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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성원교회 박충권 목사,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의미'
평택 성원교회 담임 박충권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제목 :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의미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로 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돈에 대해서도 죽고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죽고 세상에 대해서도 죽었단 뜻입니다. 거듭나야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가치관에서 천국의 가치관으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분부하신 모든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고 싶은 사람은 거듭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주님의 나라를 어떻게 세울까에 있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꿈만 남아 있어야 거듭났다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긍휼함을 입었으니 그들에게도 긍휼함이 있어서 모든 것 용납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말로만이 아니고 진실로 사랑을 행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었으면 받드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주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 참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재물은 복음과 구제의 수단일 뿐입니다. 사랑의 수단일 뿐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행합니다. 이미 예수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하려합니다. 행하지 않으면 복음을 누가 전하고 누가 구제를 하겠습니까? 누가 순교를 하겠습니까? 모두가 성경을 암기만 하고 기억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세우겠습니까? 성경 66권은 2000번이상 행하라고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말라 1개의 말씀을 받았지만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섯까지의 말씀을 받아서 다 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십계명을 받았으나 1계명부터 어겼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탐심은 우상숭배라 하셨는데 우리의 꿈은 진정 예수그리스도입니까? 하나님은 실제로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치고 지켜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행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예수그리스도께 드리십시오. 드리면 우리의 마음을 맡아주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장해 주십니다. 다윗은 지켰는데 아들인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를 받아서 기록을 했지만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남으로 버림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집을 깨끗이 청소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공동체가 오염돼서 사망의 냄새가 나는데도 본체 만체하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내가 안하면 누가 우리의 집을 깨끗이 치워주겠습니까? 이미 집이 더러운데 누구를 초대하게습니까? 성도는 옳은 행실이 있어야 안 밖으로 깨끗합니다. 우리 모두 온전한 성도가 되어야 비로서 복을 받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하십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하십니다. 근신하여 깨어있으셔야 합니다. 평안하다 그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늘 깨어서 오로지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여기 저기 죽어있는 영혼들이 가득합니다. 쉴 시간이 없습니다. 목이 터져라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고 구제를 해야 진짜 믿음입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3:10) "이단은 임박할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다고 하셨습니다." (벧후2:1) 이단과 함께하면 이단이 됩니다. 이단을 옹호하면 함께 다 이단이 되고 주님의 책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다섯교회는 책망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버가모교회에 구원파같은 영지주의, 두아디라교회 이단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 사데교회에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라오디게아교회에 열심없는 믿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처음사랑이 있습니까? 이단을 용납하지 않습니까? 구원파처럼 구원만 강조하지 않습니까? 지옥 불감증에 빠져서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복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은 십자가의 처철한 사랑이 날마다 우리 마음에 차고 넘쳐야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찾으면 온전합니다. 전심전력으로 주만 구하시면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이루어 집니다. 말씀을 전심으로 원하면 됩니다. 말씀의 인도함으로 주의 동행하심, 성령충만이 이루어집니다. 복의 길이 열립니다. 십자가의 문을 오늘도 내일도 열고 나가시면 정결한 신부로 살아낼 수가 있습니다. 오직 축복의 통로는 십자가입니다. 그 사랑안에서 은혜를 얻어서 우리도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며 말씀으로 권면하며 온전한 길을 쉬지 않고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달려갈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들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동일한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 없는 자는 믿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순종입니다. 지금은 순종의 시대입니다. 오래도록 참고 달릴 수 있는 힘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맡기시면 됩니다. 마음의 다짐이 온전한 길로 이끄십니다. 주로 마음을 다지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신부로 살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십니다. 그 이유는 지옥에 심판에서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주의 모든 말씀은 하라는 명령입니다. 명령을 따라 살아내는 것이 안다는 것이고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실이시고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가능합니다. 늘 세상만 기념하면서 무슨 성찬의 예배가 되겠습니까? 온전한 성찬식이 있는 교회가 되십시오. 온전히 주의 사랑을 알고 진실로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주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있으면 살아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누가복음 12:35 예수그리스도의 권능은 순종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순종의 날개를 펴고 저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가 있습니다. 이 복을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아멘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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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싱톤중앙장로교회 정지운 목사, '은혜를 받았으면 나누라!'
오륜교회 교육국장 정지운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사무엘상 25장 2-8절 큰 은혜를 받았으면 큰 은혜를 나눠야 합니다. 나누지 않으면 썩게 됩니다. 은혜를 흘러가야 계속해서 생수가 터져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기적으로 은혜를 나누지 않고 고여서 결국은 은혜의 샘물이 썩은 물이 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나발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마온 사람 나발 양 삼천마리와 염소 천마리를 가진 사람 나발이 왕의 축제와 같은 축제를 열자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나발의 목자들이 갈멜 지역에서 양들을 돌볼 때 다윗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을 생각하고 10명을 보내서 축제의 음식을 달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지극히 정중하게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요청에 대해서 나발은 무례하게 말하면서 다윗을 듣보잡 취급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을 하면서 나발은 은혜를 나누지 않는자라는 것을 그에 대한 캐릭터 분석에서 나타납니다. 돈이 있다고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나누게 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지 않으면 우리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나눠야 생수가 흘러갑니다. 나발처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에 와서 은혜를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식사를 대접하며 표현하는 분들을 만날 때 은혜가 고이지 않고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디 오늘 하루 나발처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나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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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하나님의 혼'
아나돗과 함께 읽는 성경 정이신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하나님의 혼(네페쉬) 성경은 영과 혼 그리고 마음(이성)을 통전적(統全的)으로 기능한다고 말하고, 독립된 실체로 기능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시편 11:5>을 보면, 하나님도 ‘혼(네페쉬)’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글번역성경은 <시편 11:5>에서 구약성경에서 주로 ‘혼’으로 번역한 ‘네페쉬’를 ‘마음, 진심’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심한 경우 아예 번역하지 않고 생략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있는 <시편 11:5>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훼가 의인을 세심히 살피시고, 악인과 폭력을 사랑하는 이를 ‘그분의 혼’이 미워하십니다.”(시편 11:5) [김정훈, 시편 렉시오 디비나 1, 새물결플러스, 2021년, 136쪽) 시편에 따르면 하나님께 영만 있는 게 아니라(요한복음 4:24), ‘혼’도 있습니다. 여기에 <전도서 3:21, 에베소서 4:23>까지 연결하면, 영=혼이고 마음(이성)은 이것과 통전적(統全的)으로 기능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복음 4:24) “마음(이성)의 영을 새롭게 하여”(에베소서 4:23) <요한복음 4:24>에 따르면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23>에 따르면 마음(이성)이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23>은 ‘너의 것’이란 표현인데, 이 문장에서 ‘너’가 주체이지 ‘것’이 주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23>은 ‘마음(생각)이 영을 담는 그릇’이란 뜻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영과 혼, 그리고 이걸 담는 그릇인 마음(이성)이 서로 별개로 존재하면서 기능한다는 주장은 완전히 허구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영에 담는 게 아니라 마음에 담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주님께 범죄하지 않으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합니다.”(시편 119:11)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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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배우고 학습하라!'
