱 왕의 연합군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단순히 기브온과 연합군의 싸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화친의 조약으로 종이 된 기브온은 이제 이스라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도니세덱의 연합군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전쟁을 선포하는 것임을 이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브온은 지금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간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왕도와 같은 큰 성(2)"이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게 됩니다. 기브온은 큰 성이었고,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서 살길을 도모했습니다. 이제 기브온은 자신들의 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나무를 패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강한 성이요 큰 성이요 왕도와 같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들을 행했을까요? 왜냐하면 여리고가 이스라엘의 함성에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이요, 아이 성이 쉽게 점령 당했기 때문입니다. 기브온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전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이 큰 역사를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복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 이스라엘 백성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도리어 자신들의 왕도의 길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종이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은 전쟁을 선택했지만, 기브온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요, 구원의 기쁨을 얻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 사랑과 자비의 주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기브온의 모습을 보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자신들의 왕도와 같은 힘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힘을 버리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길을 선택함을 보았사오니, 주님 우리에게도 이런 지혜와 복종의 길을 보이시옵소서. 그리하여서 살 길을 열어주시오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강력한 임재의 편에 서는 영광을 얻는 인생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jso8485@naver.com
하나교회 정영구 담임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말씀의 객관화 본문 말씀에 말씀의 객관화가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구약 안에 있는 약속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을 마리아에게 알려 줍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그 말씀 가운데에서도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말씀이 332개입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 가지 중요한 말씀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첫 번째는 여자의 후손이라는 약속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창세기 3장 이 말씀을 원시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라는 첫 번째 사람들로부터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4000년 이후 34절 마리아의 고백처럼,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인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더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27절의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눅 1:27) 이 말씀의 성취입니다. 두 번째는 다윗의 왕위의 약속입니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3) 이것을 다윗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율법의 본질적인 개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받는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선물입니다. 다윗에게 주신 복음은 후손인 그에게 영원한 왕위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1000년 이후 33절 가브리엘 천사의 소식으로 진실이 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약속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35절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직후,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확인 되었습니다. 이처럼 말씀의 객관화는 우리가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세계입니다. 그 말씀의 객관화의 고백이 37절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모든 것이 능력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려 내십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고 복음의 능력입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눅 1:26~38, 시 105:17~19 jso8485@naver.com