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Ph.D./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오늘은 학교에서 큰 행사를 치루었다. 목회학 박사 과정 학생들의 구두 시험이 있었다. 각자가 쓴 논문의 대략을 발표하고, 심사하는 날이다. 논문을 심사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떤 분은 정성스럽게 논문을 써왔고, 어떤 분은 성의 없이 다른 논문을 참고해서 써오기도 한다. 정성스럽게 쓴 논문에 대해서는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지만, 대충 써온 사람에게는 좋은 말을 할 수 없고, 쓴 소리를 하게 된다. 그런 자리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떤 모습으로 나와서 발표하는가도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무슨 시장 바닥을 나오듯한 복장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상식과 교양에 속한 문제 아닌가? 어떤 분은 학사 과정에서 시작해서 박사과정을 마치는 분도 있었다. 10년을 공부해서 오늘이 있게 되었다. 대단한 인내와 열정이 아니고는 이 자리에 올 수 없어서 아낌없는 칭찬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학문도 그렇겠지만, 신학의 분야에서는 배울 것이 끝이 없고, 성경 하나만도 그 배워야 할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다. 배운 사람과 배우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겸손에 있다. 정말 배운 사람은 그 학문의 세계의 높이 앞에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데 겨우 변죽을 배워 졸업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이 자기 자신의 지식과 학문을 자랑할 수 있을까? 없다. 그런 학문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아는 것을 자랑하고, 더 나아가 고집 세고, 교만한 삶에 빠지기 쉽다. 어느 학교에 나이 70이 넘은 부부가 신학 공부를 위해 찾아왔다. 한 학기를 마치고 나누는 소감에서, 자기가 한 학기 성령론을 배우다 보니, 교회 안에 지도급 신자들이 모두 와서 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배워야 할 것이 많고, 배워서 유익한 것이 많은 데, 그걸 모르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 정말 그렇다. 특히 이민 교회 현실은 부부 모두가 일터에 나가 사는 가정이 많기 때문에 낮 시간 교회 와서 배울 시간과 여건이 되지 않는다. 저녁에는 모두 피곤해서 돌아오는 데 무슨 교육을 실시할 수 있을까? 성경에 대한 교육이 미천하다 보니,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하는 일이 쉽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이 우선하기 쉽다. 이민 교회가 쉽게 출렁거리는 이유가 그런 교육의 부재에 있다고 본다. 사람이 배워야 하는 이유는, 사람은 자기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결국 자신의 실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배움에 소홀한 사람은 무식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안타까운 사실은 사람은 자기자신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배운 사람만이 그것을 알게 된다. 배우지 않으면 고집이 늘고, 사람 관계가 힘들어 진다. 자기 밖에서 자기를 볼 수 있는 것도 배움을 통해 가능하다. 대부분은 자기 안에 갖혀서 자기를 보기 때문에 자기 실상을 알지 못한다. 예전 읽었던 글에,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자기 신체 밖으로 나가서 자기를 내려 본다고 한다. 그 동안에는 자기 안에 갖혀 살았다는 뜻인가? 자기 밖에서 자기를 보아야 자기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잘 배워야 하는 이유는 성경은 사람의 실상을 거울처럼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성령의 도움 속에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성령 안에서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이 늘어 가면 고집이 세진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 말도 배우지 않고 살기 때문에 듣는 말이 아닌가, 싶다. 學以時習之 不亦悅互!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복습하면 그것이 기쁘지 않으냐," 옛날 한문 시간에 배운 말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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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도움의 손길!'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사무엘하 17:15~29 도움의 손길을 통해 길을 여시는 하나님 다윗의 친구 후새는 다윗왕을 돕기 위해 애를 씁니다. 후새는 압살롬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전했습니다. 후새는 “오늘 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라.”라는 당부를 두 제사장에게 전했습니다. 후새는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다윗왕과 백성들을 지켜주기를 원했습니다. 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은 후새의 전갈을 자기 두 아들인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전했습니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후새의 전갈을 다윗왕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찮았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에느로겔 가에 머물러 숨고, 어떤 여종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곧바로 다윗왕에게 가서 후새의 전갈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청년이 이 두 사람을 보고 압살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급히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어 아무도 우물 안에 두 사람이 있는지를 눈치채지 못하게 했습니다.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들이닥쳤을 때, 집 여인은 이미 두 사람이 시내를 건넜다고 거짓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도움으로 두 사람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후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다윗왕에게 나가 후새의 말을 전했고, 빨리 물을 건너도록 재촉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모든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압삶롬의 모사인 아히도벨은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압살롬은 요압을 대신하여 아마사를 군 지휘관으로 삼았고,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은 길르앗 땅에 진을 쳤습니다.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 세 사람이 다윗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소비와 로데발 사람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각종 음식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들은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행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사독의 전갈이 다윗왕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면서도 긴장감을 줍니다. 그러나 긴장감이 느껴지는 장면 속에서도 마음 따뜻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윗을 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에느로겔 가에서 도왔던 어떤 여종 이야기, 바후림 어떤 집 여인의 헌신적이면서도 용기 있는 조력 이야기, 다윗과 사람들의 시장과 곤고와 목마름을 해결해 주기 위해 음식을 싸 온 세 사람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저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히도벨의 자살 이야기를 통해 장차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회복시키실지를 기대하게 해줍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도우셨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저의 삶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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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홀리원교회 이동구 목사, '최초의 남은 자!'
캘리포니아 홀리원교회 담임 이동구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창세기 7: 23 최초의 남은 자 first remnant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Every living thing on the face of the earth was wiped out; people and animals and the creatures that move along the ground and the birds were wiped from the earth. Only Noah was left, and those with him in the ark. 하나님은 죄악이 가득 찬 세상을 대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악을 대 홍수로 심판하실 때 인간과 육지와 하늘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멸절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을 멸절 시키는 심판을 행하실 때에도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가족들을 보호하시고 남기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삶을 살아간 노아를 의로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창 7: 1; 히 11: 7. 참조) 육지와 하늘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죽어가고 있는 가운데서도 방주에 있는 노아와 가족은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 가운데 안전하게 평강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의 적막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심판의 홍수가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는 체험이 되고 악인에게는 고통스러운 죽음의 현장이 되는 일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 사도의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오래 참는 가운데 기다렸지만 말씀에 복종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의 물이 였지만 그 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세례를 예표하고 있었습니다. (벧전 3: 20, 21. 참조) 오늘날 이 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 세례를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 믿음의 고백을 사람들 앞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 물 세례 예식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믿음의 고백은 불완전하기도 하고 거짓된 것도 있어서 물 세례를 받은 것이 구원의 확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세례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잠기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노아 때의 대 홍수 심판의 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으로 여김을 받아 구원을 받는 사람과 믿음을 거절함으로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있게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심판 받아 멸망에 이르게 될 악인들로부터 믿음을 따르는 의인을 구별하여 남기시고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그분이 선택한 백성과 자녀들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살아가는 귀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저는 이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올려 드립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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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훈육 없는 무시'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사무엘하 14:25~33 훈육 없는 무시는 원한을 품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압살롬의 뛰어난 외모가 소개되는 것은 불안한 징조입니다. 물론 요셉 같은 경우에는 그의 뛰어난 외모 때문에 유혹당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성적을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울 왕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과연 압살롬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압살롬이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된 것은 정치인으로서는 장점이 될 것입니다. 특히 압살롬의 머리카락에 대한 언급은 좀 과장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외모와 달리, 압살롬은 마음에 원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는 딸의 이름을 다말이라 지었는데, 이는 아마도 자기 오누이였던 다말의 수모를 상기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있은 지 만 2년이 되었지만, 그는 왕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에 압살롬은 요압을 왕께 보내기 위해서 두 번씩이나 요압에게 사람을 보냈지만, 요압은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지르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압살롬은 이를 항의하기 위해서 자기 집에 찾아온 요압에게 할 말을 주어 다윗왕에게 보냈습니다. 압살롬은 요압을 통해 자신을 사면(赦免)시키던지, 아니면 자신을 죽이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해 달라고 다윗왕에게 요구했습니다. 결국, 다윗왕은 압살롬을 왕궁에 불러 그와 입을 맞춤으로 그를 사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이 진심으로 압살롬을 용서한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이일이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라는 정치적인 퍼포먼스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둘 사이의 관계마저 친밀하게 회복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흐르고, 압살롬의 뛰어난 외모로 인한 대중의 인기가 상승했습니다. 비록 압살롬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했기에 정치적 활동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오누이가 겪었던 수치와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압살롬은 요압의 보리밭을 불태웠던 것처럼, 언제든지 자신의 폭력성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표출할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입니다. 만약 다윗왕이 이러한 압살롬의 기질을 미리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그와의 관계를 풀어나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나기 전에, 가족들과 대화하고 공감하고 이해해 주는 가장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회 현장에서도 성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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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net 대표 이승제 목사, '하나님의 축복은 변함이 없다!'