드림플러스 한인교회 목회자 정서영 선교사.(사진제공=드림플러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 Acts 12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So Peter was kept in prison, but the church was earnestly praying to God for him.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When this had dawned on him, he went to the house of Mary the mother of John, also called Mark, where many people had gathered and were praying. 1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You're out of your mind," they told her. When she kept insisting that it was so, they said, "It must be his angel."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But the word of God continued to increase and spread. but the church was earnestly praying to God for him.(12) But the word of God continued to increase and spread.(24) 복음을 전하는 일로 베드로가 옥에 갇혔다. 당시로서는 사회의 무리와 소동을 일으킨 이유였을 터이고 신성모독한 이단자 예수를 따르는 이단세력, 반민족 주의자들로 여김받았을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가? 나에게 어떠한 일이 생기든 누구도 나를 막아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할 것은 주께서, 성령께서, 천사로서 나를 자유케하시고 승리하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 믿고 따르지 않는 이들은 무시하고 그저 담대히 전할 뿐이라. 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반대로 세상이 이렇게까지 내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하니 어찌 하여야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여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이런 세상인줄 뻔히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스스로 갖은 고초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나아가기 까지 생명마쳐 이처럼 사랑하신 것일까?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처럼 이 땅을 사랑하는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내가 전하는 복음. 그 복음이 어떠한지, 나는 온전히 성령에 충만한지 아니면 내 감정에 충실한 채 순전함을 잃고 있는건 아닌지... 홀로 서 있거나, 혼자 높이 있거나,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인정하는 순간일 수 록 나는 나를 철저히 돌보지 않으면 안되는 연약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느 한 순간 엉뚱한 복음을 들고 세상 엉뚱한 일을 하며 스스로는 복음 앞에 서 당당하다고 외치고 있게 되는 치명적인 죄를 범하게 될지 모른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부끄러운 기독교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 될 수 도 있는 일이다. 주여.. jso8485@naver.com
감리교신학대학교 신약학 김충연 교수./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창1:1-3; 사40:13.14.18 제목: 엘로힘 - 하나님 성경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창세기는 단순하지만 매우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이 말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5개의 단어들로 구성됩니다(편집자 주: 독일어는 7개, Am Anfang schuf Gott Himmel und Erde). 이 단어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영향을 주고, 번성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의 근간을 제공합니다. 그 모든 것을 만들고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에 적절한 단어를 히브리어에서 찾는다면 바로 ‘엘로힘’(Elohim)입니다. 그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능력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구성하고 창조하였습니다. 그 신비와 깊이에 대하여는 오늘날까지도 탐구하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창조의 열쇠인 다섯 개의 단어들. 칠천년의 세월도 이것을 해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미 셀 수 없는 많은 학자들, 즉 신학자, 고고학자, 철학자, 물리학자, 역사학자 들이 이것을 풀기위해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론들이 도서관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훌륭한 학자들에 의하여 새롭게 발견된 진지하게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연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단어들이 중요하지만 그 중 우리가 관심을 두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듣고 그에게 요청하고자 합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시143:10). 우리는 많은 질문들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사40:12; 비교. 욥38:4-11). 하나님이 그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질문하신 것에 대답을 하지 못한 후 비로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우주를 창조하였고 너도 창조하였다. 나는 너의 삶을 알고 있고, 너의 짐, 너의 고통도 알고 있다. 그것을 너는 믿느냐?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 독일어 본문에 대한 권리는 Diakonissen Mutterhaus Aidlingen에 있습니다. jso8485@naver.com
캘리포니아 홀리원교회 담임 이동구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To those who follow the LORD.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마태복음 11: 1) After Jesus had finished instructing his twelve disciples, he went on from there to teach and preach in the towns of Galilee. (Matthew 11: 1) 주님은 열 두 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셨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분에게 속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제자들에게도 넣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방인에게 가지 말고 유대인에게 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유대인들 중에 남은 자들로부터 시작되어 이방 세계까지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사 49: 6. 참조)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 지 어떤 능력을 나타내야 할지 무엇을 소유하고 다녀야 할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려 주시고 명령하시기를 마쳤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자세히 알려 주신 것은 복음을 맡은 자들이 자신들의 뜻과 마음을 따라서 행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오늘날 성령과 말씀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단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복음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복음 안에서 은혜에 푹 젖게 하시고 그것을 나누도록 사명을 주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고 세우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명령을 거절하며 각자의 이유가운데 선지자 요나처럼 도망을 칩니다. 그런 무리 안에 내가 속해서는 안되겠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른다고 미적거리며 세상으로 떠나기를 주저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십니까? 만약 누구든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겠다고 한다면 주의 성령은 그 사람의 입에서 말씀하시고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려 주실 것입니다. 주님과 연합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불 순종이라는 허물과 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열 두 제자에게 명령하신 주님은 복음을 자세하고 알기 쉽게 전하시며 전도하기 위해서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보냄을 받을 자들에게 성령으로 찾아 가시고 성령의 충만을 이루시며 무엇을 어떻게 전하며 행동해야 할 지를 알려 주시고 지시하십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기다리는 사람들마다 사명을 주시는 주의 성령께서는 부는 바람처럼 머무는 불 꽃처럼 찾아오시고 권세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새 생명을 창조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jso8485@naver.com
품는교회 담임 김영한 목사.(사진제공=Next 세대 Ministry) "서버의 응답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네비게이션이 계속해서 뺑뺑 돌며 자기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목적지를 향해 출발해야 하는 데 현재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다. 인터넷이나 GPS와 소통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내 네비게이션은 날씨가 흐리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진로코칭은 자기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꿈꾸는 아이가 그 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시작점이 필요하다. 그 시작점이 '자기 이해'인 것이다. 시작점이 정확해야 어떤 길로 어떻게 가야 '꿈'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아세요]는 바로 그 시작점을 알려주는 책이다. 부모님들은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 길을 제시하고 자녀를 이끌기 위해 노력한다. 자녀의 내면이 상처받기 시작하는 이유다. 전혀 엉뚱한 데서 출발하려 하기 때문인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아이들의 말을 대변한다. "이ㆍ생ㆍ망이에요. 이번 생은 망했어요. 부모님도 부자가 아니고, 제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니, 이번 생은 망한 거 같아요." 저자는 “다음 세대가 왜 이렇게 병들고 아파할까?”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지도자들이 다음 세대 자체를, 그들의 현실과 속마음을 아느냐고, 이해는 하시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이석현 성경적 진로 코칭하는 목회자 분이 책 <나를 아세요> 서평을 적어 주셨다. 이 책은 다음 세대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만든 구조적 문제는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부녀자들에게 애곡하라고 하셨다. 특히, ‘이생망’, 이번 생에 망한 유다 자녀들로 울라고 하셨다. 그 당시 유다 자녀들은 왜 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예레미야 9장 17-26절, 성경 하브루타 코칭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여호와> 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해 보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18.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1) 유대 문화에 ‘곡하는 부녀’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 곡하는 부녀들은 대가를 받고 초상집에 가서 소리내어 울어주는 일을 하였다. 이런 관습은 오늘날에도 근동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In a lament over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he heightens the imagery of desolation by calling for the professional mourning women (17) to make loud wailing. These persons generally followed the bier at a funeral and loudly lamented the passing of the deceased (cf. Matt. 9:23). Harrison, R. K. (1973). Jeremiah and Lamentation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Vol. 21, p. 95).