가까운교회 이승제 담임목사.(사진제공=가까운교회) 민 22:36-23:12 하나님의 축복은 변함이 없다. 발람은 혹시나 해서 발락의 초청에까지 응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300Km의 거리로 예상되니 얼마나 멀고 긴 여정이었을까? 발락은 이스라엘이 그 만큼 위협적이었고 발람의 저주가 간절했을 것이다. 발람은 바알의 산당앞에서, 그가 아는 어림풋한 지식으로 숫소와 숫양 7마리를 제물로 드리고 여호와께 이스라엘에 관해 물었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변함이 없었다. 늘 불평하고, 리더들에게 대들고,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그럼에도 꾸준히 축복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내가 나를 돌아봐도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않다.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 겨우 사랑할 수 있을 정도다. 내가 이땅에 존재하여 스러지기까지 일향 축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침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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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생명교회 조태성 목사, '한 영혼의 무게 그 중요함(1)'
새생명교회 조태성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한 영혼의 무게 그 중요함! (1) 1. 신학생 시절부터 훌륭한 선배 목사님들에게 반복해서 들었던 말씀이 있어요. <목회자라면 반드시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한 영혼의 무게를 기억해야 한다.> 언제나 당연히 옳은 말씀이라고 동의했지만요. 과거의 저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교회가 빨리 커지고 사람들이 저를 많이 알아주고 불러주는 것이 사역을 잘하는 거라고 여겼어요. 2. 물론 많은 분들에게 은혜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필요하고 좋은 일이고요. 그렇게 쓰임 받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고난을 만나면서, 통과해오면서요. 이제는 제게 원하시는 사역이 무엇인지 조금더 삶으로 배우고 알아가고 있어요. 부족함에도 종종 많은 분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도록 세워주시는 것도 참 감사하지만요. 성령님과 친밀하게 교제 나누며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다보니까요. 제가 날마다 놓치지 말고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길 원하시는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3. 아마도 선배 목사님들께서 그렇게 중요하게 말씀하시던 한 영혼을 섬기는 법이겠지요. 한 영혼이 중요해서요. 많은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말고 한 사람을 만나서 깊이 있게 소통하는 것이 필요해요. 예전에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저도 모르게 하루에도 많은 약속을 잡고 일정들을 계획했었지요. 성령님과 의논하지 않고요. 기도하지 않고 말이죠. 4. 어려운 고난을 만난 분들께서 상담이나 기도 받으시려고 부족한 사람을 찾아주세요. 그분들 중에는 성도님들도 있고요. 절반 가까이는 전도사님들, 사모님들, 목사님들 이시더라고요. 목회자분들이 저를 찾아오시면 가뜩이나 자존감이 낮은 상태이셔서요. 주의해요. 최선을 다해 섬기고 그분이 충분하다 여기실 만큼 시간을 드려요. 상담오실 경우는 여러 사람과 동시에 만나지 않아요. 이후에 거의 다른 일정도 잡지 않아요. 5. <시간이 되어서 제가 다음 약속 장소로 이동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분은 조용히 마음에 상처를 받으십니다. 자존감이 더 떨어질 수 있어요.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심을 느낍니다. 하루는 조금 알려진 목사님께 상담 가셨다가 너무 바쁘신 걸 목격하신 목사님이 계셨어요. 6. 자신은 충분히 상담받지 못했는데요. 1시간 만에 다른 분이 그 장소에 오셨어요. 약속했다면서요. 나중 저를 찾아오셔서요. 그분에게 무시당하는 느낌적인 느낌에 도망치듯 나왔다는 뉘앙스로 하소연하십니다. 예전 제 모습이 생각나면서 부끄럽더라고요. 이제는 다짐하고 약속, 일정을 잡아요. <오늘 상담오시는 한 분만 만나야지!!> 7. 고난을 만나신 분들이 참 많아요. 누구에게나 다양한 모습으로 반드시 다가오고요. 종종 보이지 않는 영적 전투도 치열해요. 이곳에도 본이 되어주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저도 사랑과 섬김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인도하심이 있어서 만나게 되는 분들 한분한분을 제가 부족해서 많이 돕지는 못하더라도요. 충분한 시간 속에 그분들의 깊은 이야기를 들어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겸손히 성령님을 의지해서 필요하신 은혜를 조용히 전해주시는 통로로 쓰임 받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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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열매맺는교회 이재식 목사, '말하는 것!'
충주 열매맺는교회 담임 이재식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말하는 것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말은 힘이 있습니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말의 능력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율법적으로 하는 말은 뾰쪽한 송곳으로 사람을 찌르는 것과 같습니다. 뾰족한 율법적 언어는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낙심하고 절망하게 합니다. 은혜 안에서 하는 말은 추위에 떠는 사람을 따뜻한 이불로 감싸는 것과 같습니다. 따뜻한 은혜의 언어는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희망을 품게 하고 용기를 갖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따뜻한 은혜의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줍니다. 찌르는 율법의 말은 찌르기는 하지만 수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찌르기만 하는 율법의 말에는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따뜻한 은혜의 말은 우리의 나쁜 부위를 수술해 줍니다. 따뜻한 은혜의 말을 통해 성령님은 역사하십니다. 찌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수술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우리가 하는 말이 뾰족한 율법의 말이 아닌 따뜻한 은혜의 말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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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 '여전한 하나님 은혜'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사무엘하 12:16~31 엄중한 심판 후에도 여전한 하나님 은혜 다윗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서 낳은 아들을 치셨습니다. 아이가 심하게 앓자, 다윗은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다윗이 금식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다는 표현은 그의 기도가 간절한 기도였음을 나타냅니다. 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염려하여 음식을 권하였으나, 다윗은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아이가 죽은 줄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한 후에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아이가 죽기 전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됩니다. 아이가 죽기 전의 다윗은 정적이고, 고난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은 후의 다윗은 동적이고, 연쇄적인 활동이 도드라졌습니다. 그의 신하들이 다윗의 행동을 이상히 여겨 묻습니다. 다윗은 아이가 살았을 때 자신이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셔서 아이를 살려주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가 죽었으니, 자신이 어찌 금식하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다윗은 아이가 죽은 후에는 그것을 돌이킬 수 없고, 오직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태도는 현명합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지만, 내 기도가 여호와의 뜻을 돌이킬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아이가 죽은 것은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징벌이었습니다. 다윗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일상의 삶으로 신속하게 복귀했습니다. 저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또한 슬픔을 당한 후에라도 일상의 삶으로 신속히 돌아올 힘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려는 마음에 있음도 깨닫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다윗의 일상을 축복해 주십니다. 물론 칼이 그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리라는 예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삶을 회복해 주셔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솔로몬이 태어나게 하시고, 아기의 이름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 여디디야로 불러 주셨습니다. 또한,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자, 요압의 요청을 받은 다윗은 군사를 이끌고 랍바로 가서 그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습니다. 다윗은 금 한 달란트짜리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고,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 도끼질과 벽돌 구이를 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과 암몬 자손과의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벌하신 이유도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우리가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징벌 후에라도 우리의 삶의 자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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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열매맺는교회 이재식 목사, '시선의 변화!'
충주 열매맺는교회 담임 이재식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예수님을 만남으로 시선이 변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만나서 나누는 대화는 우리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관심이 있는 곳에 자연히 시선은 멈추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함으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을 무시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사마리아 여인의 시선은 마시는 물에 머물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는 물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자신의 필요에 시선이 머물러 있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남편을 데려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시선은 자신의 남편에게로 옮겨졌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자신은 남편이 없다고 말하였지만 자신의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여인의 시선은 예수님께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과 대화 하면서 여인 관심은 예배로 옮겨졌고 마침내 예수님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은 다르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모두 시선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의 시선이 참된 예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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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 '승리하는 삶!'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사진제공=제자순복음교회) “승리하는 삶” 고난과 위기 앞에서 두려워하고 걱정한다. 사람 앞에서는 의연해야 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은 척하지만, 그 마음을 잘 아는 주님 앞에서는 애쓰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의 사람도 두려워하고 걱정할 수 있다. 항상 괜찮을 순 없다. 힘든 것을 다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주님 앞에서는 그 마음 그대로 드러내도 괜찮다. 사랑의 주님이 그 말 못하는 마음을 얼마나 잘 아는지,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토록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가. 주님은 걱정하고 있고, 두려워 떨고 있는 그 마음을 안다. 주님 앞에서 무슨 부끄러움과 초라함을 감출 이유가 있는가.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면 된다. 주님은 결코 그 마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말만 하지 않는다. 함께 하면 돕는다.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한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는가?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는가? 주님이 항상 함께 하는 삶, 그것이 언제나 최고의 선물인 것은 그 약속의 말씀은 항상 신실하고, 이미 성공한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발견하고 평생을 주님만을 사랑하고 섬기고 따르기로 결정 했다.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소명의 자리로 나아간다. 이 땅에서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명에 충성한다. 그 어떤 걱정과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한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니 끝까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전쟁터로 나아가 싸운다. 어떤 희생과 헌신도 주저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한다. 때때로 보이는 현실에 마음이 흔들려 걱정하고 두려워하지만, 성령 하나님이 그 마음을 붙들어 주니 순종의 자리로 돌아간다. 삶의 자리에서 살아내고 견뎌내고 싸워야 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지만, 그 삶을 허락하고 감당하며 승리로 인도하는 분은 나의 하나님이다.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이 끝이 아니다. 승리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여전히 살아 있기에 소명은 계속된다. 작은 승리를 축하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간다. 실패의 자리에서 힘겨워하지만, 그곳에서 머물지 않고 다시 일어나 목적지를 향해 간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할 때, 신실한 하나님의 승리의 경험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나니 너는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그에게도 행할지니라 이에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백성을 다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의 땅을 점령하였더라” 민 21:34~35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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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