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 하나님은 왜 곡하는 부녀 그리고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라고 했는가? (17-18절) - 지금은 유다 자녀들을 위해 애곡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 하나님은 어머니들로 애곡하여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야 한다고 하셨다. 3) 지금 영적 부모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으로 울며, 애통해 주어야 하는가? 19. 이는 시온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거처를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20. 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 21. 무릇 사망이 우리 창문을 통하여 넘어 들어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들을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1) 시온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렸는가? (19절) - 아주 망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였다고 들려왔다. - 그 땅을 떠난 것은 거처가 헐렸다고 하였다. 2) 하나님은 부녀들이 어떤 역할을 해 주기를 원하셨는가? (20-21절) - 부녀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라고 하셨다. -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기를 원하셨다. 3) 하나님이 이렇게 부녀들에게 말씀을 받고, 자녀들을 위해 애곡하게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21절) - 사망이 창문을 통하여 넘어 들어와 궁실에 들어오고, - 밖에서는 자녀들을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고 있다고 하셨다. 4) 요즘 우리 가정, 교회 안에 다음 세대들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22. 너는 이같이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시체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가? (22절) - 사람의 시체가 들에 떨어지고,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2)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 용사, 부자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23절) -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사는 용매을 자랑하지 말고, 부자는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다(23절). - 자랑하는 자는 오직 명철하여 하나님 아는 것과 하나님이 사랑, 정의,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으로 하라고 하셨다(24절). 3) 나 자신은 최근 무엇을 자랑하며 자긍하였는가? 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26.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1) 하나님은 할례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모두를 왜 처벌하시려고 하셨는가? (25절) - 애국, 유다, 에돔, 암몬 자손, 모압,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 즉 머리털을 밀어버린 자들을 처벌하려고 하셨다. - 이런 관습은 이방 풍토로 히브리 율법은 이같은 행위를 금지하였다(레19:27).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며” (레19:27) - 하나님은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과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백성들을 멸하려고 하셨다. In an appended saying Jeremiah states that the Judeans, though circumcised in body, had no real inner dedication to the spiritual ideals of Sinai, having indulged in lust instead of glorifying God in body and spirit (cf. 1 Cor. 6:20). Harrison, R. K. (1973). Jeremiah and Lamentation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Vol. 21, p. 95).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어떤 면에서 더 거룩한 지성소로 나아와야 할까? 교회 건물 안에는 있지만 참 예배의 자리, 거룩의 자리로 나아오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3) 오늘 말씀 중 받은 도전 혹 은혜는 무엇인가? jso8485@naver.com
예심교회 신아브라함 선교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주님과의 친밀함을 원하십니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21:7) Then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said to Peter, "It is the Lord!" As soon as Simon Peter heard him say, "It is the Lord," he wrapped his outer garment around him (for he had taken it off) and jumped into the water. (Jn21:7)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에필로그입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주님과 제자들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한 장의 그림을 소개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통찰력을 얻는데서 멈추지말고 대화의 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떠한 대화이든 말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살아계시는 말씀이십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기뻐하는 것은 통찰력 때문이 아니요 주님과 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없이는 친밀함도 없고, 말씀이 없이는 대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과 가까워지기 위한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데일 파이프/은밀한 처소) 진정한 친밀함은 무엇을 깨닫는 것이 아니고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이유는 사람들과 가까이하기 위함이요 친밀히 대화하기 위함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은 대화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이유도 친밀히 동행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의 에녹이나 욥,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통찰력보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신약의 요한이나 베드로가 여러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주님과의 친밀함에 있습니다. 끝없이 주님을 부르고 주님께 질문하고 주님께 죄를 고백하고 사랑을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주님께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2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21:17) jso8485@naver.com
킹덤빌더즈, L.A 글로리 교회 담임 전두승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하나님의 음성? 자신의 음성?(1)" “하나님의 음성듣기”라는 용어가 익숙하게 들리는 중에 쉽게 볼 수 있는 폐단 중의 하나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관계성에서 주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를 경외하며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고 그와의 친밀함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것이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까운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에서는 자신에게 말하는 가까운 사람의 목소리를 전화라고 해도 자연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길 가는 모르는 사람에게 말할 이유도 없고 비밀을 이야기 해 줄 사람은 더군다나 없는 법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자들이 자칫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고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잘못 이해함으로 자신도 속고 다른 사람들도 속이는 수가 종종 있음을 볼 수 있다. 몇 년 전까지 우리 교회를 주일 오후에 사용하던 2세 그룹이 있었다. 목회자 없이 모인 2-30대 그룹의 한국청년들을 주축으로 다민족 청년들의 모임이었다. 같이 모여 찬양하고 주제를 놓고 토론하고 서로 기도하고 예언도 한다는 그룹이었다. 의자도 빙 둘러 놓고 앉아 모두가 참여하는 모임이라 금새 부흥이 되는 듯하였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분열이 일어나고 급기야 모이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끼리끼리 가정에서 모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영적지도자가 없고, 뚜렷한 비전의 방향도 없이 모이기만 좋아했더니 그러했던 것이다. 어디서 그러한 영향을 받았는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예언한다는 그룹이었는데, 한번은 그 중 한 청년이 토요일 늦게까지 어느 모임에 갔다 왔는지 피곤하여 주일날 교회를 가야 하는데도 일어나기 싫어 누워서 “하나님 제가 오늘 몸이 많이 피곤한데 집에서 예배드려도 되지요?”하고 물었더니 하나님이 “그래 그렇게 하라”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리는 삼척동자라도 믿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그가 십중팔구 집에서도 혼자서 예배드렸을리가 만무하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고 그렇게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는 수준을 잘못되었다고 지도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 그 그룹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곳 킹덤빌더즈 모임에 오는 사람들 중에서도 종종 그러한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고 그렇게 자유롭게 신앙생활한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물론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런 것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고 자신을 위해서 이야기 해주는 편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예언한다는 미국교회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조금 훈련받고 성경도 모르고 신학도 없는 상태임에도 한국 목회자는 영적이 아니기에 그러한 교회에 가기는 싫고 해서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 저리 다니는 경우가 많다. 한번은 어느 교회 나가느냐 하니까 지금은 킹덤 빌더즈 토요모임에 와서 여기서 찬양하고 말씀듣고 하니까 여기가 교회라고 하면서 주일날은 아무 교회도 나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니던 외국교회도 좀 다니다가 보면 자기 마음에 안드니까 옮기고 한국교회는 나가기 싫고 해서 토요일 한번 와서 예배드렸으니까 주일날은 아무데도 안가고 집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외국 기름 부으심 집회에 좀 다니고 하나님 음성듣기와 예언 세미나에 좀 나갔다는 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이러한 자가음성이고 자가복음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일들을 자기에게 좋게 적용해서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고 웬만해서는 남의 지도를 받으려고 하지도 않기에 미혹되기 쉽상인 것이다. 처음 L.A에 나왔을 때, 이전에 집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는 어느 여집사님이 따로 찾아와 하나님이 꿈에 나를 보여주시면서 “이제 큰 부흥이 일어날텐데 전목사를 도와 중보기도로 교회를 일으킬 사명이 있으니 그 교회로 가라”라고 여러번 말씀하셔서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한 달인지 두 달이 지난 후에 다른 여집사도 하나님이 가라 했다고 하면서 출석하였다. 그 둘은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으나 서로 은사가 있다고 하면서 시기하고 눈짓을 하는 그런 별로 좋은 관계가 아닌듯 하였다. 석 달쯤 되었을 때, 먼저 온 그 여집사가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밤에 꿈에 “하나님이 이제 사명을 다했으니 교회를 옮기라”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사명을 다했다는 말이냐 이제 시작했는데” 라고 대답하니까 밤에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자기는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다음 주부터는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뒤에 온 그 여집사도 똑같이 나오지 않았지만, 자기가 꼴보기 싫은 사람이 와서 있기 거북한 생각을 하니까 그러한 꿈을 꾸고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자기는 순종할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같이 그렇게 인도받는 것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좀체 지도하기가 힘든 사람들의 부류에 속한다. 