스위스한인교회 담임 김정효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사도행전 10:1-8)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일이니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바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사도행전 10:1-5)“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전파된 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을 때에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 이러라! (사도행전 10:34-46)“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首長)인 <베드로>를 로마군대의 백부장이며,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보내, 그 집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베드로가 보는 앞에서 그 집 식구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심으로써, 베드로와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민족들도 동일하게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 위주>의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바울 사도>는 이 <이방인 전도>를 위해 그의 삶을 <헌신>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 역사적 사건을 위해 <고넬료의 가정>을 선택하셨을까요? 고넬료의 가정은 주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사도행전 10:1)“ 한마디로 <소망이 넘치는 가정>이었습니다. (1) 온 가정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었습니다. (2) <구제를 많이> 하는 가정이었습니다. (3) <항상 기도>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은 <작은 천국>입니다. <천국 백성>에게는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이 이처럼 <가정천국>을 이룬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을 가정답게 하는 것은 가족들간의 끈끈한 <사랑>입니다. 가정이 좋은 것은 이 사랑으로 하나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안식처>이고, <천국>입니다. <주님의 낙원>이 좋은 것은, 그곳은 모두가 사랑으로 하나된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이 <사랑>으로 <가정 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주님의 이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1. 이 사랑은 <책임져주는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누가복음 15:4-6)“ 다른 사람들에게는 양 한 마리가 소중하지 않을지 모르나, 이 목자는 목숨 걸고 책임질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양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희생하신 것은, 당신의 목숨을 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 이여,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 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사야 53:5-9)“ 참사랑은 상대방을 책임지기 위해서 목숨까지라도 버릴 수 있는 사랑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11-15)“ 미국 <뉴욕>의 <성 요한 교회>는 매년 한번씩 <성 프란치스코(San Francesco d'Assisi, 1567-1622)>를 기념하는 예배를 갖습니다. 이 날은 <성 프란치스코>의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 신자들이 집에서 기르고 있는 모든 애완동물도 함께 데려오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자>로 불리는 <프랜치스코>는 그의 설교시간에는 지저귀는 참새들을 조용하게 만들고, 사나운 짐승들도 온순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그가 수중에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가 입은 값비싼 옷을 걸인들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리고서는 자신은 걸인의 누더기를 걸친 채 귀가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종종 <문둥병 환자>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걸인들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여, 진정 행복과 평화를 원하는가? 그러면 먼저 마음을 비워라! 그리고 그 빈 곳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채워라!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분노와 탐욕은 눈처럼 녹아 내린다! 사랑은 내 안의 나를 비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7-28)“ 2. 이 사랑은 <섬김의 사랑>입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3-15!“ 필리핀의 유명한 부자 사업가의 아들 <카풍카우>라는 청년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학교에 가 보니 화장실과 욕실이 너무 불결해서 학장에게 가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학장님,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깨끗하게 청소 좀 해주세요!” “알았네, 내가 다 알아서 조치할 테니 가 있게!” 잠시 후에 이 학생이 그 화장실에 다시 가 보았습니다. 안에서 요란하게 씻고 닦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청소부를 데려다가 청소하는 줄 알고 들어가 보니 학장님이 직접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학장님이 청소를 하다가 이 학생을 보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들어오게! 이제 곧 개끗해질테니 염려하지 말게!” “학장님, 청소부 데려다가 시키면 될 텐데 왜 직접 화장실 청소를 하십니까?” “교회나 신학교에서 이런 일은 먼저 보는 사람이 해야 하는 걸세!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네! 힘으로 해결하는 것도 아니네!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솔선해서 청소를 하게 되면 우리의 환경은 얼마든지 깨끗해질 수 있는 걸세! 부잣집 아들인 자네가 여기 와서 보니까 좀 불결해 보일 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네! 그러니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솔선해서 수고를 해준다면, 이 학교의 환경은 자네가 바라는 만큼 충분히 깨끗해질 수 있는 거라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代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5-28)“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3. 이 사랑은 <용서의 사랑>입니다. (1) <무조건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 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6:14-15)“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이 매우 심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백인 남자가 자기집 정원에서 한가롭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 해어진 옷을 걸친 한 인디언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구걸했습니다. 그 인디언은 매우 지쳐있었고, 극심한 허기와 갈증으로 인해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백인 남자는 빵을 구걸하는 인디언에게 '너에게 줄 빵이 없다!‘고 야멸차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매우 목이 마르니,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 잔 주십시오!‘라고 했으나 역시 거절 당했습니다. 몹시도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던 이 인디언은 마지막으로 '정 그러시다면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게 해주십시오!‘ 라고 했지만, 이 백인 남자는 '너처럼 개 같은 인디언에게는 한 방울의 물도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이 백인 남자의 모독적인 언사에 그 인디언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얼마 후에 이 백인 남자가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깊은 산속에서 사냥개를 놓치는 바람에 그만 홀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방향감각도 없이 산 속을 헤매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산속을 헤매다가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는 이제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침 그때 그 곳을 지나던 한 인디언이 그러한 그를 구출하여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그의 원기회복을 위해 기름진 음식으로 후하게 대접하며 충분히 먹고 마시게 했습니다. 그 백인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난 후 가만히 보니, 자기를 구출한 인디언은 바로 얼마 전에 자기가 문전 박대했던 그 인디언이었습니다. 그 백인 남자는 너무도 계면쩍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이 인디언은 조용히 말해줬습니다. "당신이 얼마 전에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지금쯤 당신은 산중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잠언25:21-22)" (2) <끝까지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21-22)“ 미네소타 <크리스챤 크로니클> 이라는 잡지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킴 푹> 여인은 베트남 여인으로 <월남전> 당시 <네이팜 폭탄>이 떨어진 마을에서 온 몸이 불에 데인 채로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와 생존한 사람입니다. 그녀가 <유명인사>가 된 것은 우연히 <종군기자>의 카메라에 그녀의 도망치는 모습이 찍혀, 전 세계 여러 신문에 실렸기 때문입니다. 1996년 워싱턴에선 <월남전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는데 그녀가 초청되어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연설에서 민간인 마을에 폭탄을 투하한 그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면 그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 <죤 머플러>라는 그 비행기 조종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바로 그 조종사입니다! 저의 오판으로 고통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그 일로 인해 그 동안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용서해 주시오! 용서해 주시오!" 그때 <킴푹>여인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합니다! 다 용서합니다! 저는 끝까지 당신을 용서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이 광경에 행사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빌고 용서하는 감격스런 장면 앞에서 눈물을 훔치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자기와 가족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긴 그 당사자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는지를 말했는데, 이는 그녀가 월남전이 끝난 후 이주해온 미국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4. 이 사랑은 <희생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和睦祭)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1서 4:7-11)“ 어떤 <목사>가 한 농가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크리스천>이 아니었지만 믿는 그의 아내는 오랫동안 남편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는 그 집 주인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참뜻을 설명해 줄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농장 주인이 상기된 표정으로 목사에게 와서 빨리 함께 닭장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를 따라 닭장에 가보니 둥지에 암탉 한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그 날개 밑에서 새끼병아리들이 삐죽 삐죽 머리를 내밀고 밖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농장주인이 말했습니다. „저 암탉의 머리에 난 상처를 좀 보십시오! 간밤에 족제비가 피를 빨아 먹었던 부위입니다! 하지만 어린 새끼들이 족제비에게 당할까 봐 꼼짝도 않고 피를 다 빨리 운 후 죽고 만 것입니다!“ 그때 그 목사는 농장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건 바로 인류의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꼭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고통을 다 견뎌내셨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도 있었고, 스스로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분께서 그렇게 하셨더라면 선생님과 나는 영원히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목사의 그 말을 들은 받은 농장주인은 그 말뜻을 깨닫고서 머리를 끄덕였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13-14)“ 이 사랑으로 <가정천국>을 이루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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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채플교회 이광형 목사, '동참해야 합니다.'