차라리 은사도 모르고 한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처음부터 은혜받고 바로 배우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나는 두 가지로 생각한다. 첫번 째는 그 먼저 온 여집사가 들은 처음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바른 음성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꼴보기 싫은 사람이 오든지 어떤 어려움이 있든지 자기가 들은 대로 부흥이 일어날 때까지 중보기도의 사명을 다해 교회를 세워야만 하였다. 그러지 않았으니 바로 들었어도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두번 째 생각은 석달 후의 꿈에 하나님이 “이제 사명을 다했으니 교회를 떠나라”했다는 것은 100% 자기의 생각에서 온 꿈이다. 어떻게 석달 만에 교회를 일으키는 중보의 사명을 다했다는 말인가? 이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하나님을 핑계되고 자신은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오히려 잘믿는 체까지 하는 자가당착에 빠진 자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러한 폐단 때문에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풍토도 함께 있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항상 같이 간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를 사랑하는 수준은 안되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세밀하게 들을 수는 단연코 없다. 자기 생각이거나 마귀에게 속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사역자가 아닌 성도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한 때 주님의 방문을 받고 주님의 음성을 수시로 들었다는 사역자까지라도 오랫동안 바쁘게 사역하는 가운데 사역은 성공하였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상실하고 죄의 유혹에도 넘어져 있는 상태에 오래 머물면,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생각을 심지어는 거짓말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는 경우도 없지 아니하다. 자신이 이혼을 당하고 오랫동안 싱글로 있으면서 어떤 혼자있는 여자 사역자에게 하나님이 결혼하라고 했다고 하면서 접근하여 유혹을 하고는 몇 년이 되도록 결혼하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했을 확률이 높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기름 부으심을 잃어버린 자요,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들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왜 결혼 안하는지 물어보고 그런 잘못을 지적했다고 평소에는 부드럽게 하다가 급기야는 저주를 퍼붓고 자기 본색을 들어내는 자는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아닐 수 없다. 혼자 사는 여자들을 하나님이 결혼하라고 했다고 하고 한 둘이 아니게 접근한다면, 이미 성령이 떠난자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래도 상관없다. 나에게만 잘해주면 된다는 여자 사역자도 미혹되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여자 사역자를 내가 더 잘 알고 같이 사역한 적이 있기에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인데도 결국 관계가 소원해진 이유는 그 유명하고 크게 사역을 하고 있는 남자 사역자에게 다른 여자들도 있는 것을 알고 나서 내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서 왜 빨리 결혼 안하느냐? 그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거나 만약에 말씀하셨다면 너는 불순종하는 것이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생각을 하나님 음성이라고 속는 것도 문제이고, 혹 알고 그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인가? 자신의 음성인가?는 자신이 가장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친밀함의 관계성 속에서 오는 어떤 패턴과 지극히 개인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지속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관계성 속에서 오랫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친밀하게 접한 사람들은 남이 들었다는 음성의 수준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음성인가? 자신의 음성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척도는 그 사람의 믿음과 삶의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다. 또한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대부분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고 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조금 있다가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또 다르게 말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한 것과도 다르게 행동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흔들림이 없고 일관성과 연속성이 있으며,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도 그것에 순종하고 약속을 받기까지 오래 참는 믿음과 인내로 그 음성의 확실성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2:7). jso8485@naver.com
보안국가 Winnie Shin 선교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다른 씨 = 말씀과 이웃 " (창세기 4장 25절 ~4장 26 절)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다른씨' 보여주시므로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신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가인이 쫒겨난 이후, 하나님께서 다시 아담에게 아들을 주십니다.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습니다. 뜻은 '다른 씨를 주셨다' 였습니다. 그 아들 '셋'에게도 아들을 주시는데 이름이 '에노스' 입니다. 에노스가 태어날때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 을 불렀습니다. 아담은 두 아들을 다 잃은 사람들입니다. 아들끼리 미워하여 장남이 막내 아벨을 죽이는 것을 보았던 아버지가 아담입니다. 아벨은 가인이 죽여서 잃었고, 가인은 하나님께서 쫓겨냈기 때문에 잃었습니다.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런 아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빚어져 지은신 초인류 아담과 하와 부부가 부모로서 겪은 고통과 아픔은 구속사적 관점이 중요한 하나님이시니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자녀가 셋있는 저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경험한 아비와 어미였습니다.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셋'이라는 아들을 다시 주십니다. '셋'을 통해 다시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시고 아담 개인적으로는 상처 치유 기회를 주십니다. 이름의 뜻이 '다른 씨를 주셨다' 입니다. 모든것이 절망이고 좌절이었던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다른 씨'를 주시므로 자식 잃은 고통과 아픔속에 헤매이던 아담과 하와를 만나시고, 치유시켜주십니다. '다른 씨' 를 통한 회복의 의지와 메세지를 주십니다. 이것은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들어왔지만, 예수님 한 사람으로 그 죄가 해결되는 '다른 씨' 즉, '다른 길', '다른 대안', '회복의 길' 여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상 거짓과 죄를 용납할 수 없어 대가 치루게 하시되 다시 그 자리에서 '다른 길', '다른 방법'으로 회복의 길 내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느 곳을 가든 저희 같은 사람들(?)은 자녀들의 적응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곳에 온지 2주가 지났고, 아이들 온라인 수업도 7일째 입니다. 정착할 집을 아직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의 생활은 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생각적으로 많은 제한이 있고, 불안합니다. 성령님의 만지심이 없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부분에서는 잘 견디는 편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문제가 부각되는 사건이 터지면 예민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도 막내 공부하는 옆에서 말씀 보고 묵상하고, 성지 관련 영상 보며 활자화된 말씀을 영상화 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막내가 이곳에 적응하기 때문에 영어시간 단어 시험은 반에서 안보고 따로 공부하라고 했다길래 한번 제가 기습 단어 시험을 봤습니다. 한 단어도 100% 맞추지 못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평소에 전 숙제만 잘 해가라 주의입니다. 근데 이런 일이 벌어지면 평소 아이가 했던 게으른 삶이 보여서 화가납니다. 평소엔 큰 애랑 게임하는걸 보면 '팬데믹 쉬는 시간에 형이랑 노니 다행이네' 했다가 이런일이 생기면 기본도 안하고 놀기만 한거 같아 속이 상합니다. 같은 상황인데, 반응이 다른건 제 문제입니다. 순간 막내가 다른 친구들보다 뒤처지는거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가만히 앉아 수업준비하던 큰애까지 불똥이 튀어 마음이 상했습니다. 이시간 후 쉬는 시간에 가서 아들들에게 말씀과 성령께서 조명해준 제 연약함을 나눠야겠습니다. 혈기내서 마음 상한 제게 주님은 막내 친구 엄마로부터 다음주에 저희 집에 찾아주겠다고 합니다. 제가 힘들거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면서 문자를 보냈습니다. 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부분을 다른 사람통해 듣게 하시고 위로의 문자주시고 그분이 저와 막내 방문할 마음 주신 지금 바로 옆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릎을 꿇고 성령으로 세수를 합니다. 하나님 대면할 새 날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가족들을 긍휼히 여겨달라 기도합니다. 전 오늘도 사건 통해 연약함 드러나고, 다시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은혜로 기도받고 위로 받게 하신 하나님 찬양합니다. 가족들은 지금 당장 예민한 절 위로나 격려 못하지만, '다른 사람', '모르는 사람' 통해 '내가 너와 가족 지켜보고 있다. 지금 너는 위로와 도움이 필요하다!' 라고 말씀해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찬양합니다. 말씀 묵상초기엔, 아담과 하와의 자식 잃은 고통이 묵상이 되었는데, 묵상 말미는 제 연약함 가운데, 회복시키시려고, 말씀과 절 모르는 중보자 통해 위로와 회복 주시는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게 오늘 하나님의 '다른 씨는 말씀과 기도하는 잘 모르는 이웃'입니다. 지금 전 여러모로 불안정한 상태임을 인정합니다. 이 또한 지나갈 과정이기에 감사합니다. 일상이 기적인 삶은 제가 얼마나 불안하고 부족한 인격체인지 깨닫는것입니다. 깨닫고 주님께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기적인 삶 주신 아바 아버지 찬양합니다. 모든 영광 아버지께 올려드립니다. jso8485@naver.com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안디옥교회 김승환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도피성]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들과 달리 땅을 분배받지 못했다. 대신 다른 열두지파들이 사는 땅 중에서 48개의 성읍을 받았다. 그 중에 여덟개는 도피성으로 정했다. 요단강 동편에 세 개, 서편에 세 개의 도피성이 있었다. 이 도피성들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은 그곳으로 피신해서 그 해의 대제사장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요단강 서편에 세 개의 성읍 게데스(의, 거룩), 세겜(어깨), 헤브론(사귐) 요단강 동편에 세 개의 성읍 베셀(요새), 라못(고원), 골란(울타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피난처, 도피성이 되신다. 우리는 위험에 처하거나, 외로울 때, 두려울 때, 죄의 유혹이 찾아올 때, 함정에 빠질 때 도피성 되신 주님께로 달려갈 수 있다. 아멘. jso8485@naver.com