도곡동 드누보 문화선교센타 이광형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동참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어떤 일에 동참한다고 했을 때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사람이라면 그 일에 대한 기대감과 자부심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소 동참에 소극적인 이유는 거기에서 느끼는 부담감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극적이든 조금 소극적이든 동참을 하기로 했다면 반드시 갖게되는 공통점은 바로 책임감이라는 것입니다. 동참은 책임감을 필요로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더 강한 책임감을 감수하고자 한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이고 책임감에 부담을 느낀다면 동참하는 일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그 일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부담감을 뒤로 한채 책임감을 가지고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서는 어떻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에대한 적극적인 동참을 이루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받음으로 족하다 여기며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나를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달리신 주님의 십자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며 갖는 생각일 것 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실을 믿으며 베풀어 주신 그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것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갖게되는 공통적인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잘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은혜와 사랑을 묵상하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반드시 함께 공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살리고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나의 죄 때문에 주님이 나 대신 달리신 것이기때문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4:25)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위해, 곧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살아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 고백을 오늘 여러분의 입술로 선포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를 따라서 고백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죄 때문에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의롭다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는 추상적이거나 일방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는 일 년에 한 번 씩 우리의 묵상을 위하여 고난주간에 필요로 하는 요소일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나의 신앙의 중심에 그래서 나의 삶을 에워싸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 년에 한 번 쯤 참여하고 가끔 힘들거나 은혜받고자 할 때 찾아보는 종교적인 것으로 취급 되어질 수 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주님의 은혜와 사랑만 바라보며 만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그 사랑을 이성적이고 지식적으로 충분히 알고 돌아가라는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결코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게 될 지언정 진정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깊이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나 때문에, 나의 범죄 때문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먼저 이 사실을 생각해야 할 책임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참하기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라는 것이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동참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오늘 말씀을 통해 자세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여러분은 이제 이 고백에 동의하십니까? 이것은 그저 바울의 신앙이고 바울의 고백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우리는 말씀을 통해 오늘같이 본문을 읽을 때에 은혜 받으면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은혜와 사랑에만 머물고 있는것이 아니라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단순히 주님이 달리신 주님만의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자신도 달린 주님과 자신의 십자가였습니다. 비록 실지로 똑같이 못 박힌 것은 아니지만 바울은 주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는 자신의 죄악 때문임을 알기에 먼저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책임감을 가지고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을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님과 함께 자신도 죽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것은 동참하지 않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과 함께 죽지 않고는 누구도 언급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실지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이나 우리는 똑같이 그러한 죽음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때문에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으신 주님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는데,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의 죄와 함께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여기서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죽으셨음을 고백하며 십자가에 동참해야하는 까닭이 바로 주님이 나 때문에 내 죄와 함께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은 그저 주님께 맡겨 드린 내 죄의 일부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나 상황 때문에 미처 다 내어 드리지 못 한 내 죄의 또 다른 한 부분은 죽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모든 죄, 곧 죄인 그 자체인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혔고 주님과 함께 죽었기에 이제 다시 사신 주님으로 인하여 이전의 내가 아닌 주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는 나로 변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동참입니다. 그리고 이전의 나는 죽고 오직 내안에 계시는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삶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은 주님의 십자가는 긍휼과 은혜이고 무한한 사랑과 구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먼저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과 은혜는 공허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구원의 감격은 있는데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 하고, 부활은 믿는데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그 능력으로 살아가지 못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본다면 또 다시 다른 은혜만을 운운할 것이 아니라 다시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에 오늘도 나는 동참하고 살아가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까? 아니면 못박히신 주님만 바라보고자 하십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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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한인교회 에스더윤 전도사, '마음의 눈'
은혜한인교회 에스더윤 전도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Grace Time]-마태복음 6:1-34 [마음의 눈]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마음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행동을 한다면 1절에 말씀처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모든 것을 은밀하게 행하는 자일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1절).”라고 하셨습니다. 4절에 구제할 때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고, 6절에 기도할 때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하라 하셨으며, 18절에 금식할 때도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은밀하게 행하는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하나님의 눈에만 보이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구걸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을 잃어버린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적으로 종교적 관행을 행하는 것을 비난하셨습니다.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면 위선적인 가짜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내 마음의 눈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은밀하게 행한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모르게 내가 행한 사랑과 믿음의 행동 그리고 아름답고 좋은 생각으로 시작한 모든 것들을 주님이 아십니다. 내 마음의 눈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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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교회 정영구 목사, '가치 싸움'
하나교회 정영구 담임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가치 싸움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머리가 나쁜 것도 죄입니다. 무지, 오지, 망지, 맹지, 모두 죄입니다. 몰라도, 왜곡해도, 잊어버려도, 맹해도 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머리 쓰고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머리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자꾸 마음먹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진리지식입니다. 그런데 진리지식이 아니라 사망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싸움이 지식싸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내 몸의 흔적이 죄입니다. 온갖 죄가 보이니까 당연히 사망지식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망지식은 매일 옳고 그름을 따집니다. 판단은 괜찮은데 심판까지 가면 안 됩니다. 최종적인 심판은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데 인간이 합니다. 지옥 갈 놈, 천국 갈 놈 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는데 방 하나를 보여주지 않아서 도대체 그 방에 누가 있을지 궁금했다고 합니다. 보여 달라고 하니까 시험에 들까봐 못 보여주겠다고 하기에 그래도 보여 달라고 졸라서 봤다고 합니다. 보니까 그 방에는 자기가 땅에 있을 때 지옥에 갈 놈이라고 생각했던 그 놈들이 다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심판자가 되어서 지식을 옳고 그름으로 얘기합니다.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인데 거기에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독으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쁜 일이 온 가족을 뭉치게 만들고 화해하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옳다 그르다, 옳다 그르다 하고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 하지 말고 예, 아니오 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과 예, 아니오의 차이가 있습니다. 옳은 것은 하나님이 되고 그른 것은 사단이 되는데 예, 아니오는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예, 아니오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예입니다. 예, 아니오는 가치중립이지만 옳고 그름은 이미 그 안에 마귀의 자식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망지식은 매일 옳고 그름을 얘기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진리의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지식이 결국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살아가는 내 삶은 모호합니다.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때 사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습니다. 구치소에 가보면 아리랑이든 강도든 다 이해가 됩니다. 강도는 물건을 움친 사람인데 대통령은 나라를 훔친 놈입니다. 그런데 나라를 훔친 사람은 바깥에 돌아다니고 강도는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변호사하고 판사하고 검사가 얼마나 나쁜 놈들인지를 얘기해 줍니다. 예를 들어 천만 원을 갖다 주면 7년 살 사람이 3년 산다고 합니다. 강도는 2천 만 원을 훔쳐서 감옥에 들어가서 천만 원을 변호사한테 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죄는 얘기하는데 사회적인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 둔감합니다. 또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은 늘 구조적인 공의의 죄를 얘기했는데 우리는 매일 사적인 죄에 대해 생각하고 삽니다. 그것을 사사화라고 합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기준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준은 있습니다. 기준은 분명히 있는데 그런데 그 기준으로 내가 하나님처럼 심판자가 되어서 심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어놔야 합니다. 나중에 에베소서 마지막에 가면 혈과 육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싸움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싸움을 지금의 언어로 얘기하면 가치싸움입니다.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도덕과 어떤 윤리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지 저 사람은 나쁜 놈이야,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하고 혈과 육이라는 개념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 사람을 잡고 있는 정신이 있는데 그 정신과 싸워야 합니다. 내가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혈과 육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 싸움입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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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죄의 불감증'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죄의 불감증 ♧ 팔월 대보름날 고개를 넘어 큰집에 다니러 가는 부자(父子)가 있었다. 아들은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으나 아버지는 불신자였다. 그런데 길 가던 도중에 아버지가 목이 마르다며 아들에게 "얘야, 갈증이 많이 나는구나. 마침 저기 무밭이 있으니 무 한 개만 뽑아 먹어야겠다. 너는 여기서 누가 오는지 망을 잘 보거라" 아버지는 아들의 대답도 듣지 않고는 바삐 무밭으로 들어갔다. 마침 다리통 만한 무를 발견하고 막 뽑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아들이 "아버지 누가 보고 있어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아이코 큰일 났구나' 싶어 밭머리로 신속하게 나와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놈아 아무도 보는 이가 없지않으냐? 남자는 간이 커야지. 똑똑히 지켜!" 하고는 다시 무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번에도 막 무우를 뽑으려는데 아들이 "아버지 누가 봐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급히 뛰어나온 아버지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조금 화가 난 얼굴로 "도대체 누가 보더냐?"라고 다그치자 아들이 "하늘과 별이 그리고 저기 보름달이 보고 있어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턱없는 아들의 말에 짜증 난 말투로 "이놈아 똑똑히 지켜!"라고 윽박지르고는 다시 무밭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막 무를 뽑으려는데, 아들이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아버지 진짜 누가 보고 있어요."라고 했다. 놀란 아버지는 헐레벌떡 뛰어나와 "누구냐?" 숨찬 목소리로 아들에게 힐문했다. 그러자 아들이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계시잖아요?"라고 하며 오히려 아들이 불편한 듯한 태도로 아버지를 나무라듯 대답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너무도 진지하게 자신을 책망하듯이 대답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꼬리를 내렸다. 아들에게 다소 부끄러웠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평소 익숙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얘야, 아빠가 잘못했다."라고 하면 될 것을, 아들의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가자, 장난으로 그래 봤다."라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과연 누가 이 아버지에게 정죄의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머지않은 미래에 하나님 앞에 설 때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 것이 우리네 인생사가 아니던가? 한 사회의 사회화가 주도하는 문화적 양심에 준거하여 윤리와 도덕의 가치관이 사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사람 사는 양식이 별반 차이가 없어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하지 않을까 싶다. 신앙세계의 성경적 윤리와 도덕의 가치관과 거리가 먼 일반 불신 사회의 도덕률은 인생의 양심에 준거할 뿐이다.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제 마음, 곧 제 양심의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취한 행동에 대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흥분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게 된다. 의의 준거가 없고, 행동의 안천 장치가 없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시내산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부여받기 전까지는 인간행동이 죄의 영역 안에서 절대 영향을 받았음에도 그것이 죄임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렇다고 시내산 율법 이전의 모든 세대가 지은 죄가 죄일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죄임을 알았던 몰랐던 죄의 정죄 아래서 자유할 인생은 아무도 없다. 다만 율법이 온 후로 죄가 무엇이며, 죄의 본질과 특성과 속성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죄의 결과가 영원한 사망임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무엇보다 죄는 사죄 받아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가 있고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대속을 통한 속죄임을 알게 되었다. 이를 우리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없었고, 율법의 정죄를 통해 사죄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위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순전히 자연인으로서 율법의 존재도, 정죄도, 사죄의 필요성과 절대성도 몰랐다. 다만 양심의 준거에 의한 도덕적 존재로서 최소한의 부끄러움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은 성격적 윤리 기준에서 아버지의 범죄 현장을 극복하고 있었다. 이것이 율법의 정죄를 통한 죄인임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연인과의 차이점이다. 사람이 자신의 양심이나 성경의 율법 앞에서 정죄를 피해 갈 수 있는 인생은 제 아무리 '법 없이 살 수 있다'라고 자부하거나 타인의 인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성역도 예외도 없다. 그러나 은혜의 법은 다르다. 은혜의 법은 정죄가 주어가 아니다. 용서를 전제한 회심(回心)이 주어다. 곧 회개와 신앙을 합성한 것이 회심이다. 죄는 회개하고 회개한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힘입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받고 믿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첫 사역의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위 이야기 속의 아들을 보자. 얼마나 순수한가? 맑고 깨끗한 옹달샘의 생수 같은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가? 예수님은 이런 아이들을 모델로 세우시고 때묻은 어른들을 향해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누가 이야기 속의 아버지에게 정죄의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적어도 우리 기성세대들의 위선과 겉치레적인 양심에 비추어 봤을 때, 부끄러움과 잘못된 용기에 최소한의 진솔함을 가진 평범한 사회적 존재로 평가된다. 오늘날 흔히들 말하는 얼굴에 철판을 깐 철면피는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낙인찍힐 만큼 최악의 유명세를 치르는 인사들이 정계에도 경제계에도 교육계에도 종교계에도 제야의 묻힌 인사들에게도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지천에 깔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를 우리는 횡단하고 있다. 날마다 자신을 쳐서 십자가의 도 앞에 복종시키려 몸부림쳤던 곤고한 인생 바울 사도처럼 우리 그렇게 날마다 정신 차리자고 목매어 호소해 본다. 더 가지면 어떻고 덜 가지면 어떤가? 어차피 이 땅에서 살 동안 다 소비하고 가야 할 것들이 아니던가? 더 소중한 것, 그리스도의 소유권에서 제외되거나 버림받지 않기를 위해, 그리스도의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기를 위해, 주님으로부터 부인 받는 불법을 행한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위해, 몸부림친 바울의 길에 꿋꿋하게 서서 십자가의 복음 꽉 붙잡기를 주문한다(고전 9:27).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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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 '기여하는 삶'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사진제공=제자순복음교회) “기여하는 삶” 부모는 자녀를 향한 비전과 기대가 있다. 그렇다고 부모 자신의 비전과 기대를 자녀에게 주입하여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진 않는다. 부모는 자녀 스스로가 인생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고, 자신을 향한 오리지널 디자인을 찾고, 그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길 바라고 기도한다. 부모는 자녀의 삶을 통제하며 주도하지 않고, 인생의 소중한 목적과 가치들을 삶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온전히 찾아갈 수 있도록 인도한다. 부모가 자녀의 인생을 대신하여 살아가지 않고, 그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찾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한다. 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온전히 찾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기꺼이 훈련하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어떤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여 일어서며 끝까지 완주하길 바란다. 이것은 개인적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끝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으로 인하여 가정과 사회에 선한 영향력과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기여하는 인생을 살길 바란다. 개인주의 성향의 강함을 넘어 이기적인 자세에 익숙해진 지금의 상황에서는 가정과 사회에 기여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이고, 삶의 목적과 자세라는 것을 잘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것이 옳고 선하고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보다 조금 더 먼저 살아가며 인생의 소중한 목적과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간다.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하나님이 진정한 인생의 주인임을 삶으로 표현한다.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기쁘다는 것을 삶으로 경험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보호와 인도, 훈련과 성장, 끈기와 성취가 내 인생의 멋진 내러티브를 만든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인생에서 풍성한 선물을 잘 누리고, 잘 사용하길 바란다. 하나님은 그 선물을 가지고 그 인생을 통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인생이 주도적으로 그 선물을 누리고, 잘 사용하길 바라고 기대한다. 하나님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거룩과 정결이지, 통제와 억압이 아니다. 거룩과 정결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인정하고 의지하는 삶의 기본기이다. 거룩과 정결한 마음과 삶의 자세는 그 풍성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나타낸다. 자신의 부요함은 누군가를 부요케 하는 도구이고, 자신의 성공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선한 능력이고,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은 하나님 나라의 한 지체로 그에 합당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잘 사용한다. 부모가 자녀의 삶을 향해 바라고 기대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길 원하고, 그 풍성한 삶이 개인을 넘어 가정과 사회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길 바라고 기대한다. 다양한 인생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그 다양한 삶으로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길 바라고 기대한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민 18:20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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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성원교회 박충권 목사, '십자가에 붙잡힌 삶'
평택 성원교회 담임 박충권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제목 : 십자가에 붙잡힌 삶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사도행전 3:19 누구나 십자가에서 마음이 고쳐져서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으로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지신 십자가의 사랑을 보고도 마음이 거듭나지 못하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주님은 회개되어 고쳐진 우리의 마음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전이며 지성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룹니다. 찬양이 사랑의 마음을 타고 하나님의 보좌까지 이릅니다. 십자가 보혈의 감격이 살아 있는 마음들이 모이면 거룩한 교회가 됩니다. 온전한 충성을 가진 빌라델피아 교회의 성도들이 됩니다. 그들은 작은 능력으로도 말씀을 지키며 예수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배반하지 않는 것이 회개요 거듭남입니다. 교회 건물를 위하는 것은 주님의 몸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웅장함이 거룩함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가정 집에서 예배를 드렸어도 그 믿음은 온전했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진실로 십자가에 붙잡힌 사도바울처럼 믿음을 지켜내야만 구원 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골로새서 2:8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된 영혼들입니다. 그 영혼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큰 기쁨입니다. 그 영혼을 사랑하며 전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누구나 믿음을 점검하고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언제나 영혼구원에 있습니다. 교회를 위하는 것은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원하는 이들이 교회요 성전입니다. 그 마음으로 보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평안합니다. 이제는 우리도 세상은 온데간데 없고 주의 사랑만 보이는 성결한 성전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처음 사랑에 붙잡혀야 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사랑 가운데서 녹아져서 오늘도 주님만을 위한 노래,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지키는 삶이 나를 정금으로 변하게 합니다. 우리가 달려가는 길이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길이면 온전합니다. 천국은 정금으로 되지 못하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의 문은 12 진주문입니다. 진주로 바뀌지 못하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온전해야 천국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꿈이 달라지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꿈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꿈과 같아지면 됩니다. 큰 집의 꿈, 좋은 차의 꿈, 높은 자리의 꿈에서 벗어나서 더욱 좋은 예수그리스도의 꿈을 이루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먼저 내 자신에게 날마다 가르쳐 지키게 해야 남도 가르쳐 지키게 할 수가 있습니다. 전도는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오직 함께하면 십자가의 죽으심이 전해집니다. 바라면 알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꿈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세상과 더 이상 타협하지 마십시오. 어찌 지옥과 벗이 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겠습니까? 오늘 지켜 내면 내일도 지켜 집니다. 오늘 생명이면 내일도 생명이 됩니다. 지키는 것이 우리의 푯대입니다. 사랑을 지키면 천국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성도의 온전한 행실은 말씀을 지켜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 복을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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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