원주 온누리침례교회 조민수 담임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눅 9:4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오직 복음으로 살아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주시며 3가지 사역, 즉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고 고치는 사역을 하게 하십니다. 그런 가운데 한 마을에서 어느 집에 머물면 거기서 머물다 거기서 떠나라 하십니다. 한 동네에서 자신을 초대한 집이 있는데 또 다른 집으로 옮겨가면 원래 자신의 집을 내어주었던 사람이 혹 상처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불필요하게 생길 오해와 섭섭함을 생기지 않게 해야합니다. 생사가 걸린일이 아니라면 복음이 가려지지 않도록 참고 또 인내해야합니다. 성도로서 사소한 일과 사소한 물질에 연연해서 복음이 가려지지 않도록 늘 주의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복음만을 위해 살아가는 하루 되길 소원합니다. jso8485@naver.com
충신교회 전 담임 박종일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다 (막 6:1-13) οὐχ οὗτός ἐστιν ὁ τέκτων, ὁ υἱὸς τῆς Μαρίας καὶ ἀδελφὸς Ἰακώβου καὶ Ἰωσῆτος καὶ Ἰούδα καὶ Σίμωνος; καὶ οὐκ εἰσὶν αἱ ἀδελφαὶ αὐτοῦ ὧδε πρὸς ἡμᾶς; καὶ ἐσκανδαλίζοντο ἐν αὐτῷ. (Mar 6:3 BGT) "Is not this the carpenter, the son of Mary, and brother of James, and Joses, and Judas, and Simon? Are not His sisters here with us?" And they took offense at Him. (Mar 6:3 NAS)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Mar 6:3 NKR)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전도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습관을 좇아 안식일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회당 예배는 개방적이어서 회당을 방문한 선생에게 회당장이 성경을 강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많은 사람들 감동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하며 크게 놀라워 했습니다. 사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과 거의 삽십 년 동안 함께 살면서 그의 성장과정을 모두 지켜보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누구보다 소상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하며,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과 지금 예수님을 통해 듣고 본 것들에 대한 괴리를 어찌 정리해야 할 지를 몰라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탁월한 지혜와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오히려 “그의 가르침과 그의 권능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건이냐? 사단에게로부터 온 것이냐?”하는 의심에 휩싸여 결국 예수를 배척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참 믿음과 거짓 신앙의 차이점인 것입니다. 즉 예수의 초월적 권능에 대해 참 믿음의 사람은 “무릎”으로, 거짓 신앙인은 “놀람과 의심”으로 응대합니다. 여기서 마가는 예수님의 가족을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음이 흥미롭습니다.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서의 예수- 이것은 요셉의 세속직업이 목수였고, 예수님은 일찍 세상을 떠난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가업을 이어 공생애 전까지 목수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에 이어서 야고보와 유다, 시몬과 여러 여자 형제를 출산헀다는 것도 기록으로 남겨놓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동정녀 마리아 신앙'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허구로 가득한 신화인지를 본문에서 분병히 보여주고 있음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 중 야고보는 신약성경 "야고보서"의 저자이며, 유다 역시 "유다서"의 저자입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예루살렘교회의 주요 맴버로 활동하였음을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하시고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환자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셨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οὐκ ἐδύνατο ἐκεῖ ποιῆσαι οὐδεμίαν δύναμιν)는 말씀과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ἐθαύμαζεν διὰ τὴν ἀπιστίαν αὐτῶν)는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에 긴장이 발생했음을 보여줍니다. 조심스런 표현이지만 믿음이 없는 곳에는 권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 의심과 배척 만을 일삼는 곳에서는 어떤 권능도 진정한 권능의 순기능을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권능을 제한하신 것입니다.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는 표현도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인하여 "깜짝 놀라셨다"는 말인데 이것은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의 믿음으로 보시고 기이(奇異)하게 여기고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경탄하는 장면과 정확하게 대비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런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은 오히려 예수께서 "모든 촌에 두루다니시며 가르치시"(6:6)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둘씩 둘씩 지역에 있는 마을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6:7-13) 결국 나사렛 사람들의 예수 배척은 더 많은 지역과 더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죽음의 골짜기를 생명의 동산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jso848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