스위스한인교회 담임 김정효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사사기 6:11-18)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 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호와 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 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 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 를 보낸 것이 아니냐?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 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 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기드 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 소서!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 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 (사사기 6:11-18)“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위해 <성심성의(誠心誠意)>를 다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생활의 필수 조건 이요, 가장 소중한 <지도자의 덕목>입니다. 자기의 맡은 일을 위해 성심성의를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회기능의 각 분야에 이처럼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들이 포진하게 되면 그 사회는 매우 건강하고 안전 한 사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해서 <필요한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은 개개인이 지닌 지식이나, 능력이나, 경험이나, 권세가 아닙니다. 비록 작은 일이래도 맡겨진 일을 위해서 성심성의를 다하는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 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찌어다(마태복음 25:21)“ 사사기 6장과 7장의 말씀에는 한낱 농사꾼에 불과했던 <기드온>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사 사(士師)>로 선택이 된 후, 단 300명의 지원자들만으로 수만 명의 침략자들(7:12)을 궤멸시켰다는 역 사적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물론 이 같은 승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 결과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왜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선택>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1. <기드온>은 <자신의 무능함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 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 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 이다! (6:14-15)“ 본문에 보면 기드온은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이는 기드온이 자신의 무능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도 자신의 공으로 돌려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을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애굽의 모든 학문을 익히고, 왕도(王道)교육까지 받았던 모세였지만, 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사용하시기 위해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그의 장인의 양을 치면서,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처절히 깨닫고 고백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장장 40년 세월이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 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가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리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 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너는 이 지팡이를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출애굽기4:10-17)“ <에든버러 대학(University of Edinburgh)>의 <제임스 심프슨 경(James Simpson, 1811-1871)>은 <진통제>를 발견해서 고통 없이 수술을 받게 했습니다. 그것은 의학계의 노벨상감이고 대 발견이었습니다. 그의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노교수 심프슨 경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생에게 가장 뜻 깊은 <소중한 발견> 한 가지를 들라고 하면 무엇을 들겠습니까?“ 그는 한참 동안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2. <기드온>은 스스로를 <작은 자>로 여겼습니다.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 이다! (6:15)“ 본문에 보면 기드온은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서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이니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크게 여기는 자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작게 여기는 <겸손한 신앙의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해 주시고 또 높여 주십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스스로를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여기는 <겸손한 신앙의 사람>이었던 <바울 사도>를 <이방선교>의 <위대한 도구>로 사용해주신 것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 치 못할 자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 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라! (고린도전서 15:9-10)“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 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8-9)“ 1808년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Die Schöpfung)>가 연주되었습니다. 그 <연주회장>에는 <하이든>도 참석했습니다. 연주가 모두 끝난 후 사회자는 이 곡을 작곡한 <하이든>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며 관객석에 앉아 있는 그를 소개했습니다. 모든 청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이든>에게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에 하이든은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의 <신앙의 겸손>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그의 <돈독한 신앙심>이 그로 하여금 대작을 작곡하게 한 <영감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 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베드로전서 5:5-6)“ 3. <기드온>은 <확신>을 갖기 위해 <하나님의 징표(徵標)>를 구했습니다. <기드온>은 사역의 <결정적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며 철저히 하나님께 의뢰(依賴)하는 신실한 <사역자>를 사용하십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 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그대로 된지라, 이튿 날 기드온이 일찌기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물을 짜니 그릇에 가득하더라!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 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번 양털로 시 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 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사사기 6:36-40)“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 느니라!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내려가서 그 진을 치리라! 기드온이 이에 그 부하 부라 를 데리고 군대가 있는 진가에 내려간즉,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더라!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 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 더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 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고, 이스라엘 진중에 돌아와서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내 손에 붙이셨느니라! (사사기 7:9-15)“ 전장에 나가는 <기드온>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군사와 무기가 아니라, 적과의 전투에서 전능하신 하 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예레미야17:7)“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4. <기드온>은 <하나님의 분부>에 지체(遲滯)됨이 없도록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 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 제를 드릴지니라!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 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사사기6:25-27 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지휘관이 그날의 전투 상황에 대해 장교들과 함께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어느 군인이 그 날 가장 탁월한 군인이었는지 생각들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먼저 한 장교가 그 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장교들도 이 군인, 저 군인 하며 각자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휘관은 말했습니다. “아니요! 여러분 모두가 다 틀렸어요! 오늘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나팔 소리대로 즉시 후퇴한 군인 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지체 없이 복종한 것이 오늘의 가장 소중한 <전과(戰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온전한 순종>이 바로 <바른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士師) <사무엘 선지자>는 전장(戰場)에 나가 하나님의 명대로 행하지 않고, 사욕을 위해 임의로 하나님의 명을 변개(變改)시킨 <사울 왕>을 혹독히 책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 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무엘상 15:22-23)“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분부하실 때 마다 핑계하거나 미루지 않고 즉시 <순종>했고, 추호도 변개됨 이 없이 하나님 말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분부들은 매번 그대로 실행하기에는 너무도 무섭고 위험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분부대로 순종했고, 사명완수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기드온의 믿음>이었고, <기드온의 능력>이었습니다. <스펄전 목사(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는 타 도시에서 자기가 돌보는 런던의 고아 들을 위해 300 파운드를 모금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 ‚그 돈을 <조지 뮬러 목사(George Muller, 1805-1898)>에게 갖다 주라!‘는 음성 을 들었습니다. “오! 주님, 저희 고아들도 이 돈이 필요한데요!” 그러나 그 음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네,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그 돈을 들고 <조지 뮬러 목사>에게 갔습니다. 마침 그 시간 <조지 뮬러 목사>는 무릎을 끓고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조지, 하나님께서 내가 모금한 300파운드를 당신에게 주라고 해서 가져 왔소!” “스펄전 목사님, 저는 지금 바로 300파운드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스펄전 목사>가 사무실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편지가 하나 와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안에 300기니의 헌금이 들어있었습니다. “오! 주여, 주께서는 제 300파운드에 이자까지 보태서 돌려주셨습니다!” 그는 감격해 하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때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마음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순종할 줄 아는 이 <신앙의 지혜>와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겠습니다.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예레미야 7:23)“ <아멘! >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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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net 대표 이승제 목사, '회막을 바라보라!'
가까운교회 이승제 담임목사.(사진제공=가까운교회) 민 16:36-50 억울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날때 회막을 바라보자. 고라의 반역의 뒷마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본문이다. 사람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며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라고 황당한 소리를 한다. 논리로 따질 수 있었고, 권위로 혼낼 수 있었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하며 공포를 줄 수도 있는 모세는 “회막을 바라 본다.” 역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 반역한 자들을 징계하신다. 억울한 일을 당한적이 있었다.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상의를 해보니 그렇게 한다는 것은 진흙탕 싸움이 되고 시간, 재정, 정신력이 쌍방간에 많이 소모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덮었다. 모세에게 나타난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으나, 지금 돌아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참은 것이 잘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바라보는 것이 리더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모세를 통해 배우는 아침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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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봄의 풍경'
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Ph.D./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봄의 풍경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 숲이 어느 새 푸른 빛으로 갈아 입었다. 몇주 전만해도 앙상한 가지들만 보여 을씨년스러웠는데 이제는 나무 숲이 되었다. 집 사람은 저 길 사이로 난 길로 산책을 즐기는데, 나는 멀리서 보면서 즐기고 있다. 나는 돌아다니는 것보다 한 자리에 앉아서 오래 쳐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옛날 의암댐이 보이는 삼막 산장에 앉아 멀리 펼쳐져 보이는 광대한 의암댐을 보고 망연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한국 가면 꼭 가보는 장소다. 고교 시절에는 경복궁 경회루 옆 소로에 앉아, 경회루와 물 위에 피어 있는 목련을 보면서 몇 시간씩 앉아 있었던 때가 있었다. 봄이 되면 볼 것이 많아진다. 봄이라는 명칭도 "본다"는 말에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목련은 다 떨어지고, 벚꽃이 한창이다. 지난 몇년동안은 코비드로 바깥 출입이 힘들었지만, 이제는 언제든지 나가 걷고 보고 즐길 수 있다. 지난 화요일에는 뉴욕 주 운동장을 찾아가, 몇 분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어찌나 날씨가 쌀쌀하고 바람이 심했던지 재미가 많이 줄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집에 오니 거의 10시가 되었다. 이렇게 다니고 걷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감사로 다가오는 것은, 나이 들어 마음대로 걷지 못하는 큰 누나 생각 때문일 것이다. 젊어서는 병원에서 "날쌘 돌이" 말을 듣던 누나도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걷는 일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인가, 평범하게 일상을 걷고 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사람의 행복은 자유에서 오고, 자유는 비움에서 오고, 우리가 비우고 섬기는 대상을 갖음으로 참 자유를 갖게 된다. 욕심과 죄는 사람을 수인처럼 가두워 놓는다. 그래서 죄를 떠나 사는 것과, 욕심을 비우고, 섬김의 대상을 갖는 일이 행복의 첩경이 아닌가, 싶다. 남자의 경우는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행복하다고 한다. 나는 성경과 신학을 전할 때, 행복을 찾는다. 그런 일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서 그런 생각들이 솟아나는지, 나도 놀라게 된다. 어제도 수요 예배 말씀을 전하면서, 생각지 않은 말씀들이 계속 흘러 나와서 신기해 하면서 말씀을 전했다. 밤새 그 설교를 듣고 듣고 하면서 홀로 은혜를 받게 되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평범한 표현 속에 끝을 알 수 없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역이 사람의 지혜와 머리로 될 수 없고, 성령의 계시로 된다는 것을 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래서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 자랑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다. 봄을 맞아 즐거우면서도, 이 봄이 너무 신속하게 지나간다는 사실 앞에 조금은 허전한 마음도 든다. 이 세상에서는 정말 귀한 것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 사람으로 아쉬운 마음을 갖게 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 늙음과 쇠약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장차 부활과 새 생명의 날에는 새 몸을 입고 쇠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소망이 있어 그날을 바라 보게 된다. 또 한편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 귀하고 아쉬운 마음을 갖는 것 아닌가도 싶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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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승리의 비결!'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사무엘하 5:13~25 승리의 비결, 주님께 묻고 순종하는 삶 저는 다윗을 통해 ‘묻는 기도’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다윗은 한 번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재차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묻는 기도를 들으시고 다윗에게 전면전을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라고 다윗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19절).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한 곳의 이름을 “바알브라심” 즉,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라고 부름으로써,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여호와를 높였습니다. 재차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여호와께서 전면전이 아니라 매복 작전과 기습공격을 다윗에게 명하셨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매복할 장소와 공격할 때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신 점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더욱 자주 드리겠습니다. 저도 다윗처럼 두려움과 교만을 내려놓고,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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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온누리침례교회 조민수 목사, '환난당한 자의 친구'
원주 온누리침례교회 조민수 담임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사무엘상 22:2]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환난당한 자의 친구" 다윗은 비록 쫓기는 처지였지만 환난당한 자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가드에서 추방당한 다윗이 아둘람 굴로 피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모두 환난당한 자빚진 자, 원통한 일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정처없이 쫓기고 있는 다윗에게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다윗 자신이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이해하고 품고 공감해주는 사람을 따르게 마련입니다. 다윗은 점점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지만 사울은 모든 사람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자신도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더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준 것같이 연약한 이들을 돌아보는 성도되길 축복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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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견금여석'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견금여석(見金如石) ♧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는 내 눈의 광명이요 내 마음의 평안이다. 잘 지내고 있는지 ~~~ 난 네가 곧 돌아와 결혼을 서두르기를 원한다. 네가 믿는 기독교도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라고 가르치겠지? " "~~~너 혹시 미친 것이 아니냐? 누가 우리의 거대한 재산을 관리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거라. 너는 우리 가문에 오점을 남기고 싶으냐? 네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세 개의 은행에 저금한 모든 돈을 몽땅 너에게 물려주겠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다면 네 몫으로 예금한 돈까지 물려주지 않겠다. 아들아! ~~~지금 나는 건강이 몹시 좋지 못하구나~~~ 가업을 물려 받아 이을 아들은 너뿐이지 않느냐? 제발 돌아오려무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족 신앙이었던 씨이크(Sikh)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고향과 친척을 두고 멀리 떠난 썬다의 마음을 돌리고자 그의 아버지는 계속해서 편지를 썼었다. 연이어 아버지의 편지가 날아왔지만 썬다는 아무런 답장도 연락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에 소개한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들게 된 것이었다. 썬다는 그 편지를 수십 번 반복해서 읽고 또 읽다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대단한 결심을 한 듯 고향으로 돌아갈 결단을 내렸다. 썬다가 고향에 도착했을 때에는 배척을 받아 쫓겨날 때와는 달리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어느새 백발이 성성해진 아버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맞이했다. "그래, 이제 내 말을 잘 듣기로 결심하고 돌아온 거겠지? 역시 너는 내 아들이다." 그러나 썬다는 잠시 침묵하더니 칼날보다 더 매서운 말을 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저는 아버지의 요청대로 살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아버지의 편지를 받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가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이곳 고향 분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아버지와 친지들의 설득과 박해가 뒤섞인 기간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썬다의 결심은 더욱 굳어져 갔고, 그 뜻을 굽히지 않는 썬다의 의지에 비례하여 집안의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아버지는 계속 협박을, 형들은 저주를 퍼부었다. 어린 시절 썬다를 무척이나 귀여워해 주던 집사 아저씨는 썬다를 지하실로 데리고 가서 보물 금고에 든 화려한 것들을 보여주면서 썬다의 회심을 독려하며 회유했다. 그러나 썬다는 이 모든 것들 앞에서도 의연했고 그의 대답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썬다가 부귀와 영화, 찬란한 금은보석들과 화려한 미래의 유혹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승리한 신앙을 간증해 준 것이기에 황금만능주의가 최장의 기세를 보이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기독자들이 꼭 짚어 보아야 할 것 같다. 견금여석(見金如石), 곧 "황금 보기를 돌같이 여겨라"라는 뜻이다. "최영(崔瑩:1316∼1388) 장군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항상 그에게 훈계하여 말하면서 생겨난 말이다. 고려의 명장이자 충신인 최영은 아버지의 말을 잊지 않으려고 비단천에 '見金如石'이라고 새겨서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최영은 고려에 쳐들어온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 등을 물리치고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도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남의 재물을 탐내지 않았으며 일반 백성들의 살림살이와 마찬가지로 겨우 생활하는 정도였으나 지나친 욕심을 절제하는 검소한 생활로 재물을 멀리하고 의리를 앞세웠다고 한다. 오늘에 이르러 "재물에 대해 지나친 욕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로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부귀영화를 생각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들에게 희생으로 헌신하는 공직 사회가 되고 일반인들에게는 그런 사회적 존재가 되어라는 뜻으로 쓰인다. 전무후무한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금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같이 많게 하였더라"(대하 1:15)라고 했다. 그의 선친 다윗과 비교해 보면, 다윗은 사십 년 통치 기간에 언약의 땅 판도를 완전하게 정복하여 이스라엘을 신정국가로 튼튼히 세우기 위해 전쟁터를 누벼야만 했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선친 다윗이 일궈낸 이스라엘의 판도와 여호와 경외 신앙 위에 세운 신정국을 이양 받아 "평화의 왕"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전쟁이 없는 국태민안과 휘황 찬란한 왕궁 생활과 금은을 돌처럼 백향목 평지의 뽕나무처럼 여길 정도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다윗은 성군의 이름을 얻어 오늘까지 모든 기독자들의 입으로부터 성군 다윗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지만, 솔로몬은 천여 명의 치마폭에 쌓여 하나님을 등지고 타락하여 이스라엘을 분열 왕국으로 몰고 간 원흉이 되고 말았다. 회개하고 돌아오긴 했지만 씁쓸하다. 가끔 부자들은 무엇을 먹으며, 어떤 일로 여가를 선용하며, 짜투리 시간은 무슨 일로 소일해 볼까? 자문해 보지만 아직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아서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안방극장에 소개하고 있는 뉴스나 드라마를 통해서 짐작은 하고 있지만 사람 사는 곳은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을까? 드디어 솔로몬은 제 인생의 끝자락에서야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요 우리 인생의 본분임을 깨달았고, 그것이 그의 불명예를 씻고 모든 인생의 가슴에 명언으로 남겨 그의 부귀영화보다 진한 감동을 주어 솔로몬 하면 그 말씀이 귀에 쏙 들어와 심비에 새겨진다(전 12:13). 어떤가? 썬다의 영적 기백이 그대 안에도 살아 있는가? 영적 해이(解弛), 우리 성도의 영혼과 영성에 무서운 암적 세포다. 최영의 "견금여석(見金如石)",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버금가는 공직 윤리이자, 사회적 존재들의 가치관이요 책임론의 준거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인류에게 가해진 홍수 심판이 노아 가족의 경험으로 족했듯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중에 그곳의 향락과 쾌락이 미련 남아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것이 롯의 처 한 사람으로 족했듯이, 일의 결국을 경험하는 것은 솔로몬 한 사람으로 족하지 않을까?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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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싱톤중앙장로교회 정지운 목사, '여호와 앞으로'
오륜교회 교육국장 정지운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민수기 16장 16-35절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면서 다양한 갈등을 직면하게 됩니다. 갈등은 왜 일어납니까?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영적인 사람과 영적이지 않는 사람들이 나뉘어지게 됩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갈등의 문제를 기도제목으로 올려드립니다. 반대로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꼬인 관계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풀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문제를 더 심각하게 꼬여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영적인 두 사람이 나옵니다. 모세와 아론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앞으로 향로를 들고 나아갑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답을 구했습니다. 갈등을 영적으로 풀려고 한 것입니다. 영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 앞으로 갈등과 문제를 기도제목으로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과 갈등을 자신의 힘으로 풀려고 하는 사람들은 차이가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앞으로 여호와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기도했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온은 250명의 사람을 통해서 여론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기도했고, 고라 일당들은 여론을 만들려고 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을 하면서 여호와 앞으로라는 구절이 깊이 다가옵니다. 아무런 일이 없을 때는 영적인 사람인지 영적이지 않은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영적인 상태가 드러납니다. 여호와 앞으로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새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의 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하루 위기를 만났다면 우리의 모든 상황을 여호와 앞으로 가지고 나와서 엎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jso8485@naver.com